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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강촌 1999년 세기말 엽기토끼와 노랑머리 가위바위보 훔쳐보기 두 여관 1 두 여관 2 울음소리 깊은 신음 504호 참고인 진술 서울행 1999년 11월 23일 현기의 경우 승일의 경우 내 경우 슬퍼하지 마세요, 지금 너무 행복하니까 이 전화번호는 고객의 요청에 의해 같지만 다른 일식집 세 가족 시인이 말하는 한차현_대책 없이 정 깊은 사람 소설가가 말하는 한차현_꿀 같은 꿈 같은 껌 같은 한차현 문학편집자가 말하는 한차현_엽기적인 소설은 어떻게 탄생하나? 독자가 말하는 한차현_별에서 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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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컥. 문은 여전히 잠겨 있다. 일말의 기대가 산산이 무너져 내린다. 막막한 허탈감이 고단하게 몰려들었다. 제기랄, 아직도 진도가 안 나갔는가. 과연 그런 것인가. 꽉 막힌 상황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뭘 어째야 좋을지 도통 생각이 나지 않는다. 초인종을 누를 수도 없고 현관문을 두드려 부술 수도 없다. 핸드폰으로 자초지종을 묻기도 그렇다. 도대체 지금, 뭐가 어떻게 되는 상황이냐고. 젊은 연놈이 밤늦은 여관방에 사이좋게 들어가서는, 나란히 베개 깔고 엎드려 해법수학이라도 풀고 있는 중이냐고. 현관문에 얼굴을 갖다 대었다. 우웅 웅웅. 냉장고 컴프레서 돌아가는 소리. 들판을 지나는 바람이 여린 나뭇가지를 흔드는 소리. 그 속에서 나는 들었다. 분명히 들었다. 흐느낌을. 들이마시듯 나직하게 흐느끼는 여자의 울먹임을. 엽기토끼다. 분명하다. 지금 엽기토끼가 숨죽여 흐느끼고 있다. 질끈 눈 감고, 아랫입술 꼭 깨물고, 다른 이의 맨살에 얼굴 묻고, 속으로 흐느끼는 중이다 아니, 그렇다면? 씨팔 새끼가. 이런 씨팔 새끼가.
--- pp.55~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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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북스 펄프픽션 시리즈 여섯 번째 권인 『숨은 새끼 잠든 새끼 헤맨 새끼』가 출간되었다. 외국 소설의 판매가 호황을 이루는 반면 국내 소설의 침체가 장기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문학의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펄프픽션은 이러한 위기에 맞서 국내 소설의 방향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해 보고자 기획된 시리즈이다.
펄프픽션이란 1920~55년 경 미국에서 값싼 펄프지에 인쇄되어 간행되었던 대중 소설로 대개는 한 편의 단편 소설과 2~3개의 더 짧은 작품들이 잡지 형식으로 묶여 나왔다. 여기에서 우리가 차용하고자 하는 것은 ‘싸구려 통속’이 아니라 ‘대중성을 겸비한 즐거운 문학’이다. 즉, 연애소설에서부터 SF, 환상, 추리소설까지 대중에게 좀 더 흥미로운 주제를 다양하게 다뤄보고자 함이다. 펄프 픽션 시리즈는, 작가에게는 독자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될 것이며 독자들에게는 우리 소설에 관심과 애정을 갖는 중요한 계기가 되리라고 여겨진다. 또한, 우리 소설의 가능성을 작가와 독자의 입장에서 점쳐볼 수 있는 대규모 퍼포먼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펄프픽션 시리즈가 우리 소설의 건강한 방향성을 모색해 나가는 실험과 발전의 장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유원지에서 만난 세 남자와 두 여자,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선 세기말의 밤! 절친한 세 친구, 현기와 승일 그리고 나는 승일의 입대를 앞두고 강촌으로 향한다. 때는 1999년. 그곳에서 두 여자 - '노랑머리'와 '엽기토끼'를 만나게 되고, 승일은 노랑머리와, 현기는 엽기토끼와 파트너가 되어 각각 여관으로 향한다. 나의 역할은 술래다. 두 친구의 섹스 장면을 훔쳐보기로 한 것. 하지만 문을 열어 놓기로 한 애초의 약속과 달리 두 방의 문은 꽁꽁 닫혀있다. 춘천여관 202호와 강변모텔 307호. 그 두 방의 문이 왜 잠겨 있었는지, 그 방 안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는 다음 날 아침 밝혀진다. 노랑머리와 엽기토끼는 인터넷 자살 사이트에서 만나 함께 죽을 장소를 선택해 강촌을 찾아온 것이었고 결국 노랑머리는 승일에게 수면제가 섞인 맥주를 마시게 해 잠에 들게 한 뒤 죽음을 택한다. 엽기토끼는 현기의 설득으로 죽음을 모면한다. 시간이 흘러, 승일은 입대를 하고 현기는 캐나다로 떠난다. 나 역시 공군에 지원한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한 출판사 대표는 “난데없는 상황과의 조우나 예상치 못했던 엽기적 사건들의 빈발은 바로 한차현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자 그만의 장기”라고 말한다. 세기말의 유원지에서 만난 두 명의 여자가 인터넷을 통해 만나 자살 여행을 떠난 사람들이라는 설정 역시 기존 소설들의 특징과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 그럼에도 엽기적인 줄거리의 끝에는 더욱 엽기적인 결말이 따른다. 세 친구가 뿔뿔이 흩어지고 다시 여러 날이 지난다. 2006년 초여름, 나와 승일, 현기 셋이 다시 모이는 자리가 만들어진다. 세 친구가 7년 만에 다시 만나는 자리에 현기는 아내와 여자아이를 데리고 나타난다. 어색한 듯 다소곳이 고개 숙인 여인, 현기의 와이프는 그날의 엽기토끼였다. 한 생명이 고통스럽게 생의 짐을 내려놓던 새벽 시간, 그로부터 멀지 않은 시간과 장소에서 젊은 어미의 젊은 자궁 안에 뜻밖의 새 생명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엽기적인 결말의 주인공, 승일의 아내는 닉네임조차 엽기토끼다. 하지만 엽기적인 사건들이 이어진다고 해서 소설의 메시지마저 엽기적인 것은 아니다. 저자는 처음 소설을 구상할 때 머릿속 가득 아쿠다가와 류우노스케의 소설 『라쇼몬』을 떠올리고 있었다고 말한다. 하나의 죽음을 둘러싼 사건이 말 많은 화자들에 의해 내내 지워지며 또한 새롭게 쓰이는 이야기. 절친한 친구 셋이 내뱉는 서로 다른 세 가지 이야기가 바로 『숨은 새끼 잠든 새끼 헤맨 새끼』다. 큰 줄거리는 다를 것이 없으나, 각자의 입장에서 본 세 갈래 이야기는 상당히 이질적이다. 길지 않은 시간동안 한 사람은 길거리를 헤매야 했고 한 사람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으며 한 사람은 또 다른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한다. 이 사건이 세 사람의 인생에 던진 파장 역시 그러하다. 둘에게 그날의 사건은 그저 과거의 유쾌하지 못한, 아득한 기억일 뿐이지만 다른 한 명에게 그 사건은 미래로 연결되는 실마리가 된다. 실제로 이렇듯 우연한 계기로 인해 결정되고 번복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일 것이며, 오늘도 숨고 잠들고 헤매는 수많은 독자들 역시 우연의 굴레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