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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헌사 기념판 발간에 부치는 글 서문 제 1 장 ― 죽음에 대한 두려움 제 2 장 ― 죽음과 죽어감에 대한 태도 제 3 장 ― 제1단계: 부정과 고립 제 4 장 ― 제2단계: 분노 제 5 장 ― 제3단계: 협상 제 6 장 ― 제4단계: 우울 제 7 장 ― 제5단계: 수용 제 8 장 ― 희망 제 9 장 ― 환자의 가족 제10장 ― 시한부 환자들과의 인터뷰 제11장 ― 죽음과 죽어감의 세미나에 대한 반응 제12장 ― 시한부 환자들과 함께 하는 치료 참고 문헌 독서 모임 가이드 심화 토론 가이드 옮긴이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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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izabeth Kubler 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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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위대한 지적 자유가, 인간과 과학에 대한 지식이, 우리와 우리 가족들에게 이 피치 못할 운명에 좀 더 잘 대비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히려 한 인간이 집에서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이하는 시대는 끝나고 말았다. 과학이 진보할수록, 인간은 죽음의 진실을 점점 더 두려워하고 부정하게 되는 것 같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 --- p.39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점점 더 인간적인 방향으로 가는 걸까, 아니면 비인간적인 방향으로 가는 걸까 ? 이 책에는 함부로 판단하려는 의도는 결코 담겨 있지 않지만, 그 대답이 무엇이건, 환자들은 분명히 전보다 더 고통 받고 있다. 비록 육체적으로는 아닐지라도 정서적으로는 그렇다. 환자들의 욕구는 수세기 동안 변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욕구를 충족하는 우리의 능력이 달라졌을 뿐. --- p.43 무기력하고 고통 받는 한 인간을 보는 순간 겁에 질려 외면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힘을 합쳐 어떻게든 환자에게 남아 있는 능력들을 활용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환자를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무기력하게 연명하게 하기 보다는 진정으로 살도록 도움으로써 그들의 죽음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 p.61 나는 누구나 실제로 죽음과 맞닥뜨리기 전에 평상시에 습관적으로 죽음과 죽어감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족 중 한 사람이 받는 암 선고가 우리 자신의 죽음을 냉혹하게 일깨워줄 것이다. 따라서 병을 앓는 시간 동안 자신의 죽음과 죽어감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면, 실제로 죽음과 조우하게 되건 혹은 삶이 연장되건, 그 시간이 축복일 수도 있다. --- p.73 나는 “ 환자에게 말을 해야 할 것인가 ?” 라는 질문은 “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환자와 어떻게 공유할 것인가 ?” 로 바뀌어야 한다고 믿는다. --- p.83 존중받고 이해받은 환자, 관심과 시간을 할애받은 환자는 머지않아 목소리를 낮추고 성난 요구들을 멈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한 사람의 소중한 인간이고, 보살핌을 받고 있으며, 여건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활동이 허용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p.108 출산을 앞두고 있는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아기 얘기를 할 수 있는 것처럼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음과 죽어감을 우리 삶의 고유한 일부로 여기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 p.246 나는 가족 중 한 사람이 줄곧 환자를 지키도록 강요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숨을 들이쉴 때가 있으면 내쉴 때도 있어야 하듯이, 사람들은 병실 밖에서 ‘ 배터리를 충전할 ’ 시간이 필요하고, 틈틈이 정상적인 삶을 누려야 한다. 항상 환자를 의식해서는 효율적으로 간호할 수 없다. --- p.271 이쯤에서 나는, 모든 환자에게는 평화롭고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이할 권리가 있다는 나의 소신을 다시 한 번 밝혀두고 싶다. 환자의 욕구가 우리의 욕구와 상충할 때 우리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환자를 이용해서는 안 된다. --- p.295 우리는 죽음 ─ 사회적으로 억압된 주제인 ─ 에 대해 솔직하고 단순한 방식으로 얘기하고, 폭넓고 다양한 토론의 장을 열고, 필요하다면 완벽한 부정을 용인하고, 환자가 그러기로 선택한다면 환자의 두려움과 걱정을 터놓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부정의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는 사실, 우리는 기꺼이 죽음과 죽어감이 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이 아마도 많은 환자들이 가장 반겼던 소통의 방식일 것이다. --- p.418 평온한 인간의 죽음을 지켜보자면 떨어지는 별이 떠오른다. 광활한 하늘에서 반짝이던 수백만 개의 별들 중 하나가 짧은 순간 확 타오르다가 이내 끝없는 어둠 속으로 영원히 사라진다. 죽어가는 환자의 곁을 지키는 치료사가 된다는 것은 이 광활한 인류의 바다에서 개별 인간의 고유함을 우리에게 일깨우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유한함, 우리 삶의 유한함을 우리에게 일깨우는 것이다. 우리 중에 70세를 넘기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대부분 독특한 일대기를 살고 우리 자신을 인류 역사라는 직물에 짜넣는다. --- p.4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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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가 ‘죽음과 죽어감’의 문제를 꺼낼 준비가 됐을 때, 의사는 환자의 질문에 대답하고 환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질문들을 잘 들어야 합니다. 의사는 환자에게 그가 죽어가고 있다고 무신경하게 말함으로써 환자로부터 죽음의 순간까지 살기 위해 필요할지 모르는 한 줄기 희망을 박탈해서는 안 됩니다.--- p.13~14
환자는 치료를 거부할 권리가 있습니다. 저는 의사가 환자에게 솔직하게 터놓고 말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의심되는지 말하고 환자에게 선택권을 줘야 합니다. 그렇지만 의사의 제안을 받아들일지 거부할지는 전적으로 환자가 결정할 일입니다.--- p.32 환자들은 충격을 받고 미래를 박탈당했다는 사실에 분노합니다. 하지만 서서히 자신이 오늘 여전히 살아 있고 아직 자신에게 내일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들은 살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예전과 다른 가치들을 중시하며 더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건강한 사람들과는 달리 다음 날과 다음 해를 항상 계획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현재의 삶을 더 즐깁니다.--- p.40 저는 모든 환자들이 반드시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의 단계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패턴을 따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싶습니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2~3개의 단계들을 동시에 보이고, 이 단계들이 항상 같은 순서대로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환자가 진정한 수용의 단계에 다다랐는데 퇴행하기 시작한다면, 이는 우리가 환자에게 삶을 내려놓도록 허용하지 않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p.45 환자들은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많은 환자들은 자신이 언제 죽게 될 것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말은 상당히 정확합니다.--- p.57 저는 안락사--- p.자비로운 죽임)에 완전히 반대합니다. 저는 우리가 아는 최고의 방법으로 환자를 치료하되, 인위적으로 생명을 연장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온갖 기계들을 이용하여 신체 기능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회복할 가능성이 있는, 의식을 잃은 환자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의료 서비스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76 저는 죽어가는 순간에 누군가가 자신의 옆에 앉아서 손을 잡아주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커다란 위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가 침대 옆에 앉아서 끊임없이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순히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엄마, 저 왔어요. 제 말 들리세요?” 그런 다음 환자의 손을 잡고 환자가 건강했을 때에는 주저하느라 미처 말하지 못했던 말들을 모두 하십시오.--- p.77 이것은 거의 오직 경험의 문제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많은 실수를 하고 있고 올바른 해석을 하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보다는 시도하고 실수하는 것이 더 낫다고 믿습니다.--- p.83 연명 장치를 언제 끌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환자의 권리입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에게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매우 비용이 많이 드는 연명 장치를 더는 유지하고 싶지 않다는 결정을 하는 것은 환자의 특권입니다.--- p.125 회복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모든 환자는 이용 가능한 모든 기술적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의학적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고 오직 기계들로만 신체 장기들이 기능을 유지하고 있는 환자들은 이런 종류의 관리를 받아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 연명 의료를 그만할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만 합니다.--- p.127 우리는 유족을 위로하기 위해서 죽음 안에서 특별한 뭔가를 발견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저는 가장 큰 위로는 유족의 손을 가만히 잡고서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그들과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p.157 저는 사람들이 장례식에 관해서 자신의 바람을 미리 표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유감스럽게도 너무 지나치게 복잡하고 값비싼 장례식을 요구하는 사회적 압력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는 정말로 불필요합니다. 우리는 장례식이 고인의 욕구가 아니라 가족과 친지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p.162 한 가정에서 어머니가 죽어가고 있다고 해도, 젊은 딸이나 아들은 데이트를 하거나 영화를 보러 갈 기회를 박탈당해서는 안 됩니다. 가정의 구성원들은 기력을 회복하고 에너지를 재충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만 합니다. 죽어가는 과정이 길어진 상황이라면 특히 그러합니다. 이러한 시간을 가지지 못하면, 가족들은 탈진할 것이고 정서적?신체적으로 소진될 것입니다.--- p.168 마지막 순간이 왔을 때 미처 끝내지 못한 일이나 후회가 남지 않도록 매일 환자에게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 죽음이 발생한 이후에 고인의 가족들을 돌봐야 한다면, 그들의 곁에 있으면서 그들이 분노, 우울, 최종적으로 수용의 단계들을 거치는 것을 도와주십시오.--- p.174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의 유한함과 대면하는 것이 좋습니다. 병에 걸리거나 치명적인 심장 마비를 겪기 이전에 말입니다. 우리가 젊을 때 자신의 유한함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죽음이 발생할 때 죽음에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p.180 병원의 크기가 커지고 전문가의 수가 증가하고 더욱더 많은 첨단 의료 기기들이 도입되면서--- p.이러한 현실은 간호사를 기계공학자로 만든다.) 의료진이 겪는 문제들은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러한 추세를 늦출 수는 없지만 잠시 동안 멈춰 서서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는 있다. 우리가 현재 하고 있는 일들을 ‘왜’ 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우리는 병원을 위해 혹은 특정 상사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환자를 위해서 일하고 있는 것인가?--- p.189 가끔 우리 모두에게는 기대어 울 수 있는 어깨가 필요하다.--- p.189 현재 중환자실 간호사들에게 요구되는 것처럼 하루에 8~9시간 근무하면서 시한부환자들 한 명 한 명을 헌신적으로 간호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거나 환자를 기계적으로 돌보는 방법뿐입니다. 이 과정에서 환자를 간호하는 일은 비인간적인 업무로 변질되고 말 것입니다. 제가 꿈꾸는 이상적인 병원의 중환자실은 간호사들이 하루에 4시간만 일하는 곳입니다.--- p.198 의료진은 죽어가는 환자에게는 요구 사항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를 편안하게 해주고,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한에서 고통을 줄여주면 됩니다. 또한 그는 자신을 버리지 않는 단 한 사람만 있다면 많은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p.215 우리는 그들에게서 다른 사람을 돕고, 베풀고, 자신만의 고유한 서비스(즉, 그들이 수십 년 동안 축적한 지혜와 경험들)를 제공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고 있다. 삶은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것, 도움을 받기도 하고 도움을 주기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중 도움을 주는 것은 우리의 은퇴 센터들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때가 많다. 이는 노인들이 죽기를 원하는 현상을 낳는다. 삶이 더는 살 만한 가치가 없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p.227~228 어떤 사람들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이 자신의 통제와 이해를 넘어선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무의식적인 진짜 두려움은 죽음이 파국적 파괴력을 가지고 있고 죽음이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의 잠재적 파괴성과 관계가 있다고 보는 관점에서 생깁니다. 저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파괴성을 똑바로 마주볼 수 있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p.249 그때가 언제 오든지 간에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하루하루를 살려고 노력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오늘과 같은 날이 수없이 많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희망하면서 말입니다. --- p.2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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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를 밝히는 죽음의 책 『 죽음과 죽어감 』을 읽고
-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박사님께 이해인(수녀, 시인) 추천사 중에서 『죽음과 죽어감』은 누구나 적어도 한 번은 읽어야 할 필독서로 추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책은 죽음에 대한 책인 동시에 삶을 이야기하는 책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당신은 멀리 떠났지만 우리가 죽음을 통해 삶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는 존재가 될 수 있도록 글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빛나는 지혜의 별이 되어주십시오. 성베네딕도 수녀원에서 『 죽음과 죽어감 』 을 공부한 수녀 학생 올림 ‘죽음의 5단계’를 최초로 소개한 죽음학 연구의 고전! 『인생 수업』의 저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대표작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이며 20세기를 대표하는 정신의학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죽음과 죽어감』에서 죽음과 삶 그리고 과도기에 관한 학제간 세미나 연구를 통해 그 유명한 부정과 고립, 분노, 협상, 우울, 그리고 수용의 ‘죽음의 5단계’를 처음으로 제시했다. 『죽음과 죽어감』을 통해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사람들에게 삶의 마지막과 대면하라고 목소리를 냈고, 환경, 사회적 권리, 보건 의료 분야의 문화적 혁명의 목록에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문제를 추가했다. 그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우리 모두에게 잘된 일이다. -?아이라?바이오크(의학박사,?교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죽음과 죽어감』은 고전의 반열에 오른 연구서이다. -?슬라보예?지젝(철학자,?교수) 삶에 관한 심오한 교훈 -《라이프?매거진》 우리가 죽기 전에 단 한 권의 책만 읽어야 한다면, 그건 바로 이 책일 것이다. - 이진(번역가) ? 출판사 리뷰 1969년『죽음과 죽어감』이 출간된 지 5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은 ‘연명의료결정법’의 시행으로 존엄한 죽음을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죽음과 죽어감』이 출간된 당시, 대공황과 세계대전, 한국전쟁을 겪고 난 미국은 비관을 덮을 정도의 낙관적인 태도가 팽배했으며, 사망자수를 급격히 줄인 항생제의 개발 등 엄청난 의학, 과학의 발전은 죽음도 정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과학이 진보할수록, 의료계는 생명을 연장하는 기술은 배웠지만 삶의 정의에 대한 토론이나 훈련은 해본 적이 없었고, 여전히 많은 사람은 진정한 삶의 연장선에서의 인간적인 죽음을 맞이하지 못했다. 『죽음과 죽어감』은 사회적인 반향을 이끌어냈다. 『죽음과 죽어감』은 의식 변화의 불을 지폈고, 불과 몇 년 만에 임상 실무를 완전히 변화시켰다. 죽어가는 환자는 더 이상 숨겨지지 않았고, 중증 환자에 대한 간호와 말기 환자에 대한 양적, 질적 연구의 유효성은 심리학, 정신의학, 노인병학, 임상적인 윤리와 인류학에 대한 발전을 가속화하는데 기여했다. 『죽음과 죽어감』이 미친 문화적인 영향은 너무나 근원적인 것으로 미국인들은 비로소 질병과 죽어감을 이해하게 되었다. 2018년 ‘연명의료결정법’을 시행하는 한국에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불후의 명저 『죽음과 죽어감』을 통해 우리의 삶에서 죽음과 죽어감이 본연의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하는 문화운동에 불이 지펴지길 바란다. 죽음을 무대 위에 세워 인간의 삶의 유한성을 일깨워주고, 개별 인간의 고유함을 잃지 않게 함으로써 인생의 서사시를 완성할 수 있는 토대를 갖추었다. 삶의 소멸성을 대표하는 죽음은 인간이 가진 가장 큰 두려움이지만,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몸소 죽어가는 환자들을 직접 만나 생의 마지막 시간에 갖게 되는 문제를 탐색하는 시대의 용기를 보여 주었다. 프로이트나 융의 공식으로 환자들을 설명하지 않았다. 병에 대해 속삭이던 시대에 환자를 강단 위로 데리고 나와 의사와 학생들에게 스승이 되게 하여, 아픈 환자와 아직은 건강한 사람간의 정신 역동을 만들어냈다. 환자들이 살기 위해 어떻게 투쟁하고, 치유가 불가능한 병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해 감정의 상태와 적응 기제들을 직접 의료진과 의학도, 성직자들 앞에서 눈으로, 그리고 귀를 통해 보여주었다. 죽음의 5단계, 〔부정과 고립-분노-협상-우울-수용〕는 이런 과정을 통해 최초로 정립되었고, 인간에 대한 연구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대중들이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 삶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일상의 삶을 더욱 충실하게 살아가도록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인류에 이야기했다. 우리는 개별적 존재로서의 인간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비극적이지만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사건을 좀 더 이성적이고 두려움 없이 이해하고 직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음과 죽어감을 우리 삶의 고유한 일부로 여기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녀가 인용한 타고르의 「길 잃은 새들」의 “탄생이 삶의 일부이듯 죽음도 삶의 일부 / 드는 발도 걸음이고 딛는 발도 걸음”이라는 시처럼. 위대한 지적 자유와 의학, 과학에 대한 지식이 날로 향상되었지만, 한 인간이 집에서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이하는 시대는 끝나고 말았다. 오직 인간만이 언젠가는 삶이 끝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비인간적인 죽음으로 인생의 극이 끝나고 있다. 익숙하고 애정이 깃든 환경에서 자신의 삶을 마치고 싶어 하지만 많은 이들이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고 있다. 현대사회의 죽음은 더 외롭고, 더 기계적이고, 더 비인간적인 것이 되었다. 때로는 환자가 실질적으로 사망한 시점을 판단하기조차 어렵다. 문명이 발달한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삶의 일부로서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고 있다. “죽음이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지혜 대신 기계에 매달리는 것은 아닐까? 인간의 나약함, 한계, 실패, 더 나아가서 우리 자신의 죽음을 일깨워주는 한 인간의 고통스러운 얼굴보다 기계가 우리와 더 가깝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50년 전에 한 그녀의 질문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사실에 자유롭지 못하다. 죽음은 불길한 일이며, 두려운 사건으로 항상 혐오의 대상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달라져야 하는 것이 있다면 죽음과 죽어감을 다루고 대하는 우리의 방식일 것이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하고 진실을 대면하고 수용함으로써 오늘이 마지막인 듯 인생을 충실히 살아가고, 마지막은 더 인간적으로 생을 마칠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죽느냐’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20세기 중반 한 여의사의 메시지인 『죽음과 죽어감』은 오늘날의 한국 독자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투병과 죽음이라는 주제가 의학과 의사들의 영역으로 국한되었던 것을 인생의 경험이자 개개인의 사적인 영역으로 끌고 나왔다. 환자와 의료진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편했으며, 죽음과 죽어감에 대한 한 개인의 자주권을 회복시켰다. 진정한 인간 중심의 삶을 성취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먼 길을 왔으며, 또 얼마나 먼 길을 가야하는가. 문명의 시대에 여전히 아픈 환자들은 선택한 적이 없는 길을 가고 있으며, 우리 모두가 결국엔 가야할 길이다. 우리 자신의 유한성은 알면서도 우리가 죽는 방식은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고, 우리의 선택에 따라 좋아질 수도 나빠질 수도 있다. 몸소 죽어가는 사람들을 만나며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목소리를 냈듯 누구나 실제로 죽음과 맞닥뜨리기 전에 - 죽음이 코 앞에 닥쳤을 때보다 저만치 멀리 있을 때가 덜 두려우므로- 평상시에 습관적으로 죽음과 죽어감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죽음도 삶의 일부이므로. “30년 이상 죽음을 연구해온 내 연구의 가장 본질적이며 중요한 핵심은 삶의 의미를 밝히는 일에 있었다.” -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