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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여행 도착 첫 번째 만남 인연 두 번째 만남 희생 세 번째 만남 용서 네 번째 만남 사랑 다섯 번째 만남 화해 에필로그 옮긴이의 말 |
Mitch Alb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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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는 누구나 자식에게 상처를 준다. 어쩔 수가 없다.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깨끗한 유리처럼, 보살피는 사람의 손자국을 흡수하기 마련이다. 어떤 부모는 유년기의 유리에 손자국을 내고, 어떤 부모는 금가게 한다. 몇몇은 유년기를 완전히 산산조각 내서 다시 맞출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 어린 시절, 에디는 두들겨 맞고 매질당하며 보냈다. 이것이 무관심 이후 두 번째로 입은 상처였다. 폭력의 상처. 폭력에 어찌나 익숙해졌던지 보도를 걸어오는 발소리만 들어도 오늘은 얼마나 심하게 맞을지 짐작할 정도였다.
이 모든 것을 겪으면서도 에디는 마음 속으로 아버지를 좋아했다. 아버지가 아무리 폭력을 휘두르고 상처를 입혀도 아들은 아버지를 좋아하는 법이니까. 아들들은 그렇게 마음을 바치는 것을 배운다. 신이나 여자에게 마음을 바치기 전에, 아버지에게 마음을 바치는 것을 배운다. 말도 안 되는 일이고, 설명이 불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 pp 1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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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는 말했다.
"희생. 자네는 희생했고 나 역시 희생했어. 우리 모두 희생을 한다네. 하지만 자네는 희생을 하고 나서 분노했지. 잃은 것에 대해서만 계속 생각했어. 자네는 그걸 몰랐어. 희생이 삶의 일부라는 것. 그렇게 되기 마련이라는 것. 희생은 후회할 것이 아니라 열망을 가질 만한 것이라네. 작은 희생 큰 희생. 어떤 어머니는 아들을 학교에 보내려고 일을 하지. 또 어떤 딸은 병든 아버지를 보살피기 위해 이사를 하고, 사내들은 조국을 위해 전쟁에 나가기도 하고..." (...) "하지만 대위님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대위는 혀를 찼다. "바로 그거야. 때로 소중한 것을 희생하면, 사실은 그걸 잃는 게 아니기도 해.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 그걸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것이지." --- pp 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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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행위란 없다는 것. 우리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 바람과 산들바람을 떼어놓을 수 없듯이 한 사람의 인생을 다른 사람의 인생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겁니다."
에디는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우린 공을 던지고 있었소. 내 어리석음 때문에 나는 길에 뛰어들었고 나 때문에 당신은 죽었소. 왜 당신이 죽어야 했단 말이오? 이건 공평치 않소." 파란 사내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삶과 죽음에는 공평함이 없어요. 있다면 착한 사람이 젊어서 죽는 일은 없겠지요." --- pp 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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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을 끌어안는 따뜻한 휴머니즘의 작가, 미치 앨봄
미치 앨봄은 첫 소설 『에디의 천국』을 통해 비로소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통찰과 휴머니즘’이라는 자신의 전작을 관통하는 문학적 깊이를 확보하게 된다. 사실에 바탕을 둔 감동 에세이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로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던 작가에게 소설이라는 형식적 실험은 어쩌면 보장된 성공을 도외시한 모험에 가까웠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주변의 기우를 가볍게 벗어나 삶과 죽음, 현실과 환상을 끌어안는 자유로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상상력과 치밀한 극적 구성으로 독자들을 감동의 한 극점으로 인도한다. 특히 전작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스승을 통해 들려주었던 그의 메시지는 『에디의 천국』에서 다시 새롭고 깊은 울림으로 변주되어진다. 하잘것없는 인생이라도 삶을 관용으로 바라보며 인간에 대한 사랑을 잃지 말라는 일관된 그의 메시지는 삶과 죽음을 끌어안는 따뜻한 휴머니즘의 정수를 보여준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도 전작처럼 역시 인간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연민과 애정을 드러내고 말지만, 그 방식은 절제력 있게 통제되어 서툰 감상의 늪에 빠지지 않는다. 처녀 장편소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대단한 성취이다. 이 처녀 소설을 통해 미치 앨봄은 ‘삶과 죽음을 끌어안는 따듯한 휴머니즘의 작가’로서 문학적 깊이를 확고히 한다. 따라서 『에디의 천국』은 독자들에게 삶과 죽음에 대한 유연하고도 심오한 생각을 제공하는 현대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끝은 또 다른 시작........ 그리고 나의 천국은? 이 작품은 독특하게도 끝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죽음을 50분 앞둔 해변가 쇠락한 놀이공원의 정비공 에디를 좇아 전개된다. 끝이 시작이 되는 이런 순환적 구조는 죽음을 단절이 아닌 새로운 시작으로 보는 순환적 세계관을 반영한다. 작품이 전개되면 독자들은 에디를 따라 천국에 다다르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 경지는 이미 산업사회의 직선적인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나 자연의 순환에 순응하며 죽음까지 포용하는 동양적인 세계관에 닿아 있다. 그래서 그가 도착하는 천국은 죽은 자들의 낙원이 아니다. 에디가 죽어서 도착하는 천국은 장소가 아니라 하나의 개념이다. 그곳에서 에디는 자신의 인생과 어떻게든 연관되어진 다섯 명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에디의 인생을 설명해주기 위해 각자의 천국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드디어 외롭고 우울한 말년을 보냈던 에디의 인생이 비로소 설명되어질 때, 우리는 커다란 충격과 감동을 받게 된다. 다시 한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모든 고통들이 삶을 오역(誤譯)하는데서 일어난다는 걸 깨달으면서. 어쨌든 우리가 왜 이 낯선 곳에서 이렇게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그 영원한 화두에 대한 해답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바로 죽음 뒤에 찾아올 천국이라는 것은 고독한 인간을 위한 따뜻한 위안이 되어준다. 잊혀진 채 살아가지만, 자신만의 천국을 만들어가는 보통사람들에게 바치는 헌시 에디의 신산한 인생은, 에디가 죽고 난 후의 ‘현실’―에디의 ‘과거’―사후에 도착한 ‘천국’에서 만난 사람들이라는 3가지 이야기의 교차 편집을 통해 정교하게 복원된다. 이 복잡한 이야기 구조처럼 그의 삶 또한 조각조각 이가 빠진 상처들로 얼룩져 있다. 하지만 천국에서 만나는 다섯 사람들을 통해 이 빠진 조각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마침내 한 사람의 인생이 온전한 의미를 지닌 채 설명되어질 때 우리는 엄청난 전율마저 느끼게 된다. 점점 이 소설에 몰입하면서 독자들은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에디 인생의 파편들을 짜맞추는 과정을 통해 의미없이 지나쳐 버리는 삶의 한 순간 한 순간,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는다. 그리고 미로처럼 얽혀 있는 한 사람의 인생을 추리기법으로 역순으로 쫓아가고 있어 속도감과 함께 호기심을 자극한다.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이야기들 위에, 간간히 삽입되어 있는 에디의 생일 장면들은 머릿속에서 오버랩되면서 세상과 자신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는 소품 역할을 한다. 따라서 감히 이 소설을, 의미를 찾을 수 없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천국을 만들어가고 있을 이 땅의 수많은 보통사람들에게 바쳐진 감동의 헌시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삶에 대한 진지한 물음과 예리한 통찰―“도대체 나는 왜 살아가는 걸까?” 주제에서 느껴지다시피, 이 책은 요즘 유행하고 있는 신변잡기적이고 가벼운 책들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대신 우리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묻는다. “도대체 나는 왜 살아가는 걸까?” 매일매일 똑같고 하잘것없는 인간으로 느껴지는 평범한 우리가 왜 태어나 왜 살아가는 건가?라고. 또한 천국이라는 사후세계 여행을 통해 삶에 대해 아주 진지하고 담백 솔직하게 탐구한다. 보통 천국을 아무 걱정, 근심없이 아픔도 없이 기쁨과 충만함이 넘치는 곳으로 상상하지만, 작가는 이 작품에서 천국을 색다르게 해석한다. 삶에서 단단히 맺혀 있던 아픔덩어리가 풀리는 순간, 자기 삶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를 통해 자신과의 화해가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천국’이라고. 그리고 이 책 전체를 흐르고 있는 정서는 다분히 동양적이다. 에디가 천국에서 만나는 다섯 사람들은 평소 그와 안면이 있는 인물도 있지만, 전혀 낯선 이도 있다. 그렇지만 이들은 모두 서로에게 연결되고 영향을 주고받아(인연) 사소한 것이지만 그것이 연결고리가 되어 결국 그것이 에디의 전체 인생을 이룬다. 서양적 환경에서 자란 작가가 어쩌면 이렇게 윤회라든가 인연, 해탈 등 동양적 정서를 잘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의 작품에 도입했는지 놀라울 정도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그가 전쟁 중에 불을 질러 죽게 한 소녀의 타버린 몸을 씻겨주며 해탈하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