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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긴이의 말
- 머리말 1장 한국 병합 조약 등 무효론의 역사와 현재 1. 한국에서의 무효론의 전통 2. 한 · 조 · 일의 역사 인식의 차이 보론 2장 ‘한일의정서’와 제1차 ‘한일 협약’ 1. ‘한일의정서’ - 한국 보호국화의 기점 2. ‘한일의정서’의 전개 - 제1차 ‘한일 협약’ 보론: 보호국의 법적 규정과 보호국 구상 3장 제2차 ‘한일 협약’ 1. 대한 보호권 설정 계획 2. 제2차 ‘한일 협약’의 강제 조인 3. 제2차 ‘한일 협약’의 법적 문제 4장 제3차 ‘한일 협약’ 1. 통감부 행정과 국제 관계 2. 헤이그 ‘밀사’ 사건과 제3차 ‘한일 협약’ 3. 한국 내정권의 침탈 5장 한국 병합 조약 1. 한국 병합 계획의 발진 2. 한국 병합 조약의 조인 3. 한국 병합 조약 무효설에 대해서 - 후기 - 역자 보론: 일본제국의 ‘한국강점’을 어떻게 볼 것인가? - 한국병합사 관계 연표(1897~1910) - 찾아보기 |
鄭在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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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대일본제국이 대한제국을 폐멸하는 과정에서 맺은 일련의 조약을 보는 시각은 한국과 일본의 역사인식이 서로 어떻게 다른가를 검증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사안이다.
한국에서는 ‘한일의정서’(1904.2.23)에서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1910.8.22)에 이르는 주요 조약이 일본의 강압, 사기, 날조 등에 의거하여 맺어졌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인식이 강하다. 특히 대일본제국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는 근거가 된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은 불법 · 부당의 정도가 지나쳐 당시부터 그 조약의 성립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이러한 조약무효론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등 민족해방운동 세력에 계승되어 오늘날에도 남북한이 공유하는 역사인식이 되었다. 반면에 일본에서는 위와 같은 조약이 양국의 합의 아래 맺어졌을 뿐만 아니라,국제사회의 승인을 받아 효력을 발휘한 실재의 조약이라고 인식한다. 당시 대일본제국과 대한제국은 국내법과 국제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합법의 절차를 거쳐 조약을 체결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약 유효론은 당시 이래 일본 정부의 공식 견해가 되어 오늘날까지 계승되어 대다수 일본인이 공유하는 역사인식이 되었다. 그런데 최근 한국과 일본에서 역사학의 연구방법과 국제법의 적용방식을 동원하여 양국의 역사인식을 재검토하고 수정 · 보완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당시의 외교문서와 조약 사례 등을 정치하게 분석하여 각 조약의 적법성과 유효성을 재검증하는 작업이 활발해진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태진 교수, 일본에서는 운노 후쿠쥬 교수가 이런 활동의 중심인물이다. 두 교수는 지난 몇 년 동안 상대방의 논문에 반론을 제기하는 형식으로 논전을 거듭했고, 그 성과를 자신의 논지를 보강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각각 몇 권의 저서도 출간했다. 그 전모에 대해서는 이 책의 말미에 게재한 역자의「일본제국의 ‘한국 강점’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참조하기 바란다. 이태진 교수와 운노 후쿠쥬 교수의 논전은 종래 두 나라가 일반적으로 견지해온 역사인식의 틀을 새로 바꿔 놓을 만한 결과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역사학과 국제법의 이름으로 양국의 기존 역사인식을 더욱 보강하는 효과를 발휘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불가피한 일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학문상의 논쟁이라 하더라도, 근현대 한일관계의 근간을 규정하는 중요 조약의 적법 · 불법, 유효 · 무효, 정당 · 부당을 따지는 논쟁이 ‘국민’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과 일본의 역사인식을 둘러싼 토론에 자주 참가했다. 그때마다 대일본제국의 대한제국 폐멸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가 논의의 초점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태진 교수와 운노 후쿠쥬 교수의 논전은 주목할 가치가 있었다. 특히 양국의 일급 역사학자가 엄밀한 고증과 실증을 무기로 하여 ‘한일의 뜨거운 현안’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일 자체가 긴장과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두 사람의 논전을 우리 대학의 대학원 수업에서 철저히 검토했다. 두 사람의 논전은 학생들이 한국과 일본의 역사인식과 그것의전제가 되는 역사 연구를 비교 검토해볼 수 있는 절호의 테마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메이지시대의 난해한 외교문서를 종횡으로 인용하고 있는 운노 교수의 저작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번에 출간한 『한국병합사연구』한글 번역본은 나와 학생들이 절차탁마의 자세로 그런 난제와 씨름하면서 생산한 노작이다. ---역사 서평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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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대립하는 역사 인식을 짊어진 채 ‘과거 청산’을 이루기는 힘들다. 전후 일본이 두 번의 ‘과거 청산’ 기회를 놓친 것도 이 때문이다. 최초의 기회는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였다. 일본과 교전관계에 있었던 한국은, 당연히 강화 회의에 참가할 수 있을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것은 미국의 의향이기도 했는데, 일본 정부는 당시 100만 명이라고도 일컬어지던 재일 한국 · 조선인이 전승(戰勝) 국민으로서의 지위를 갖는 것에 반대하고, 계획을 유산시켰다. 두 번째 기회는 ‘한일 회담’이다. 회담은 당초부터 과거의 한일 관계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위치 정립을 과제의 하나로 내걸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본격적인 논의를 피하고, 일본의 조선 지배에 대한 역사적 규정은 언급하지 않은 채 회담을 마무리 지었으며, 배상(賠償) · 보상(補償) 지불을 회피하였다. 사죄도 없었다. 식민지 독립전쟁에 따른 통절한 패전 경험이 없고, 전후의 가혹한 냉전 체제를 겪지 않은 일본은 식민지 지배의 ‘기억’을 잊어버리는 데 힘을 쏟아, ‘과거’에 대한 통렬한 자각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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