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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2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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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sume Soseki,なつめ そうせき,夏目 漱石,나츠메 긴노스케 夏目 金之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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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첩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썰렁한 주머니와 야윈 지갑 사정에도 거금 2전의 낭비를 개의치 않고 시코쿠 구석까지 옥찰을 내리시는 이 친절. 필시 감격의 눈물에 젖어 이 낭군의 대자대비함을 감사히 여기시리라, 본의 아니게 생색을 내며 급보를 전하오. 일전의 편지로 의뢰하신 점수 목록은 그만하면 알았으니 일일이 말하지 않으셔도 되오. 만사 내 생각 속에 있으니, 우선 에돗코가 하는 것을 보시게나. 할 일 없는 사람이 고맙게도 갑자기 볼일이 생기니 기뻐하며 당장 비술을 써서 구메 선인을 생포했으니 우선은 안심했지. 그래도 총포로 생긴 굳은살(쓸렸다기보다 허물을 벗은 것에 가까움)에 손 거죽 두껍기가 한 척이나 된다는 시골뜨기 병사를 상대로 한 이런 담판은 부드러운 풍류남으로 이름 높은 나로서는 도저히 무리가 아닌가. 물러나겠다고 뻣뻣하게 거절할 판이었지만, 그래도 그것이 참, 어쩌랴. 자네, 아니 애첩을 위해서는 목숨에 여벌만 있다면 둘이든 셋이든 바쳐도 좋다고 할 만큼 친절한 이 몸인지라, 조금도 굴하지 않고 고금 미증유의 용기를 고무해 두세 번의 전쟁을 치른 결과, 무운이 돌보시어 승리하게 되었소. 규수의 몸은 1부 2학년 3반 교실을 종횡무진 마음대로 활보하시게 되었다오. 분명, “어머나, 믿음직스럽기도 하셔라. 긴 님은 추남인 얼굴과는 안 어울리게 내실 있는 사람이시군요.” 라고 하시리라 생각되어 이 몸의 고명한 공적을 대서특필해 선전하니 대략 이와 같소. 낭군으로부터 ?이 편지 도착 무렵에는 분명 상경 중이겠지. 만약 여전히 우물쭈물 고향에 눌러붙어 있다면 이 글을 보는 대로 뛰어나와 도쿄로 출발해야 할 것일세. * 이해 9월 소세키와 시키는 함께 제1고등중학교 본과 2학년으로 진급했다. 시험 점수가 모자랐던 시키를 위해 소세키가 분주히 노력한 경위를 마치 애첩을 위한 낭군의 마음인 듯 해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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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가 주고받은 편지를 날짜순으로 모은 것이다. 두 사람이 막 세상에 눈을 뜨던 1889년부터 1901년 시키가 사망하기까지 13년간의 교유의 기록이다. 나이로는 만 22세에서 35세, 이 기간에 시키는 그의 전 생애에 걸친 문업을 이루었으며, 소세키는 영문학자에서 장차 대문호로 우뚝 서게 되는 모든 역량을 싹틔우게 된다.
두 사람 사이의 왕복 서간 중 현존하는 것은 모두 84통으로, 시키가 보낸 것 21통, 소세키가 보낸 것 63통이 남아 있다. 서간은 출판 매체에 공식적으로 발표되는 문학 작품과 달리 특정 개인에게 발신되는 사적인 기록이므로, 서간을 받은 당사자의 소유로 보존되거나 공개된다. 따라서 거의 전편이 남아 있는 소세키의 서간에 비해 시키의 서간이 소략한 것은 수신자인 소세키 측의 사정에 기인한다. 시키는 일찍이 정착해 거주지 이동이 적었으나 소세키는 졸업 후 마쓰야마(松山)와 구마모토(熊本)를 옮겨 다니며 교사 생활을 했고, 영국 유학까지 다녀오는 등 이주가 잦았던 탓에 보관이 용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유실된 시키의 서간은 적어도 현존하는 양의 2배 이상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소세키의 서간을 통해 분명 존재했을 시키의 답신을 추측하는 것도 왕복 서간을 읽는 하나의 묘미일 것이다. 이 책에는 현존하는 시키의 서간 전체와 소세키의 서간 46편을 번역해 수록했다. 소세키의 서간 중에서 간단한 용무나 하이쿠 원고 전달을 목적으로 발신된 것들은 제외했으며, 대신 시키 사후 소세키의 심경을 엿볼 수 있는 글 2편을 추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