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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판을 펴내며
첫 번째 강의 ― 기독교와 다른 종교 두 번째 강의 ― 세상에 밥으로 오신 예수 세 번째 강의 ― 세상의 미움을 받으신 예수 네 번째 강의 ― 마귀를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다섯 번째 강의 ― 마땅한 일을 마땅한 방법으로 여섯 번째 강의 ―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일곱 번째 강의 ― 달콤한 속삭임 속에 감춰진 독침 여덟 번째 강의 ― 고향에서 죽을 뻔한 예수 아홉 번째 강의 ― 사람을 낚는 노동자로 열 번째 강의 ― 전쟁과 종교와 예수 족보 열한 번째 강의 ― 새 술은 새 부대에 열두 번째 강의 ― 내가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다 열세 번째 강의 ― 따돌림 받으신 예수 열네 번째 강의 ― 혼자 죽어서 여럿으로 살아나 열다섯 번째 강의 ― 하늘에 오르신 예수, 불꽃으로 내려온 말씀 |
李賢周, 관옥(觀玉), 이오(二吾), 이 아무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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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세대를 위한 신학 강의』를 다시 펴내다
의심나면 의심하라 기독교인은 “오직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으리라”는 명제에 지나치게 얽매여 성서와 교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스스로 차단해버리는 우를 범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예수의 가르침이나 하나님의 섭리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올바로 이해하기를 포기한 맹목적인 신앙은 오히려 진정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데 독이 된다. 이현주 목사는 성경을 읽다 의심이 생기면 의심하라고 한다. 신앙인이 의심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지 그 말씀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인간의 언어까지 의심 말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경의 주인공들은 끊임없는 질문과 의구심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다. 모세가 호렙 산에서 불붙은 떨기나무를 보고도 그냥 지나쳤다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을까? 이현주 목사는 “학문(學問)은 배우고 묻는 일이며 훌륭한 학자는 남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남이 묻지 못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가 강의하는 ‘신학(神學)’은 단순히 신에 대한 지식을 쌓는 작업이 아니다. 그는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학문을 하는 이유는 신에 대해 거듭 질문함으로써 인간이 좀더 인간다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 인간이 신에 대하여 무엇을 안다면 그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부분이 감추어져 있음을 기억하기를 권고한다. 이 책은 단순한 성경 해설서가 아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품었을 법한 예수, 구원, 교회 등에 대한 원초적인 의구심을 풀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현주 목사는 하나님 ‘말씀’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는 수단으로 동서양의 다른 종교 교리와 동양 철학을 인용한다. 이로써 ‘진리’란 기독교 교리나 성경 구절 안에만 갇힌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세상에 ‘밥’으로 오신 예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6;35) 예수의 죽음이 지금 나의 삶과 직결된다는 진리는 ‘만물이 하나요 하나가 만물’이라는 동양의 가르침을 만났을 때 확연해진다. 시와 공을 넘어 인류는 하나이며 그 하나인 인류와 내가 떨어질 수 없는 몸이므로, 오늘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나를 살리고자 다른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다는 반증이라 할 수 있다. 이현주 목사는 “밥은 곧 하늘이다”라는 해월(海月)의 말을 통해 예수가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한 의미를 다시 떠올린다. 밥이란 무엇인가? 남은 살리고 저는 죽는 존재, 끊임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생명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그가 스스로 만들어 짊어진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에게 지운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 자체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지 않을 수 없도록 살아간 그의 삶, 그의 말과 생각과 행동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와 연관이 있다’는 진리가 중요하지 ‘대속의 교리’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믿음이란 사후의 구원을 위한 것만이 아니다. 예수의 삶이 주는 교훈을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져야 하고 그것이 신학을 공부하는 이유여야 할 것이다. 요한복음하고 마가복음에서 읽은 것은 예수님이 “내가 밥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이고(성경의 떡은 우리네 식으로 말하면 밥이니까) 지금 기림이가 누가복음에서 읽은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은 밥으로 오신 분이다” 하고 고백한 거야. 자, 그럼 밥이란 뭐지? 밥을 안 먹으면 우리는 어떻게 돼? 죽지? 그러니까 밥은 우리를 살게 하는 거야. 그런데, 우리를 살려주려면 밥은 어떻게 돼야 하나? 우리 뱃속에 들어가서 죽어 없어져야지. 그러니까 예수님이 세상에 밥으로 오셨다는 말은 우리를 살리려고 스스로 죽임을 당하신 분이라는 말이 되는 거야. 마가복음 15장 31절에 보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하고 조롱하는 대목이 있어. 그래, 그 말대로야.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려고 당신 자신은 죽어야 했던 거야. 밥이니까! 본문 33쪽( ‘세상에 밥으로 오신 예수’ 중) 가장 흔한 사람이 가장 귀한 사람이다 베드로는 예수를 처음 만났을 때 어부였다. 예수는 왜 하필이면 어부를 제자로 삼았을까? 노동이란 인간이 몸으로 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 기초적이며 성스런 행위이다. 특히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일은 노동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어머니 노동이다. 당시 유대의 주된 먹을거리 중 하나가 물고기였다. 가장 성스럽고 기초적인 노동을 하는 어부야말로 예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 이현주 목사는 예수가 유대가 아닌 우리나라에 왔다면 농부를 제자로 삼았을 거라 말한다. 또 하나, 베드로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평범하고 흔히 대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예수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은 생명이야. 생명이 없다면 다이아몬드가 가마니로 있어도 소용이 없지. 그런데 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 금이 더 필요하니, 쌀이 더 필요하니? _쌀이지요. 맞았어. 생명에는 금보다 쌀이 더 필요해. 쌀보다 물이 더 필요하고 물보다 공기가 더 필요해. 쌀은 한 달쯤 못 먹어도 살지만 물은 며칠만 못 먹어도 죽거든. 또 물은 며칠 동안 안 먹어도 살 수 있지만 공기는 단 몇 분만 안 먹어도 죽지. 그러니까 금보다 쌀, 쌀보다 물, 물보다 공기가 우리에게는 귀중한 거야. 그런데 하나님은 귀중한 것일수록 흔하게 만드셨단다. 금보다 쌀, 쌀보다 물, 물보다 공기가 더 흔하지 않니? 그러니까 이른바 드문 것이 귀하다는 ‘희소가치’란 말은 적어도 생명에 관한 한 잘못된 말이야. 생명한테는 가장 흔한 것이 가장 귀중하고 값진 것이지. 사람도 그렇단다. 가장 흔한 사람이 가장 귀중한 사람이야. 본문 126쪽( ‘사람을 낚는 노동자로’ 중) 예수 족보 아래 전쟁은 있을 수 없다 누가는 예수 족보를 예수부터 아브라함, 아담을 거쳐 마침내 하나님에 이르는 것으로 기록했다. 이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한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믿음을 보여준다. 예수 족보 아래서 전쟁은 있을 수 없다. 전쟁이란 단순히 다투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것이고, 형제를 죽이는 것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의 삶과 길』이 쓰인 당시 미국은 걸프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스스로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2003년 미국은 다시 이라크를 침공했다. 정의로운 심판은 하나님의 몫이지 미국의 몫이 아니며, 미국은 심판의 주체가 아니라 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다시 새겨봄직하다. 노자의 말대로 하면 지금 부시 대통령은 사담의 이라크에 대하여 ‘큰 목수를 대신하여 나무를 깎는 자’ 노릇을 하겠다고 자진해서 나선 셈이 되는 거야. 노자의 가르침인즉 “아서라, 그러는 게 아니다. 아무나 다 하늘의 일을 대신할 수 있는 게 아니야”쯤 되겠지. 예수님도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마태복음 7:1~4) 이렇게 말씀하셨지 않니? 본문 135쪽(‘전쟁과 종교와 예수 족보’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