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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경계와 영향 | 바로크 대 로코코: 두 시대의 분리 | 18세기 유럽의 간략한 역사 건축 프랑스 로코코의 귀족 궁전: 오텔 드 수비스 | 바이에른 로코코의 세속적 보배: 아말리엔부르크 | 프리드리히 로코코 양식의 ‘근심 없는’ 여름 레지덴츠: 상수시 성 | 뷔르츠부르크 로코코 양식의 대표작: 제후주교 레지덴츠 | 종교 건축의 대담한 계획: 14성인 순례교회 | 다채로운 빛을 경험하는 타원형 교회: 슈타인가덴 수도원의 비스 교회 조각과 도자 무대 장면 같은 로코코의 묘비: 장-밥티스트 피갈의 마레샬 드 삭스 묘비 | 위대한 ‘신앙의 연극’: 벨텐부르크 베네딕트 수도원교회와 로르의 아우구스티누스 참사회교회의 중앙제단 | 경건한 양식의 성상: 프란츠 이그나츠 귄터의 네닝겐 피에타 | 요한 프리드리히 뵈트거: 유럽 도자의 발명자 | 회롤트와 캔들러: 마이센 도자 매뉴팩처의 걸출한 예술가들 | 프란츠 안톤 부스텔리: 님펜부르크의 세계적 명성 회화 장-앙투안 바토: ‘페트 갈랑트’의 창시자 | 프랑수아 부셰: ‘미톨로지 갈랑트’의 대가 |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장르 갈랑트’의 화가 |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유럽에서 가장 존경받은 프레스코 화가 | 카날레토와 베네치아의 베두타 화가들 용어해설/로코코 미술 여행안내/색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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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 책의 편집자입니다.
2009-04-07
화려함과 장식과 가벼움을 맘껏 드러내는 로코코라는 양식을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책이 드문 데도 주목받지 못해 아쉽지만, 개인적으로 만들면서 참 재미있었던 책입니다.
마담 퐁파두르의 의상들을 보세요. 물결치는 리본과 레이스들. 항상 리본을 달고 다녔던 강수지라는 가수가 생각나네요. 주인공들의 의상을 보는 재미도 솔솔하답니다. 또 하나는 서양에서 동양의 도자기에 홀딱 반해서 자기들만의 도자기 기술을 개발하고자 난리부르스를 친 끝에 만든 도자기들, 도자 인형들. 사실 좀 실망스럽지요. 고려 청자나 달을 닮은 백자의 그 오묘한 빛을 반의 반도 못 좇아오잖아요. 그래도 나름 귀엽기는 하지만요. 이런 일화도 나오지요. 축제 행렬을 위해 예수님이 고통받는 나무조각을 만들어서 누구누구에게 전해졌는데, 어느 날 그 조각의 눈에 물방울이 맺혀 있다고 해서 교회가 세워집니다. 예수님의 눈물을 보여주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거죠. 그런데 그 나무조각의 자세가 어색하고 그 사연이 순진해서 기억에 남네요. 더 많은 사람들이 로코코의 매력에 빠져보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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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로코코를 위하여
19세기 사람들은 로코코를 깎아내렸다. ‘과장된’ ‘사치스런’ ‘과도한’ 이러한 형용사를 달고 다니면서 로코코 미술품과 건축은 턱없이 무시받았다. 그래서 많은 미술사가들은 로코코의 누명을 벗기고자 노력했다. 어떤 이는 로코코가 바로크와 신고전주의 시대 사이에서 나타난 바로크의 변종이라고 했고, 다른 이는 바로크의 잔재이거나 마지막 단계라고 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어떻게 이해할까? 로코코』를 통해 로코코의 정체를 밝혀보자. ─ 언제 태어났냐면 우선 로코코는 바로크와는 구분되는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바로크는 16세기 종교개혁으로 유럽 사회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난 후, 신교와 구교를 토대로 다시 형성되기 시작했을 때 전성기를 누렸다. 반종교개혁과 가톨릭 개혁 그리고 이에 결부한 이론과 실천과 결합하여 장중한 바로크 양식이 펼쳐졌다. 그러나 로코코는 18세기 궁정 사회에 나타난 미를 이상적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우아하고 유희적이고 그리고 생동감 있게 나타났다. 프랑스만 놓고 보자면 루이 14세가 사망했을 때, 한 시대가 막을 내렸다. 가망 없는 전쟁들과 엄청난 국가 부채, 높은 세금으로 얼룩졌던 시대가 끝났지만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바닥을 친 경제였다. 그러나 오를레앙의 필립 공작은 사람들을 우울한 분위기에서 구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섯 살인 루이 15세 대신에 섭정을 했던 필립 공작은 독창적이었고, 평화를 사랑하고, 예술에 열광했다. 그가 통치하던 8년이 로코코의 첫 번째 시기였고, 이때 삶에 대한 낙관적인 감정이 태어났다. 그러나 루이 15세가 권력을 쥐자 모든 것은 예전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여전히 예술과 사교를 장려했지만 나라는 거의 돌보지 않았다. 프랑스 판 양귀비라 할, 루이 15세의 애첩 마담 드 퐁파두르와 마담 뒤 바리는 정치판에 입김을 불어댔다. 난감한 정치 문제들이 산더미 같았지만 로코코는 루이 15세와 퐁파두르 후작부인의 비호 아래 전성기를 누렸다. ─ 어디서 살았냐면 물론 근거지는 프랑스였지만 그 궁정 밖에서 로코코는 오히려 다양한 개성을 보여주었다. 그 중에서도 프랑스 문화를 열렬히 추종하던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2세의 궁정에서 특히 두드러졌으며, 그 외에 작센, 프랑켄, 바이에른에서도 나타났다. 회화에서는 베네치아 또한 그 중심지였다. 황제의 거점이었던 빈은 전통에 대한 고집으로 바로크 양식을 고수했지만, 시대의 흐름은 막을 수 없었다. ─ 어떻게 생겼냐면 쉽고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바로크는 ‘큰 것’ 로코코는 ‘작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인을 ‘예쁘다’고만 얘기하는 것은 미스코리아 심사위원의 도리가 아니고, ‘더 작다’라고만 얘기하는 것도 미술 책이 할 바가 아니니 이 책에서는 건축, 조각과 도자, 회화로 나누어 조모조목 따지고 든다. 건축 바로크가 좋아했던 도드라진 돌림띠와 육중한 원주보다는, 친근하고 윤곽이 두드러지지 않는 면과 타원형을 즐겨 사용하였다. 대규모 저택보다는 여름별장과 도시 궁전이 더 인기 있었다. 내부는 조개 모양의 로카이유, 화환, 아라베스크, 나선무늬가 구불구불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장식들로 뒤덮였지만, 이 어지러운 장식은 전체적으로 통일감을 주었다. 자연 속의 삶을 동경했던 로코코 시대 사람들은 그런 이상을 건축에서도 실현하고자 했으며, 그것들은 나무 무늬나 자연 풍경을 담고 있는 회화를 걸어두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로코코의 건축은 빛을 잘 활용하여 그 특유의 가벼움과 밝음을 맘껏 드러냈다. 조각과 도자 전체적인 앙상블을 중요시했다. 모든 것이 상호 관계에서 제 매력을 발휘한다. 내부 장식 못지않게 정원과 공원, 교회 내부는 많은 조각과 인물군상들로 꾸며졌다. 이들은 마치 연극 무대에서 빼내온 것처럼 극적인 제스처와 구성을 보여준다. 동양에서 들여온 도자기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자체 제작하고자 하는 의지가 불타올랐다. 드디어 한 도자공예가에 의해 제작의 비밀이 밝혀지고, 이어 안료와 그 사용법이 개발되어 화려한 도자들이 생산된다. 회화 로코코 하면 왠지 핑크빛이 살짝 도는 퐁파두르 부인의 볼이 생각이 난다. 역시나 퐁파두르 후작부인의 섬세하고 화려한 의상과 미모 같은 분위기의 그림들이 로코코 회화의 주조를 이룬다. 사랑의 유희, 목동 그림, 전원극과 궁정 축제가 주요 주제였다. 어떤 면에서는 이런 주제의 장식성이 지나쳐 공허하고 인위적이기도 했다. 파리와 더불어 베네치아도 로코코 회화의 중심지였다. 베네치아에서는 도시 풍경을 이상적으로 그리는 ‘베두타’라는 장르가 유행하였으며, 베두타 화가들이 여행을 많이 한 덕에 이 그림들은 유럽으로 퍼져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