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14일 오후에 대가大駕(왕이 타는 수레)가 어찌할 겨를도 없이 급하게 남대문을 나서 강화로 향하는데 적장 마부대가 수백 기를 거느리고 이미 홍제원에 다다랐다. 임금이 도로 들어오시어 남문에 전좌하시니 상하가 마음이 급하여 허둥지둥하고 성중에 곡소리가 하늘에 사무쳤다.
이조판서 최명길이 자청하여 적장에게 나아가서 만나보는 사이에 훈련대장 신경진에게 모화관에 출진하게 하고, 대가는 수구문으로 나와서 남한산성에 들어가셨다. 최명길이 마부대를 보고 조선에 온 까닭을 물으니 적장이 답하기를, “너희 나라가 무단히 맹세를 배반하였으므로 화친하러 왔노라.” 하였다. -1936년 12월 14일의 일기- 19일에 최명길과 윤휘가 적진에 가서 국서를 전했으나 끝내 답서를 내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우상 이하가 그냥 돌아오니 참판 한여직이 일렀다. “국서에 한 글자를 쓰지 않았으니 내 이미 대답하지 않을 줄 알았노라. 한 글자는 실로 클 ‘거巨’자라. 이제 김공[김청음]이 하처에 나갔으니 때를 타서 그 글자를 급히 써야 할 것이다.” 그러자 명길이 “그 말이 옳다.” 하고는 ‘신臣’ 자 쓰기를 정하였다. 전前 대사간 윤황尹煌*이 병들었다 하고 문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는 매일 저녁 그 아들 윤문거를 불러서 물었다. “화친하는 일이 어찌 되어 가는지 사람이 장차 죽겠구나!” 윤황은 본래 척화하던 사람인데, 나중에 이런 말을 하니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이날 우상 이하가 적진에 갔을 때 용골대 등이 “대병大兵을 여러 도에 보냈고 부원수가 잡히고 강화도가 함락되었다.” 하니 이는 곧 위협하는 말이었다. 성 안에 있던 조정 대신 중에 병들어 죽은 사람이 두엇 있었다. -1937년 1월 19일의 일기- 30일에 햇빛이 없었다. 임금이 세자와 함께 청의를 입으시고 서문으로 따라 나가실 때, 성에 가득 찬 사람들이 통곡하여 보내니 성 안의 곡소리가 하늘에 사무쳤다. 한汗(청나라 황제)은 삼밭 남녘에 구층으로 단을 만든 후 단 위에 장막을 두르고 황양산을 받쳤다. 단 위에는 용문석을 깔고 용문석 위에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교룡요를 폈다. 그 위에는 누런 비단 차일을 높이 치고 뜰에 황양산 셋을 세웠다. 정병 수만 명은 키가 크고 건장하기가 거의 비슷한 사람으로 가려 뽑아 각각 수놓은 비단옷과 갑옷을 다섯 벌 껴 입혔다. 한이 황금상 위에 걸터앉아 바야흐로 활을 타며 여러 장수들에게 활을 쏘게 하더니 활쏘기를 멈추고 전하로 하여금 걸어서 들어가게 하였다. 백 보 걸어 들어가셔서 삼공육경三公六卿과 함께 뜰 안의 진흙 위에서 배례하시려 할 때였다. 신하들이 돗자리 깔기를 청하는데 임금께서 “황제 앞에서 어찌 감히 스스로를 높이리오.” 하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셨다. ― 1937년 1월 30일의 일기- 하늘이 서리와 이슬을 내리시니 이에 씩씩하고 이에 기르는구나. 오직 (청나라) 황제가 이를 본받으니 위엄과 법을 베푸는구나. 황제가 동쪽으로 치니 그 군사가 십만이로다. 은은하고 소리가 대단하니 범 같고 곰 같도다. 서쪽 변방과 북쪽 부락이 창을 잡고 앞에서 모니 그 위엄 있는 명령이 혁혁하도다. 황제가 심히 어질어 은혜의 말을 내리시니 열줄[십행륜음]이 밝아 도리어 엄하고 또한 온화하도다. 처음에 미혹하여 알지 못하고 스스로 근심을 끼쳤더니 황제의 밝은 명命이 있으니 잠을 깨었도다. 우리 임금이 공경하여 항복하니 서쪽으로 (신하를) 거느려 돌아가는구나. 한갓 위엄을 두려워할 뿐 아니라 오직 덕을 의지하도다. 황제께서 아름답게 여기셔서 덕택이 흡족하고 예수가 넉넉하도다. 이네 기꺼워하고 이에 웃고 병장기를 묻도다. 무엇을 주었는가, 좋은 말이며 가벼운 갖옷이로다. 도인과 선비와 부인들이 이에 노래 부르도다. 황제가 군사를 돌이켜서 우리 농사를 권하는구나. 마른 뼈에 두 번 살이 나고 시든 풀에 다시 봄이 되도다. 돌이 있어 무성하니 큰 강가로다. 삼한三韓 말년에 황제의 아름다움이로다. -삼전도비의 내용- . |
|
『산성일기』는 누르하치를 이은 홍타이지가 청淸을 세우고, 두 번에 걸쳐 조선을 침략하여 치욕의 삼전도비를 세우기까지, 그 고통스런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전쟁을 기록한 이는 왕과 함께 산성에서 50여 일을 보냈다. 그는 피눈물을 삼키며 청에 무릎꿇는 과정을 하나하나 섬세하게 적어 내렸다. 한때 용맹했던 우리 군사, 주화파와 척화파의 갈등, 청과 조선을 오가던 국서들,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한 왕과 왕자, 변절과 충절, 강자의 오만함……. 한마디로 이 책은 전쟁이라는 큰 사건을 통해 인간의 참모습과 역사의 진실을 되짚어 오늘을 돌아보게 한다. 1. 전쟁 조선은 일찍이 1592년과 1597년에 일본을 ‘왜倭’라 하며 깔보다가 침략을 받은 적이 있다. 수많은 인명과 재산을 앗아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발발한 것이다. 앞서 류성룡이 왜란을 겪고 『징비록』이란 책을 남긴 것은, 깊이 반성하고 깨우쳐 다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 후 채 50년도 되지 않아 이번엔 대륙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500년 조선 역사의 최대 치욕으로 기록되는 1627년의 정묘호란과 1636년의 병자호란이 그것이다. 전쟁은 왕을 비롯해 나라를 이끄는 소수 지도자의 잘못된 판단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런 오판은 무지와 게으름과 자만에서 연유한다. 정묘호란 후 조선은 꾸준히 청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을 수축하고 군비를 하였다. 그것은 한창 정복전쟁을 벌이며 힘을 키워 나가던 청에 비하면 극히 미약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국제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청을 오랑캐라 깔보며 자만했던 조선의 왕 인조는 먼저 청과의 단교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전쟁을 예견하며 각 군사요지에 장수를 파견하였다. 그런데 막상 청이 국경을 침입했을 때, 안일하게 성을 지키고 있던 도원수 김자점은 말했다. “도적이 반드시 오지 않으리라.” 2. 사람 전쟁이 터지면, 사람들은 드디어 그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다. 『산성일기』를 통해 보여지는 당시 조정도 그러하다. 가속의 피란을 위해 아들을 피란지인 강화도 검찰사를 시킨 김류, 저 먼저 살겠다고 강화로 피란한 후 배를 내어주지 않아 왕의 가속들을 애타게 했던 그 아들 김경징, 척화를 주장하다 화의로 돌아선 윤황, 임금 가까운 곳에서 척화신을 내놓으라 큰 소리로 떠들어대는 장수들, 왕이 언급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청나라에 보내는 국서에 ‘신臣’을 써 넣어 조선을 청나라의 신하로 끌어내리는 사신들, 신하들을 원망하다 못해 스스로 적에게 나아가 화의를 청하겠다는 왕세자, 적에게 항복하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죽겠다며 자살을 기도하는 신하들, 적들이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왕의 의복을 벗고 진흙 바닥에서 절을 하며 항복하는 왕,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면서도 꼿꼿했던 삼학사…… 그들을 통해 오늘의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참다운 나를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3. 남한산성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당시 인조와 조정의 주요 신하들이 50여 일간 피란하여 청군과 대치한 곳이다. 또한 인조가 청에 항복을 고하기 위해 청의를 입고 직접 걸어 나온 곳이기도 하다. 훗날 인조의 아들 효종은 그 치욕을 잊지 않고 북벌을 계획했다. 그리고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었던 영조는 병자호란의 치욕과 효종이 북벌을 계획했던 그 마음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수어장대(남한산성의 서장대)에 ‘무망루無妄樓’라는 현판을 달았다. 뿐만 아니라 종종 남한산성을 들러 그 다짐을 늘 새로이 하였다. 오늘 다시 찾은 남한산성은 산책이나 조깅을 즐기는 인근 사람들과, 멀리서 사찰을 찾아온 불교신자들로 붐볐다. 그리고 간간이 수어장대까지 올라온 아저씨가 같이 온 아이에게 말한다. “이곳이 말이야, 예전에 왕이 군대를 호령하던 곳이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