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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첫째 날-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윤동주- 후쿠오카 현) 둘째 날- 신이 된 사나이(이삼평- 사가 현) 셋째 날- 슬픔을 삼키다(군함도- 나가사키 현) 넷째 날- 난공불락을 꿈꾸다(구마모토 성- 구마모토 현) 다섯째 날- 미야마 느린 산책(미야마마을- 가고시마 현) 여섯째 날- 되살아난 왕의 전설(남향촌- 미야자키 현) 일곱째 날- 히메시마, 그녀를 만나다(히메시마 섬- 오이타 현) 에필로그- 다시 제자리에 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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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는 벤치가 서너 개, 미끄럼틀과 놀이기구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윤동주와 관련된 어떤 것도 없다. 미끄럼틀 뒤에는 철망으로 담이 쳐져 있고 그 너머가 후쿠오카 구치소이다. 여기서 매년 2월마다 담장을 마주하고 20년째 추도식이 열린다.
천천히 공원을 가로질러 그 자리에 서 보았다. 가슴이 무겁게 뛴다. 추도식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오고 싶었는데 이제야 와서 이 자리에 섰다. 세찬 비 때문에 바닥에는 금방 물웅덩이가 생겼다. 내 마음에도 슬픔이 고인다. 텅 빈 공원에 서서 뜨겁게 그를 추모한다. --- p.17 이마리에는 행복을 부르는 세 개의 다리가 있다. 모두 한눈에 들어오는 거리에 있다. 부부나 연인이 함께 건너면 사이가 좋아진다고 하는 상생교를 지나, 건강을 기원하면서 걸으면 장수한다는 연명교―다리 이름이 구구하지만 오래 산다니 건너고 싶어졌다―를 걷고 평생 행복해진다는 행복교를 건넜다. 나는 오늘 ‘평생 사이좋게 행복하게 오래 사는’ 티켓을 거머쥔 셈이다. 15분 산책이 주는 즐거움, 여행자에게 건네는 위안이다. --- p.54 조선의 도공들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버려진 벽돌을 깨고 적토를 이겨서 습관처럼 담장을 만들었을 것이다. 담장 위에 가만히 손을 얹는다. 흙이 주는 온기가 느껴진다. 나는 지금 무엇이 그리운 걸까? 마음 밑바닥까지 묵직하다. 담장 아래 놓인 의자에 앉았다. 좁은 도랑이 맑은 소리를 낸다. 바닥에는 하얀 돌 다섯 개로 만든 꽃이 피어 있다. 골목은 시간이 멈춘 것 같다. 잊은 듯 천천히 흐른다. 손을 내밀면 시간의 끝자락에 닿을 듯하다. 긴 시간을 뛰어넘어 그리운 그분들이 근처 어딘가에 계실 것 같다. 나는 느리게 과거 어디쯤을 걷는다. --- p.63 안전모와 안전등을 갖추고 작업복도 갖춰 입은 일본인 광부들의 사진을 보여준다. 사진 속의 광부들은 환한 얼굴로 웃고 있다. 나는 속옷 한 장만 입고 안전 장비도 갖추지 못한 채 바닷속 수백 미터에서 굴을 뚫고 석탄을 캐던 왜소한 조선의 청년을 생각한다. 호화로운 레스토랑 사진도 보여준다. 나는 화려한 그림자 뒤에 고구마나 콩기름 찌꺼기를 배급으로 받으며 굶주림의 지옥을 견디던 징용 노동자들을 생각한다. 탄광 직원의 높은 급료를 자랑한다. 나는 임금 한 푼도 못 받고 “어머니 보고 싶어” “배가 고파요” “고향에 가고 싶어”라고 벽에다 쓴 어린 소년을 생각한다. --- p.97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B29 폭격기에 의해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나가사키는 폐허가 되었다. 당시 나가사키 인구 24만 명 중에 약 15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한국인 피해자 약 2만 명 중 희생자가 1만여 명이었다. 대부분이 징용으로 끌려왔다가 희생된 노동자들이다. 1만여 명, 정신이 아득해지는 숫자이다. 그분들의 추도비가 이곳에 쓸쓸하게 자리하고 있다. 가혹한 노동 속에서도 고향에 돌아갈 꿈을 꾸고 있었을 그들은 목이 타들어가는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 비석 위에 뿌린 생수는 그들이 흘린 눈물 같다. 우리가 잊고 있는 기억처럼 흐릿하게 말라간다. 이 구석진 곳에서 1만여 명의 서러운 넋이 어떤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카스텔라와 야경, 강제노역과 1만여 명의 희생자, 나가사키의 두 얼굴이다. 나가사키의 조선인,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이름이다. --- p.112 비석의 글씨는 희미해서 ‘일요상인(日遙上人)’이라는 글자만 겨우 알아볼 정도이다. 묘비 앞에 섰다. 열세 살 소년을 만난다. 아직 부모의 손길이 필요할 때 이국땅으로 끌려와 수도자의 삶을 살았지만 그 마음속에 맺힌 그리움은 오죽했을까? 고국으로 돌아가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결국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사백 년이 지난 지금도 이 자리에 남아 있다. 가만히 비에 손을 올린다. 나도 모르게 부모의 마음이 되어 울먹이는 열세 살 소년 여대남의 등을 두드린다. --- p.157 네 번째 도리이 아래 섰다. 희미하게 옥산궁이라는 글자가 남아 있다. 이끼 낀 나지막한 계단을 올라 옥산신사 앞에 섰다. 이국땅에 끌려와서 절망 속에서도 쉼 없이 그릇을 구워 사쓰마자기를 탄생시킨 그들의 강인함을 생각한다. 슬픔을 생각한다. 사방은 고요하다. 귀를 기울이면 400년 전 절절하고 애타는 기도 소리가 들려올 듯하다. 그들의 마음 자락에 조금이라도 닿고 싶다. 가만히 두 손을 모은다. 두 눈을 감는다. 문득 가는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간다. 이곳에서는 기도할 때 바람이 불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다. 어쩌면 그것도 400년 전 그분들의 간절한 소망에서 생긴 전설인지 모른다. --- p.176 한반도와 규슈 지역은 아득한 옛날부터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전설이 생길 법도 하지만 의문스러운 건 공주가 한반도에서 배를 타고 온다면 바로 규슈의 서쪽에 도착하게 될 텐데 동쪽에 있는 히메시마까지 왔다는 점이다. 이 전설은 고대 사람들이 대륙에서 일본의 좁은 간몬 해협을 일부러 지나면서까지 이쪽으로 올 이유나 목표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히메시마는 고대부터 바닷사람들이 살던 곳이며 그만큼 해양 신앙도 뿌리 깊었을지 모른다. 그 신앙이 전설이 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내해에 있으면서 넓은 외해와 한반도와도 교류한 장대한 꿈을 가진 섬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신사의 안내문에 나와 있던 셋쓰, 나니와, 분고 같은 지명은 한반도에서 이곳에 이르던 고대 도래인의 교통로를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이들이 신으로 모시는 그 공주는 누구였을까? 대륙의 우수한 문화를 전해준 귀인을 상징적으로 신으로 삼은 건 아닐까? 의문이 즐겁게 꼬리를 문다. 고대사의 수수께끼는 이렇게 가슴을 뛰게 한다. 등대에 기대앉아 그녀가 품은 비밀을 상상한다. 그사이 작은 어선 몇 척이 지나갔고 히메시마로 가는 페리가 출발했다. 흰 바지 아저씨 일행이 오랫동안 손을 흔들어 주었다. --- p.2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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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역사 여행을 생각하다
이 책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쇼핑을 즐기고 유명한 관광지를 보려는 사람에게는 맞지 않는다. 다만 무관심 속에 잊힌 역사를 기억하고 많은 사람이 곳곳에서 흘린 눈물을 잊지 않으려는 독자들에게는 작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이 책은 그 긴 여정을 위한 첫걸음이다. 저자는 두 나라가 얽힌 역사의 현장을 걷고 그 ‘끈’을 생각하는 여행자이다. 역사학자가 아닌 일반인의 눈으로 보고 느낀 역사 이야기와 잔잔한 감동이 독자들을 어렵지 않게 역사의 현장으로 이끌 것이다. 저자는 한일 간의 ‘끈’을 찾는 여행을 하면서 숱한 슬픔을 만난다. 해결되지 못한 역사의 현장에서 묵직한 분노를 느끼기도 하고 깊은 슬픔으로 눈물을 흘린다. 또 애정을 가지고 한국을 바라보는 일본인을 통해 작은 위로도 받는다. 그들과의 만남에서 두 나라 사이에 흐르는 온기를 느끼기도 한다. 저자는 여행을 통해 아픈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통받은 분들을 위로해 드리고 싶었지만 자신이 더 큰 위로를 받았다고 고백한다. 저자는 독자에게 함께 생각하자고 제안한다. 무관심 속에 잊힌 역사를 기억하자고 전한다. 역사를 기억하는 민족과 잊는 민족은 미래가 다르다. 역사를 바르게 기억하는 데서 미래를 향한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이 여행은 혼자 떠나는 역사 여행의 의미로도, 재충전의 의미로도, 도심을 떠나 깊은 시골을 걷는 의미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걸어 온 그 긴 길을 돌아보고 기억하는 여행이라면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제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자. 소심한 홀로 여행을 들여다보는 즐거움이 있다 이 여행은 혼자 떠나는 느린 여행이다. 차를 빌려서 빨리 움직이며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보려 하지 않는다. 대중교통으로 느리게 움직이며 그날 볼 수 있는 만큼 천천히 규슈를 돌아본다. 이동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날도 있다. 그런 날은 원 없이 창밖 풍경을 보고 한없이 생각 속에 빠진다. 새로운 발견을 하며 하루하루 여행을 꾸려간 그녀의 홀로 여행이 들여다보인다. 저자는 오랫동안 일본 전역을 혼자 여행한 홀로 여행 예찬론자이다. 하지만 여전히 빈틈이 많고 소심하며 겁이 많다. 가고시마의 시골 미야마에서 마을 사람들이 청소하러 가 있다는 말을 믿고 혼자 산길을 올랐다가 아무도 없는 걸 알고 눈물 콧물을 흘리며 뛰어내려오기도 하고 이삼평 비를 찾아 아무도 없는 언덕을 오르다가 끝이 보이지 않아 불안해하기도 한다. 혼자 여행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한 불안일 것이다. 하지만 윤동주의 시를 좋아한다는 공통점 하나만으로 뭉친 감동적인 시간,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따뜻한 우정, 버스를 놓친 대신 찾아온 등대 뒤에서의 꿈같은 휴식 등 혼자 여행이 주는 자유로움과 즐거움을 선사한다. 특별한 규슈 여행을 꿈꾸는 여행자에게 드리는 제안 가이드북의 안내에 맡기는 여행이 편할지도 모르며 더 큰 즐거움을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 역사든, 음식이든, 영화든 하나의 테마로 며칠을 보내는 여행이 특별함을 더한다고 제안한다. 이 책을 통해 저자의 여행을 들여다보자. 마음이 움직이면 그녀의 걸음을 따라 길을 나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오래 생각하고 천천히 걸으며 내면의 에너지를 채우자. 당신의 여행에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규슈에서 일주일을』은 역사와 만나는 반가움과 그리움에 가득 차 있다. ‘윤동주의 시를 읽는 모임’에서 만난 따뜻한 사람들과의 우정, 무너진 잔재 위에 두 나라의 새로운 관계를 쌓아가자던 구마모토의 요시카와 상, 인정이 넘치는 도모코 아주머니, 인생의 존엄과 나이의 품위를 가르쳐 준 다카다 상, 한국에 넘치는 호의를 가지고 있던 남향촌의 다로 할아버지, 이들과 짧은 시간 깊은 우정을 나눈 이야기는 한없이 따뜻하다. 그녀는 일주일간의 여행을 마쳤다. 이제 우리가 쇼핑보다 재미있고, 음식보다 감동적인 그녀의 여행에 빠져들 차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