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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의 기적]
“항공사에서 제공하는 비상상황 대처법에 대한 매뉴얼을 읽은 적이 있다. 매뉴얼의 모든 내용은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다른 승객들을 돕기 전에 먼저 자신의 마스크를 잘 착용하세요. 누군가를 돕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을 먼저 챙겨야 했다. 매뉴얼 속 두 줄의 문장이 내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렸던 것이다.” --- p.32 “사람들이 가장 사랑했던 걸 그리워할 것 같습니까? 아니에요. 가장 끔찍하고 힘들었던 순간, 자꾸만 마음에 걸리는 것들, 그런 걸 그리워하게 됩니다. 당신에게는 계단이 그런 존재였나보죠.” --- p.37 [이사] “시간은 세상 모든 것들을 헌것으로 만든다. 물건도 집도, 결국 사람도, 시간 속에서 소멸해간다. 시간 안에서 사라지지 않을, 생생히 건져올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마지막 날에 나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 p.41쪽 [여름방학에 마녀를 만났다] “마녀는 키가 내 엄지손가락 정도 됐다. 매우 화난 표정이었다. 그녀는 피가 쏠려 빨개진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우리를 째려보았다.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심스레 입을 열려는 순간, 빛이 번쩍하더니 나와 친구들 모두 마녀의 집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 p. 90 “구름이 되어버린 사람들은 둥둥 떠다녔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으려고 전봇대나 가로등에 매달려 있기도 했다. 나는 핑크색 낚시의자에 앉아 멍하니 있었다. 그때 언뜻 하얀 구름들 사이로 휘날리는 검은 망토 자락을 보았다.” --- p. 107 [발코니] “건축가는 작심한 듯 홀가분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무슨 말인가 하려고 입을 뗐습니다. 바로 그때,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가 여전히 도면에 코를 들이댄 채 말했습니다. -그런데 발코니 확장을 해야 할까요?” --- p.125 [아날로그 보이] “저건 스마트폰이라는 거야.” 불빛이 말한다. “폰? 버튼도 하나 없는 저게 전화라고? 그럼 나는?” “너는….” 불빛이 말을 멈춘다. 전파가 도무지 잡히지 않는다. “쟤에 비하면 그냥 아날로그야.” --- p.135 “사랑도 물건도 핸드폰도 계절처럼 왔다가 또 간다. 하지만 나는 민호에게 말해주고 싶다. 완전히 똑같은 계절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고.” --- p.156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이 언덕 너머로 완전히 사라질 때쯤 나는 조그맣게 중얼거린다. 안녕. 이제 정말 안녕.” --- p.1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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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의 기적」: 비행기 실종 사건을 모티프로 쓰인 김중혁의 미스터리 단편이다. 공해상에서 원인불명으로 실종된 비행기와 기적처럼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실화를 기록한 책을 찾아내려는 인물들과 그 책을 없애려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계단만 있는 나선형 집처럼 경계가 모호한 8개의 짧은 이야기들은 각기 다른 인물을 중심으로 쓰였으며, 그들은 사건의 다른 측면을 알지 못한다. 독자는 서로 잇닿아 있지만 결코 완전히 만나지지 않는 사건의 조각들을 가지고 이 미스터리한 이야기 퍼즐을 맞춰나가야 한다. 또한 등장인물들은 작가의 기존 소설들에서 빌려온 인물들로, 김중혁의 팬이라면 어떤 작품의 어떤 인물이 이 미스터리 속으로 불려 왔는지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이사」: 직접 쓰고 그린 이야기와 그림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작가 정유미의 그림소설이다. 작품의 아이디어는 간결하다. 어떤 집이 하나 있다. 그리고 책장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집의 부분들이 하나씩 사라져간다. 집은 서서히 사라지면서 그 속에 사는 사람의 모습을 드러낸다. 애니메이션의 원형인 플립북flip book에서 착안한 「이사」는 롱테이크long-take로 찍은 무성영화 같다. 책이지만 분명한 영화적 장치가 사용되었고, 독자는 페이지가 바뀌는 속도와 더불어 작품 속 인물의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 시간과 소멸과 존재를 명상하게 만드는 이야기이다. 「여름방학에 마녀를 만났다」: 일러스트레이터이자 그래픽 아티스트인 이정환은 자신의 일러스트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대표 캐릭터들을 가지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10살 소년 토마스는 여름방학에 친구들-개구리 로니, 고양이 비키, 보행형 어항 푼과 함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일한다. 하지만 드라마와 쇼핑 중독에 내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날씨마녀가 그들에게 음모의 손길을 뻗는다. 날씨마녀에 맞서 위기에 처한 마을을 구하려는 토마스와 친구들의 좌충우돌 분투기가 귀엽고 사랑스러운 일러스트와 잘 어우러져 있다. “바르고 따뜻한 이야기가 판타지처럼 아득해져버린 세상이지만, 용기 있는 어른이 되는 데 이 이야기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작가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발코니」: 오영욱(오기사)의 「발코니」는 집짓기를 의뢰하러 온 건축주와 그의 욕망에 맞춰 건축가가 그려낸 도면들의 짝으로 이루어진다. 건축주는 자신이 꿈꾸는 집의 모습을 계속 이야기하지만 그의 요구사항들은 서로 상충한다. 변덕스러운 희망에 따라 도면은 계속 수정된다. 끊임없이 새로운 도면을 생성시키고 무화시키는 건축주의 욕망은 집요한 반복으로 시각화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수많은 도면들은 아무런 의미도 획득하지 못한 채 공허해진다. 강한 대비를 이루는 블랙앤드화이트로 구성된 도면과 텍스트는 단순한 서사의 반복을 통해 무거운 물질성을 획득하고, ‘꿈에 그린 완벽한 집’이라는 허구의 욕망을 희화한다. 「아날로그 보이」: 소설가 문지혁과 만화가 문지욱 형제가 공동창작 방식으로 작업했다. 오래된 구형 휴대폰인 ‘아날로그 보이’는 어느 날 불쑥 잠에서 깨어난다. 책상 위의 친구들-스탠드, 화분, 연필깎이, MP3, 책, 탁상달력은 그가 다시 깨어난 이유에 대해 저마다 추측들을 하지만, 누구의 말도 확실하지 않다. 분명한 사실은 그의 주인 민호에겐 아날로그 보이가 아닌 최신 스마트폰이 생겼다는 것, 그리고 아날로그 보이의 메모리 속엔 민호의 옛 여자친구 민지와의 수많은 추억이 저장되어 있다는 것뿐이다. 벚꽃이 흩날리는 봄날, 함께 짧은 나들이를 나선 아날로그 보이와 민호의 이야기가 ‘기억하다’와 ‘잊혀지다’의 틈새에 놓인 이별의 시간을 노래하는 한 편의 서정시처럼 흘러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