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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_ 우리 안의 낯선 땅을 찾아서
1장. 이곳에 역사가 있었지 일본과 미국, 우리 안의 낯선 땅 - 용산 미군기지 궁궐에 스며든 전쟁 - 경희궁 방공호 왜성대로 돌아온 그들 - 남산과 해방촌 대한제국 공업전습소로 잘못 알려졌던 건물 -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 2장. 개항의 시작 근대화의 관문 - 인천 개항누리길 1 진센과 런촨 - 인천 개항누리길 2 한반도 최대의 일제 군수공장 - 부평 조병창 3장. 남쪽 바다는 더없이 푸르러 대한해협을 겨눈 비수 - 가덕도 외양포 포대 가덕도에 남은 일본의 흔적들 - 가덕도 등대와 해안 동굴진지 아름다운 동백꽃에 깃든 전쟁의 그림자 - 지심도 포대 4장. 들판 곳곳에 남아 있는 기억들 언덕 위의 일본 - 목포 일본 영사관 농민들의 피땀 위에 세우다 - 동척 목포 지점 칼이 된 섬과 교회가 된 막사 - 목포 고하도 해안 동굴진지와 막사 그들만의 제국 - 군산 시마타니 금고와 이영춘 가옥 바다를 박차고 날아오르다 - 여수 수상비행장과 방공호 5장. 언제랑 돌아가실 거꽝 송악산 너머로 사라진 전쟁의 기억들 - 알뜨르 비행장과 지하 벙커 길옆의 기억들 - 모슬봉과 이교동 방공호 그곳에 일본군 위안부가 있었다 - 성산일출봉 해안 동굴진지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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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중심지이자 최대 인구밀집지역인 경성에도 곳곳에 방공호가 건설됐다. 그중 일부는 삼청동과 장충동 지역에 남아 있다. 일본은 미군의 공습이 본격화되자 폭격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종묘 앞에서 필동까지 주거지를 강제로 철거하고 공터를 만들기도 했다. 경희궁 역시 이런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944년, 숭정전 동쪽에 있는 내전인 회상전 자리에 대규모 방공호가 건설된 것이다. 시민들이 공습을 피해 대피하는 용도를 넘어선 대규모의 방공호였다. 건설 작업에는 당시 경성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학생들이 동원되었다.
만들어진 목적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권기봉 씨는 근처에 있던 조선총독부 직원들의 대피용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또 경성전신전화국이 비상시에 이용할 시설이라는 얘기도 있고, 대규모 통신 설비를 갖춘 사령부용 건물이라는 말도 있다. 70여 년이 흐른 현재는 서울 역사박물관에서 주차장으로 이용 중이다. 경희궁 흥화문으로 들어가 숭정문 오른편의 언덕을 넘어가거나 서울 역사박물관 뒤쪽의 2차선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방공호를 만날 수 있다. ---「1장_ 이곳에 역사가 있었지」중에서 이렇게 은행으로 사용되었던 건물만 셋을 돌아보고 나니 각 은행이 왜 인천에 지점을 냈는지, 그 지점들이 어떤 운명에 처했는지 살펴보는 것이 근대사를 돋보기로 들여다보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선진 금융기법을 전수해준다는 명분으로 조선에 손길을 내밀었다. 하지만 일본의 은행들은 조선 정부와 백성의 고혈을 짜내 자신들의 배를 불렸다. 뒤늦게 근대화를 이룩한 일본이 단시간 내에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을 상대로 자신들이 도입한 제도를 실험하고 손해를 보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메이지 유신 직후의 무역이 중국에서 서구의 면직물을 싸게 사들여 조선에 비싸게 파는 중개무역이었다는 점이 대표적인 증거다. 인천의 개항누리 길에 남은 일본의 근대 건축물들은 화폐와 금융이라는 보이지 않는 무기를 앞세운 또 다른 침략자들이었다. ---「2장_ 개항의 시작」중에서 아름답다는 감상은 길이 끝도 없이 이어지면서 다른 생각으로 이어졌다. 이 길은 포대 사령관이 말을 타고 다니는 데만 이용된 것은 아닐 것이다. 무거운 포탄을 들고 땀을 뻘뻘 흘리는 병사들도 이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길은 정든 고향에서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들이 굶주림과 학대에 시달리면서 만들었을 것이다. 그들의 모습을 떠올리자 이 길이 말길이나 보급로가 아니라 징용의 길로 여겨졌다. 징용의 길은 외양포로 가는 동안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줬다. 돌을 좌우로 촘촘하게 붙인 배수로가 낙엽 속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적당히 달궈진 햇볕이 내리쬐는 징용의 길은 걸음을 재촉하게 만들었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내려오다 보니 어느덧 탁 트인 공간이 나왔다. 마을과 가까운 곳까지 내려온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여행의 종착점을 먼발치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바다와 접한 마을 뒤편의 산기슭에 자리 잡은 외양포 포대는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3장_ 남쪽 바다는 더없이 푸르러」중에서 게이오 대학 출신의 젊고 영민한 두뇌를 자랑하는 그는 곧 엄청난 토지를 사들였다. 최신 농법을 도입하고 그에 비례해서 소작농들을 혹독하게 다루면서 막대한 수확량을 얻은 것이었다. 1930년대 들어서는 대규모의 농장을 일구었다. 30년 만에 자신의 제국을 세운 것이었다. 물론 그가 농장을 확장시키고 성장시켰던 밑바탕에는 조선총독부라는 배후의 권력, 그리고 소작인들의 피와 땀이 있었다. 구마모토 농장의 소작농들은 정해진 소작료 외에도 농작물 재배에 필요한 비료를 비롯한 각종 부대비용을 대느라 허덕였다. 일본인의 토지 독점 현상은 넓은 평야와 수출을 할 수 있는 항구가 있는 전라도 지방에서 특히 많이 발생했다. 1935년 3월 5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300만 평 이상의 토지를 보유한 소유자 47명 중 조선인은 10명뿐이라고 밝혔다. 37명의 일본인 토지 소유주 중에서도 구마모토는 단연 눈에 띄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에 걸맞은 별장을 세우며 자신의 재력을 자랑했다. ---「4장, 들판 곳곳에 남아 있는 기억들」중에서 격납고 내부를 살펴보니 널빤지를 댄 흔적들 사이로 무언가를 뽑아낸 홈들이 보였다. 처음에는 공정상의 실수인가 싶었는데, 홈 중간 중간에 남은 녹슨 철근이 보였다. 격납고를 만들 때 넣었던 철근을 광복 후 고철 수집업자들이 떼어간 것이다. 당시에는 고철이 굉장한 귀중품이었기에 버려진 일본군 무기나 건물에서 철을 떼어 가는 경우는 흔했다. 알뜨르 비행장의 격납고에 있던 철근도 그들의 손길을 피해갈 수 없었다. 천장에는 그들이 미처 가져가지 못한 철근들이 뱀처럼 휘어진 채 매달려 있었다. 이곳 알뜨르 비행장의 격납고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땅속에 묻혀 있다는 점이었다. 제로센이 전시되어 있는 격납고를 제외하고는 땅을 파고든 것처럼 보여서 의아했다. 해답은 주변에 있었다. 광복 후 이곳을 농경지로 만들기 위해 주민들이 땅 위에 흙을 덮은 것이었다. 그래서 알뜨르의 벌판에는 각종 채소들이 잘 자라는 중이었다. 지력을 높이기 위해 그들은 격납고가 낮아져 보일 정도로 흙을 가져다 부었다. 지금이야 트럭을 비롯한 중장비들이 많지만 예전에는 그런 것들이 있을 턱이 없었다. 빼앗긴 땅에 돌아와 농작물을 재배하기 위해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했다. ---「5장_ 언제랑 돌아가실 거꽝」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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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과 수탈의 현장, 노동착취의 상징, 실향민의 보금자리…
전국에 흩어진 일제의 흔적이 들려주는 다채로운 이야기 이 책에는 서울에서 제주까지 전국에 흩어진 일제의 흔적들이 다채로운 사진과 함께 소개되어 있다. 각각의 흔적은 다양한 내력을 지니고 있다. 저자들은 각 장소와 지역의 이 같은 내력과 그 이면에 자리 잡은 이야기들을 흥미롭게 풀어낸다. ‘일제 강점기’라는 말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일본의 군사시설이나 강제징용, 수탈, 위안부 등의 아픈 역사일 것이다. 목포의 일본 영사관 뒤편에 지어진 일본군 방공호에는 공사에 강제로 동원된 조선인들과 그들을 감시하는 일본인 관리의 동상이 있어 당시의 참상을 보여준다.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은 어둠과 습기 때문에 잠시만 들어가 있어도 몸이 노곤해지는 땅속에서 가혹한 폭력과 굶주림을 견디며 곡괭이와 삽으로 80미터가 넘는 터널을 파야 했다. 군산 시내에 있는 일본인 지주의 금고 건물은 당시 조선인 소작농들에 대한 착취가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상징한다. 그 일본인 지주는 여의도의 두 배에 달하는 땅을 손에 넣은 것도 모자라 조선의 각종 문화재를 강탈하여 자신의 정원을 꾸몄던 시마타니 야소야였다. 그는 자신의 금고 건물을 은행 금고에 버금갈 만큼 단단한 철문과 두꺼운 벽으로 보강하고 그 안을 현금과 문화재로 가득 채우곤 했다. 소작료와 농작물 재배에 필요한 돈을 대느라 허덕이는 소작농들을 쥐어짠 결과였다. 한편 어떤 곳들은 해방 이후에 갈 곳을 잃은 사람들의 보금자리가 되기도 했다. 일본인들이 떠난 서울 해방촌의 가옥들에는 광복과 함께 월남한 실향민들과 일본이나 중국에서 살다 온 귀국자들이 모여 살았다. 또 부산 가덕도의 한 일본군 탄약고는 한국전쟁 당시 남쪽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역사, 문화, 건축, 군사, 생활상을 관통하는 입체적인 시대조명 저자들은 각 현장의 시설과 건물들을 꼼꼼히 둘러보며 이를 통해 일제가 달성하고자 하는 야욕이 무엇이었고, 그들은 조선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자 했는지 헤아려본다. 조선인들이 주로 오가는 종로 한복판에 일본총독부 건물을 지은 것은 누가 지배자이고 피지배자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총독부가 다른 곳으로 이전한 뒤 그 건물은 일본이 조선에게 은혜를 베풀고 있다고 선전하기 위한 장소로 바뀌었다. 또 책에 소개된 곳들 외에도 전국을 돌며 수많은 일제의 유산을 답사해온 저자들은 직접 현장을 가보고자 하는 독자들을 위해 각각의 현장으로 찾아가는 길을 상세히 안내하고 있다. 일제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암울하고 참혹한 이미지들을 떠올린다. 물론 그 시기는 두 번 다시 겪어서는 안 될 불행한 과거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 과거의 흔적들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왔을 뿐,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 흔적들은 우리에게 잊지 않아야 할 기억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책은 일제 강점기의 시대상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면서 그 시대의 기억들을 흥미롭게 환기시켜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