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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파드
[반ː] 머리검은토끼 이베리아의 전갈 달밤에 고백 코끼리가 걷는 밤 여자처럼 붉은 숲 해설_아무것도 아닌 자들의 특별한 삶_권희철 작가의 말 수록작품 발표지면 |
崔旻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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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처음으로 틈새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 나는 세상의 틈새에 있다. 여기는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래서 안전하다. 여기서 나는 세상으로 다시 나갈 준비를 하는 거다. 1인 돈까스라는 게, 나한테는 그런 의도 있는 거야. 세상의 풍랑에서 안전하다는 느낌. 자기 세계를 가질 수 있다는 느낌. (「레오파드」, 15p)
딱딱하게 굳은 그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여기서 일할 수 없으리라는 걸 알았다. 내 탓이 아니라는 건 그들도 알고 나도 알았다. 그러나 폭풍이 불어닥쳤을 때 선원들이 밀항자를 찾아내 바다로 던져버리듯 누구가는 이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나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거기서 내가 망친 게 아니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있을 때 일이 좆 됐다는 게 중요했다. ([반ː], 62p) 어질어질한 머릿속에서 민희의 얼굴과 현숙의 목소리가 뒤섞였다. 마치 민희가 지금 자기 아내로, 다른 남자와 낳은 딸과 함께 언제든지 조곤조곤한 말투로 자신을 속일 준비가 되어 있는 현명하고 머리 검은 아내로 둔갑해 지금 자신과 이야기하고 있기라도 하듯. (「머리검은토끼」, 87p) 하지만 누가 손에 피를 묻히건 그의 죽음은 부패한 전 정부의 복수로 비칠 것이다. 새 정부에게는 어느 쪽이건 남는 장사였다. (……) 귀국에 대한 갈망과 손상된 명예에 대한 집착이 경험 많은 베테랑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블랙이 봤다고 생각했던 빛은 그의 내면에서 나오던 게 아니라 그를 가리고 있던 희망의 장막에서 반사된 것이었고 그를 감싸는 활기는 덫을 보지 못하고 먹이에 달려드는 짐승의 성급함에 불과했다. --- p.119 보석상을 털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찌 됐을까 생각해보곤 했어. 많이는 아니고 가끔. 딱히 결론이 나진 않더라고. 세상일이 그렇지. 옳고 그른 게 딱 나뉘질 않잖아. 여섯 정도는 옳고 넷 정도는 그를 수도 있고, 반반일 수도 있고. (……) 우린 불확실한 상황에서 판단을 내리고 결정을 해야 해. 그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하고. 남자라면 더. --- p.127 우리가 필요할 때는 말을 걸고 관심을 기울이고 때로는 동정도 하지만 결코 얼굴을 기억하지는 않는 사람들과 불현듯 눈을 마주치게 되는 바로 그때, 코끼리처럼 큰 귀에 우람한 덩치의 중년 남자와 커서 미인이 될지도 모를 퉁퉁한 여중생이 불길한 비밀을 감춘 채 인구 천만의 도시 속에서 약간의 후원금을 벗 삼아 발걸음을 옮기며 골목과 거리를 떠도는 모습을 본 것 같다는 착각에 가끔 빠지기도 했다. --- p.169 좁고 고요한 임대아파트 부엌에서 부용이 병철의 목에 칼을 찔러 넣었을 때 그의 동공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바싹 졸아들었다. 그다음부터 그는 고기였다. 누가 만져도 똑같은 고기. 누구라도 살과 뼈를 가르고 뼈와 뼈를 분리하고 가죽을 벗겨내고 연골을 파내고 지방을 밀어내고 털을 골라내고 내장을 다듬고 피를 씻어낼 수 있는 고기. --- p.201 사고에 대해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고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청문회에 나온 증인들은 어쩔 수 없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윗사람이 시킨 대로 하다 보니, 아랫사람이 멋대로 하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라고 했다. 윗사람이건 아랫사람이건 모두 그렇게 말했다. 수연은 자기가 단지에 들어간다면 아버지의 목숨을 길에 내다 파는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 p.2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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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하지 못한 채로 절정인 것들,
반쪽짜리 인생들이 만들어내는 특별한 순간! 최민우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에서 강력한 실감을 느끼는 이유는 완벽하지 않은, 뭔가 부족한 듯한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험난한 세상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곳을 찾기 위해 1인용 돈까스집에 그려진 가짜 문 속으로 사라지는 사람들(「레오파드」),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덜컥 아이부터 임신한 의붓딸과 그녀의 남자 친구(머리검은토끼 록 밴드 그룹의 멤버) 때문에 골머리를 썩는 한물 간 트로트 가수(「머리검은토끼」), 우연히 취직하게 된 ‘떴다방’(중년 여성들을 현혹해 물건을 비싸게 팔아치우는)에서 오래전 집을 나갔던 어머니(떴다방의 알선책인 거미가 되어 돌아온)와 재회하게 되는 ‘나’(「반ː」), 그리고 옛 애인이었던 민영이 과거에 후원금을 노린 부녀 사기단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와 거리를 두려는 ‘나’까지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온전한 것이 하나도 없는 반쪽짜리 인생들이다. 하지만 반쪽과 반쪽이 만나서 완벽한 하나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다행이라면, 반쪽과 반쪽이 부딪히면서 만들어내는 짜르르한 스파크가 우리를 권태로운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는 점이다. 나는 열심히 길을 설명하는 어머니의 옆얼굴을 보았다. 명치와 심장 사이가 찌르르 흔들렸다. 그건 이 수첩을 채우는 동안 어머니가 겪었을지도 모를 이런저런 풍파에 대한 연민일 수도, 동종업계 종사자로서 갖는 공감일 수도, 아니면 태어나서 처음 경찰서에 다녀온 충격의 여파일 수도 있었다. 역류성 식도염일 수도 있었겠지만. (……) 나는 고삐를 꽉 죄는 기분으로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어깨를 펴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어머니 뒤를 따르며 환하게 웃었다. 고객은 소중하다. ([반ː], 63~64쪽) 평범한 삶 속에 숨겨져 있는 아주 사소하지만 특별한 비밀들 최민우의 특별함은 평범해 보이는 일상 속에 숨겨져 있는 ‘비밀’ ‘틈새’ ‘균열’을 예민하게 감각해내는 데 있다. 「레오파드」에 등장하는 비밀요원이 담당하는 사건들이라는 것도 사실 “지극히 현실적이고 평범한 사연”들이다. “벽에 얼굴이 나타난다든가, 푸들이 홍수를 예언한다든가, 떨어져 살던 세쌍둥이가 한날한시에 앓아누웠다가 동시에 사망한다든가” 하는 일들도 “실제 밝혀지는 진상은 소설처럼 정교하지도, 경천동지하게 상식을 일탈하지도 않”(「레오파드」, 11쪽)는다. 하지만 비밀요원이 속한 협회의 신조처럼 “중요하지 않은 것이 중요”한 법. 이상해 보이지 않는 자연스러움이야말로 정말이지 이상한 것을 감추기 위한 위장술일 수 있다. 그러므로 진짜 중요한 비밀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고, 중요해 보이지도 않는 것들일 가능성이 크다. D마트 익스프레스 정육 코너에서 일하는 ‘부용’이 가진 엄청난 비밀도 “누가 만져도 고기는 고기. 먹는 사람에겐 다 똑같은 것”(「여자처럼」, 188쪽)이라는 평범한 문장 속에 감춰져 있으며, 좀비로 변해가는 ‘나’에 대한 ‘피노’의 사랑도 치료약을 구하기 위해 사막을 건너는 동안 “고분고분” “내 뒤만 졸졸 따라”(「달밤에 고백」, 144쪽)오는 단순한 행위로만 표현되고 있다. 이처럼 최민우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평범한 순간들에도 아주 약간은 뜨겁고 짜릿하고 돌발적이고 슬프고 우스운 갈등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놓치지 않고” 포착해내고 있다. 이러한 미량의 짜릿함들이 모이고 모여 완벽하지 못한 반쪽 인생들이 “권태라는 질병에서 회복해 욕망-삶을 다시 일렁이게 만들 첫번째 파도를 예감하고, 특별한 삶의 순간”(권희철 해설, 「아무것도 아닌 자들의 특별한 삶」)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보다 뜨겁고, 보다 짜릿하게. ‘작가의 말’ 중에서 이 책에 수록된 단편들은 한 편을 제외하고 2012년에서 2015년 사이에 발표되었다. 책으로 묶으면서 가필과 삭제와 수정을 했지만 몇몇 대목은 처음의 의도를 존중했다. 여기 실린 이야기들은 상상의 산물이며, 현실과 조금이라도 겹친다면 순전한 우연의 일치다. 전혀 겹치지 않는다면 그 또한 놀라운 우연의 일치다. (최민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