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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현대시기 토지탈환운동 연구
양장
박이준
선인 2007.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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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한국학연구총서

책소개

목차

책머리에

I. 머리말
1. 연구사 정리
2. 연구자료 검토

Ⅱ. 궁삼면의 자연·지리적 환경과 사회·경제적 배경
1. 자연·지리적 환경
2. 사회·경제적 배경

Ⅲ. 한말 慶善宮의 토지침탈과 농민들의 저항
1. 戊子年(1888) 가뭄과 궁삼면의 피해
2. 京邸吏 全聖暢의 토지 勒奪
3. 慶善宮의 토지침탈과 농민들의 저항
4. 臨時帝室有 및 國有財産調査局과의 토지소유권 분쟁
5. 소결

Ⅳ. 식민지시기 동척을 상대로 한 토지탈환운동
1. 동척의 토지 매입과 토지소유권 분쟁
2. 1920년대 궁삼면 농민회의 조직과 토지탈환운동의 전개
3. 1930·1940년대 궁삼면 농민들의 동향
4. 소결

Ⅴ. 미군정기 농민회의 재건과 궁삼면 농지탈환운동
1. 해방과 궁삼면 농민들의 활동
2. 궁삼면 농민회의 결성과 활동
3. 미군정과 신한공사의 궁삼면 토지 귀속
4. 신한공사의 귀속농지 분배와 귀속농지 논쟁
5. 소결

Ⅵ. 이승만 정권의 농지개혁과 유상분배
1. 궁삼면 농민회의 국회 청원운동
2. 농지개혁과 한국전쟁
3. 소결

Ⅶ. 해방 이후 하의삼도 농지소유권 분쟁 해결과정과 성격
1. 하의삼도 농지분쟁의 경과
2. 해방 이후 하의삼도 농지소유권 분쟁
3. 소결

Ⅷ. 결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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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자 : 박이준
한국근현대사 전공으로 전남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목포대, 전남대, 조선대 강사와 목포대 연구교수를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박남진 1925년 5월 25일생』『고향이 어디신가요』『역사에 비춘 한국근현대인물』『궁삼면 토지탈환운동연구』『일제하 지주가의 소작관행 연구』「목포 개항장 상인층 연구」「전남지방 3·1운동연구」등이 있다.

품목정보

발행일
2007년 03월 30일
판형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271쪽 | 636g | 153*224*20mm
ISBN13
9788959330805

출판사 리뷰

'農者之天下之大本'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말 가운데 하나다. 우리 역사를 통틀어 농민은 항상 역사의 한가운데 서 있던 주인공들이었다. 하지만 농민들은 전근대시기 역사의 주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근간을 이루고 있던 토지소유권은 확실하게 갖고 있지 못했다. 전근대 신분제 사회에서 토지는 곧 국왕의 것이라는 왕토사상이 자연스럽게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의 주체였던 농민들이 자주적 토지소유권을 확립할 수 있는 기회는 근대사회로의 이행기였으며, 그 방법으로는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라 농민적 토지소유권을 실현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었다. 하지만 한국 근대의 창은 제국주의 침략과 일제의 식민지라는 왜곡된 형태로 열렸고 이는 곧 역사의 주체인 농민들의 자주적 토지소유권의 실현 기회가 무산되었음을 의미했다.

반식민지와 식민지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한국 농민들은 자신들의 토지소유권을 인정받지 못하고 민유지를 빈번히 늑탈당했다. 한말 관료들의 부패와 궁방토의 확대, 열강의 토지늑탈 등 모든 조건들이 농민들의 소망을 빗겨나가게 만들었다. 근대사회로의 이행기에서 소외된 농민들은 자신들의 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담보로 저항해야만 했는데, 그것은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농민들은 토지를 떠나 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곡창지대인 나주와 신안 하의삼도 등지는 이러한 역사의 흐름 한가운데에 있었다. 나주 궁삼면(지죽, 욱곡, 영산면) 토지와 하의삼도(하의도, 상태도, 하태도) 농지들은 농민들이 손수 개간하거나 대대로 내려온 민유지였다. 하지만 한말 궁방과 내장원은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민유지를 침탈하였다. 농민들의 밥그릇을 지켜줘야 할 정부가 농민들의 밥그릇을 손수 빼앗아 버린 형국이었다.

이 땅의 농민들은 강하게 저항했다. 목숨을 건 사투였던 것이다. 하지만 '지주'들은 농민들의 절규를 뒤로한 채 이들의 토지를 동양척식회사와 개인에게 팔아넘기기에 급급했으므로 농민들은 억장이 무너지고 피를 토할 심정이었다. 이들은 울분을 삭이는 대신 땅을 파고 곡식을 거둘 때 써야 할 곡괭이와 낫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농민들의 저항은 법정투쟁을 비롯해 대중집회, 소작료 불납운동, 청원운동 등으로 나타났고 운동의 수위를 조절하면서 잃어버린 토지를 찾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자신의 토지에서 농사를 짓고 '지주'에게 소작료를 내는 처지에 놓인 농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은 총력을 다했다.

해방, 이 땅의 농민들에게 해방은 자신들의 토지를 되찾을 수 있다는 꿈을 부풀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한반도 이남을 점령한 미군정은 이들의 희망을 또다시 가차없이 짓밟았다. 이들의 토지가 '적산'이라고 청천벽력 같은 포고령을 내린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그랬듯이 농민들은 미군정의 포고령을 부정했다. '농투성이'들은 서울로 올라와 자신들의 입장을 적은 문건을 영어로 번역한 번역본과 한글본을 만들어 미군정과 시민들에게 나눠주며 자신들의 억울함을 알렸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 수립은 이들 농민들에게 또 다른 의미였다. '우리정부'가 들어섰기에 그동안 이들이 흘린 눈물을 대한민국정부가 닦아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은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원칙을 이들 농민들에게 들이 밀었다. 농민들의 배신감은 어느 때보다도 컸다. 농민들은 제헌 국회를 찾아가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제헌국회는 이들 농민들의 눈물 어린 호소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국회 농림분과 위원들이 나주와 하의도를 현장 방문하고 이들에게 토지를 돌려줄 것을 잠정적으로 결의하였다. 농민들이 반세기 만에 맛보는 희망의 빛이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농민들이 국회에 제출한 모든 문서가 소실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결국 제헌국회의 잠정 결의안은 수포로 돌아갔고 농민들은 자신들의 토지를 자신들의 돈으로 사야만 했다.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궁삼면 토지탈환운동은 일찍이 소설 『타오르는 강』(문순태)로 일반인들에게 소개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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