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검색을 사용해 보세요
검색창 이전화면 이전화면
최근 검색어
인기 검색어

소득공제
제국의 그림자 덕혜옹주
책우리 2016.07.15.
베스트
청소년 top20 1주
가격
12,000원
10 10,800
YES포인트?
600원 (5%)
5만원 이상 구매 시 2천원 추가 적립
결제혜택
카드/간편결제 혜택을 확인하세요

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해외배송 가능?
  •  문화비소득공제 가능

책소개

목차

서문

1. 덕혜옹주
덕혜옹주를 아십니까?
사라진 나라의 왕족으로 태어나다
이름을 얻다
일본으로
소 다케유키와의 혼인
세상 밖으로
귀환
수강재에서 지다

2. 이건
이건, 모모야마 켄이치
아버지와 아들
알려지지 않은 어머니
새로운 조국

3. 이우
원폭의 구름 속에서 사라진 조선의 꿈
의친왕 이강의 둘째 아들
반항아
안타까운 최후
조국으로

4. 민갑완
비운의 여인
운명의 소용돌이
망명을 떠나다
조국으로 돌아오다
백 년의 한, 천 년의 슬픔

5. 에필로그

- 참고문헌

저자 소개 2

2006년 역사 추리 소설 『적패』로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2020년 『무덤 속의 죽음』으로 한국추리문학대상을 수상했다. 픽션과 논픽션, 일반 소설부터 동화, 청소년 소설까지 다양한 분야의 글을 쓰는 전업 작가. 『암행』 『빙하 조선』 『기억 서점』 『조선 범죄 실록』 『미스 손탁』 『어린 만세꾼』 『유품정리사-연꽃 죽음의 비밀』 『온달장군 살인사건』 『무덤 속의 죽음』 등이 대표작. 그 밖에 웹 소설 『태왕 남생』을 집필했고, 웹툰 『서울시 퇴마과』와 다양한 앤솔러지를 기획하고 참여했다.

정명섭의 다른 상품

2009년 『연인, THE LOVERS』(공저)로 작가 활동을 시작했고, 『네잎 클로버』로 한국콘텐츠진흥원 원작소설 창작과정에 선정되었다. 2019년 말에 발표한 『모던걸의 명랑 만세』로 수많은 청소년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며 열띤 성원을 이끌어냈다. 그 외에 함께 쓴 작품으로 『걸파이브』 『일본 기담』 『마의』 『제국의 그림자 덕혜옹주』 『혁명의 여신들』 등이 있다. 『잭 the 뱀파이어』는 포털사이트 다음에 연재하여 독자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작품으로 미스트 아일랜드 시리즈에서 새로운 옷을 입고 독자들과 만나게 되었다. 『네잎클로버』는 한국콘텐츠진흥원 원작소설 창작과정에 선정
2009년 『연인, THE LOVERS』(공저)로 작가 활동을 시작했고, 『네잎 클로버』로 한국콘텐츠진흥원 원작소설 창작과정에 선정되었다. 2019년 말에 발표한 『모던걸의 명랑 만세』로 수많은 청소년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며 열띤 성원을 이끌어냈다. 그 외에 함께 쓴 작품으로 『걸파이브』 『일본 기담』 『마의』 『제국의 그림자 덕혜옹주』 『혁명의 여신들』 등이 있다. 『잭 the 뱀파이어』는 포털사이트 다음에 연재하여 독자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작품으로 미스트 아일랜드 시리즈에서 새로운 옷을 입고 독자들과 만나게 되었다. 『네잎클로버』는 한국콘텐츠진흥원 원작소설 창작과정에 선정되었다.

박지선의 다른 상품

관련 분류

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07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205쪽 | 326g | 140*220*12mm
ISBN13
9788993975161

책 속으로

헤이그 밀사 사건 이후 퇴위하고 덕수궁에 유폐된 고종은 엄청난 상실감과 고독을 느꼈습니다. 더군다나 중전 민씨의 죽음 이후 그를 돌봐줬던 엄비 역시 1911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홀로 남겨졌지요. 이런 상황에서 태어난 덕혜옹주는 아버지인 고종의 사랑을 듬뿍 받게 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버지들은 ‘딸바보’라고 합니다. 특히, 덕혜옹주는 고종이 환갑의 나이에 얻은 늦둥이 딸이었기에 더욱 귀여웠겠지요. 고종은 덕혜옹주를 보면서 실패와 좌절로 점철된 자신의 삶을 차분하게 돌아봤을지도 모릅니다. 아마 어린 딸에게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찾았을지도 모르고요. 고종이 덕혜옹주를 얼마나 귀여워했는지를 알려주는 재미난 일화가 있습니다. --- p.88~89

‘나는 조선인일까? 일본인일까?’
이완용 같은 매국노는 쉽게 답을 얻었습니다. 이회영 같은 독립운동가들도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일본인 스승에게서 일본어를 배우고, 10대 초반에 일본으로 건너간 뒤 주변에 조언을 해줄 만한 사람들이 없던 덕혜옹주는 대답하기 힘들었습니다. 오빠인 영친왕도, 올케언니이자 또 한 명의 정략결혼의 희생자인 이방자도 자신들을 돌보는 것조차 힘겨워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덕혜옹주가 일반인이었다면 주변 사람들과 자유롭게 얘기하면서 가치관을 정립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녀는 ‘조선의 왕녀’였고, 그래서 일본의 감시를 받았습니다. 당연히 그녀의 주변에는 허심탄회하게 얘기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 p.52~53

퇴원한 덕혜옹주는 창덕궁의 낙선재 옆 수강재를 거처로 정합니다. 그녀보다 앞서서 이곳에서 지내던 조선의 마지막 왕비 순정효황후 윤씨가 그로부터 한 해 전인 1966년에 세상을 떠났지요. 낙선재에서 덕혜옹주의 삶은 지극히 조용하고 소박했습니다. 지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덕혜옹주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기록들은 사라진 왕가의 쓸쓸한 비애를 맛보게 합니다. 수강재에서의 덕혜옹주의 삶은 아무런 의미 없이 흘러갔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통원치료를 받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가끔 유모였던 변복동 할머니의 손을 잡고 뜰을 거닐곤 했지요. 그러다가 간혹 늙은 상궁들과 화투를 치는 것으로 소일했고요. --- p.89

이건은 단팥죽은 물론 산양젖과 과자도 파는 등 장사에 힘을 쏟습니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장사는 처참하게 실패했습니다. 처음에 호기심으로 찾았던 손님들이 발길을 끊었으니까요. 세상이 바뀌었어도 귀족이 장사까지 하는 것에 대한 반감도 적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야심차게 시작한 장사가 실패한 뒤, 그 이후 벌인 사업들도 모두 성공하지 못하자 이건은 크게 낙담합니다. 세상이 녹록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그에게 찾아온 것은 절망감뿐이었습니다. --- p.116~117

이우는 일본의 이런 흉계를 간파하고 어떻게든 조선 여인과 혼인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아버지인 의친왕 이강도 이우가 일본인과 혼인하는 것을 반기지 않았습니다. 아들 이우의 뜻을 알게 된 의친왕 이강은 측근인 박영효와 이 문제를 상의합니다. 이 당시 박영효는 중추원 의장이자 후작 작위를 가진 거물이었습니다. 의친왕 이강으로부터 아들 이우의 혼사 문제에 대한 얘기를 들은 박영효는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영친왕 이은과 약혼을 했다가 파혼당한 민갑완의 집안이 어떻게 되었는지 똑똑히 봤으니까요. 하지만 박영효의 입장에서도 왕실과 혼인을 맺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에 혼사를 밀어붙이기로 합니다. --- p.137~138

원자폭탄에 희생된 이우의 시신은 사망한 다음 날인 8월 8일 비행기에 실려 조선으로 돌아옵니다. 군의관에 의해 방부 처리된 상태로 관에 들어갔는데, 이 과정이 마무리되는 것을 지켜본 부관 요시나리 히로시 중좌는 상관을 모시지 못한 책임을 지고 병원 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비행기에 실려서 조선으로 돌아온 이우의 시신은 운현궁에 모셔집니다. 대좌로 추서된 이우의 장례식은 아이러니하게도 8월 15일에 열립니다. 조선주둔군 사령부에서 주관하는 육군장(陸軍葬)은 지금은 없어진 동대문운동장의 전신인 경성운동장에서 개최됩니다. --- p.154~155

조선의 왕실 사람들이 일본의 귀족으로 살아가는 동안, 민갑완은 자신이 굳이 지킬 필요가 없는 ‘절개’를 끝까지 지키면서 살아갑니다. 오늘날 우리가 조선 왕실 대신 민갑완, 그리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잃어야만 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굴복과 복종 그리고 배신에는 이유와 목적이 존재합니다. 친일매국노의 대표격인 이완용, 조선 최고의 문인이었음에도 변절한 이광수도 자신들의 행동을 변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변명이 변명으로 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민갑완 같은 존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 p.192

출판사 리뷰

덕혜옹주, 사라진 나라의 늦둥이 왕녀로 태어나…

중전, 즉 왕비가 낳은 공주와 달리 옹주는 후궁의 딸이다. 물론 아버지가 왕이니 그 또한 왕녀다. 왕녀와의 결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마(왕의 사위) 개인과 그 가문의 영광이며, 부귀영화를 누리거나 심지어 영달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평강공주를 만난 ‘바보온달’처럼 말이다. 그러나 조선의 마지막 왕녀 덕혜옹주와 ‘쓰시마 섬 도주(島主)’였던 소 다케유키 백작의 결혼은 두 사람 모두에게 비극이 되었다. 특히 20세기의 여성이던 덕혜옹주에게는 그녀의 평생을 결박한 정신질환의 원인이기까지 했다.

덕혜옹주는 조선이 사라진 뒤 일본 왕실에 편입된 조선 왕실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만약 그녀가 단지 ‘폐왕(廢王) 고종의 늦둥이’로 인식되었을 뿐 왕녀로 인정받지 못했다면 그녀의 삶은 어떠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고종이 꾀를 내어 조선총독 데라우치로 하여금 그녀를 자신의 딸로 호적에 올리게 한 것이 비극의 원인이 되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갔다. 영친왕 이은을 비롯한 조선 왕실의 다른 자식들처럼, 그녀도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덕혜옹주는 아는 사람이라곤 오라버니인 영친왕 이은과 그의 아내 이방자(결혼 전 이름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밖에 없던 일본에서 외롭게 지내야만 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왕족이라 세상물정 모르고 일본인들의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던 오라버니 부부도 그녀를 챙겨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절망적이고 엄혹한 분위기에 시달리던 덕혜옹주는 결국 정신질환을 앓게 되었다. 일본의 귀족이라지만, 실상은 사회적·경제적으로 별 볼 일 없던 소 다케유키와 결혼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돈과 명예만 보고 결혼한 남자와의 삶은 그녀의 병을 더욱 심화시켰다.

덕혜옹주의 비극은 지난 시대 우리 민족이 겪었던 아픔을 상징한다. 그녀의 비극은 단순히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한민족이 겪었던 불행한 시기의 결정판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던, 어떠한 권력도 없는 왕실의 일원인 덕혜옹주가 겪은 비극’에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는 이유도 그녀의 고통이, 그녀의 삶이 우리 자신들이 일제 강점기 때 당한 고통과, 해방 뒤에도 이어진 기막힌 삶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1912년 5월 25일, 덕혜옹주 태어나다

1921년, 경성(서울)의 ‘히노데 소학교’에 입학하다.

1925년, 유학을 명목으로 일본으로 떠나다.

1926년, 큰오빠인 순종(융희) 황제의 임종에 맞춰 급히 귀국하다.

1927년 1월 26일, 경성방송국에서 덕혜옹주가 지은 동요 춘명호를 방송하다.

1929년, 오랫동안 보지 못한 생모 복녕당 양씨의 죽음음 맞이하다.

1931년 5월 8일, 쓰시마 섬 번주이자 백작인 소 다케유키와 결혼하다.

1932년 8월 14일, 딸 정혜를 낳다.

1946년 가을쯤, 정신병원에 입원하다.

1950년 1월, 조선일보 기자 김을한을 만나다.
그로써 해방된 조국에 그녀의 상황이 알려지다.

1955년 가을쯤, 딸 정혜가 와세다 대학에서 만난 스즈키 노보루와 결혼하다.
비슷한 시기에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가 이혼하다.

1956년 8월, 정혜가 ‘자살하고 싶다’는 유서를 남기고 실종되다.

1962년 1월 26일, 귀국 후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다.

1989년 4월 21일, 창덕궁의 수강재에서 거주하다가 사망하다. 향년 77세.

이건, ‘인쇄기술자 모모야마 켄이치’

1909년 의친왕 이강의 장남으로 태어난 이건은, ‘왕자’임에도 어머니가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강이 한량 생활 때 교제한 일본 여인의 소생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래서인지 이건은 3.1 만세 운동에 관여하고 상하이 임시정부로 탈출하려 한 아버지에게서 미움을 받았다. 이는 오히려 이건이 자신을 ‘돌보던’ 일본인들과 친해져, 종국에는 일본으로 귀화한 원인이 되었다. 일본 측에서 맺어준 첫 아내와 이혼한 이건은 모모야마 켄이치로 개명한 뒤 인쇄 기술을 배웠다. 하지만 창업할 때마다 실패하고, 아버지가 한국 땅에 남긴 재산 문제로 소송을 하게 되는 등 행복한 삶을 살지는 못했다.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의 외아들이자 이건의 사촌동생인 이구가 아버지와 고모(덕혜옹주)의 병원비를 횡령하고, 아리타 기누코라는 무속인과 함께 사기극을 벌인 것과 더불어 조선 왕실에 대한 대중의 실망감을 높이기까지 했다.

이우, ‘어린이’가 앗아간 조선 왕실의 마지막 희망

의친왕 이강의 차남인 이우는, 숙부인 영친왕 이은과 배다른 형인 이건 등 다른 왕족들이 일본에 순응하거나 지배 계급에 편입되어 호의호식하던 반면, 죽을 때까지 일본과 대립각을 세웠다. 심지어 일본 측에서 일본 여성과 혼인시키려 하자 이를 거부하고 박영효의 손녀딸 박찬주와 결혼했다. 그는 일본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들어간 육군사관학교와 군대에서도 왕자다운 면모를 보임으로써 일본인 부하들의 충성심도 샀다. 그야말로 군계일학(群鷄一鶴)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이우는 해방 직후 조선 땅에 잔류하던 일본 관헌들과 협상을 벌일 수도 있었을 인물이라는 평도 받고 있다. 하지만 일본군은 그를 미군의 ‘본토 상륙’에 대비해 히로시마에 부임시켰다.

결국 광복이 되기 불과 9일 전에 이루어진 히로시마에 대한 원자폭탄(암호명 ‘어린이[Little Boy]’)의 투하로 목숨을 잃었다. 아이러니한 일은 그의 시신이 조국으로 운구된 뒤 거행된 장례식이 8월 15일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지금은 없어진 동대문운동장의 전신인 경성운동장에서 장례식이 한창일 때, 밖에서 “만세!” 함성이 들려오자 유족들은 더욱 슬펐다고 한다.

민갑완, 조선 왕실이 겉치레가 아니었음을 보여준 ‘왕자의 여인’

조선 왕실이 겉치레에 불과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 인물은 엉뚱하게도 조선 왕실의 며느리가 될 뻔했던 민갑완이었다. 영친왕 이은과 같은 해 같은 날(1897년 10월 20일)에 태어난 그녀는, 영친왕의 어머니인 엄 귀비에 의해 영친왕의 아내가 될 여인이었다. 영친왕의 일본 유학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엄 귀비보다 한 수 위였던 당시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영친왕을 막무가내로 일본으로 끌고 간 뒤 일본 여인과 결혼시켰다. 그리고 민갑완의 집에는 파혼을 강요했다.

민갑완은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대신 남동생과 함께 상하이로 탈출하여 임시정부에 의탁했다. 조선이 해방될 때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그러나 조국이 해방되었을 때, 그녀는 이미 노년을 맞이하는 노처녀였다. 그동안 청혼을 해온 남자들이 없지는 않았으나 민갑완은 꿋꿋이 거절했다. 그 이유를 1958년 6월 29일 자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한국 여성의 지조가 얼마나 강한지를 일본인들에게 보여줌으로서 우리의 비운을 복수하려고 한 겁니다.” 조선 왕실의 구성원들이 일본 측에서 제공한 부귀영화에 취해있을 때, 오히려 조선 왕실의 며느리가 될 뻔한 여인이 조선 왕실의 명예와 기개를 지켜낸 것이다.
리뷰 총점 8.0

첫번째 한줄평을 남겨주세요.

사락 별점0

혜택 및 유의사항

첫번째 별점을 남겨주세요.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는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크고 무거웠던 것이지요.
r*********2 2026.04.24. 신고 공감1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