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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느닷없이 아빠가 되었습니다
1부 어린 시민의 싹을 마르게 하는 가정 - 얼른 좀 일어나! - 어른들 말에 말대답하면 안 돼 - 이게 다 널 위해서야 - 엄마 아빠 말 잘 들을게요 - 우리 단지는 부자가 사는 데래 - 제대로 썼는지 한번 보자 2부 거슬리는 어린 시민을 걸러 내는 학교 - 학생의 본분은 공부잖아 - 학생이 인권은 무슨 인권이야 - 체벌하지 않으면 도저히 가르칠 수가 없어요 - 교문 밖에 나갔다 와도 돼요? - 배고파 봐야 세상을 알지 - 너희들은 동성애 하지 마라 3부 어린 시민의 언어를 빼앗는 사회 - 너 공부 못하면 저런 사람 된다 - 그래서 내가 알바비를 안 줬어요 - 아직 어린 애들이 뭘 안다고 - 얼마나 잘하는지 결과로 증명해 봐 - 교육이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지 - 네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야 에필로그 - 어린 사람이 아니라 ‘어린 시민’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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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부모가 될지, 어떻게 아이를 키워야 할지 별다른 고민을 하지 못한 채 아이가 생겼고, 어느덧 세 아이의 아빠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아이와 함께 살게 되면서, 또 아이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줄 아는 나이가 되면서 미처 몰랐던 제 안의 모순을 보게 됩니다.
아이가 제 뜻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단호하게 “안 돼.”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제 아이가 자기 의사에 따라 스스로의 행동을 결정짓는, 자유롭고도 독립적인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어이가 없는 일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자유를 ‘교육과 보육’이란 이름으로 억압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유와 독립을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아이가 커 갈수록 아빠라는 존재가 자식을 억압하는 ‘권력자’가 될 수 있음을 깨닫곤 합니다. 아이를 독립적인 인격체가 아닌 부모에게 종속된 존재로 인식하다 보니, 저와 아이는 명령과 복종으로 이뤄진 권력관계로 지내 왔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아이가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성찰하며 사회에서 올곧은 목소리를 내는 시민이 되기를 바랍니다. 경쟁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유와 인권의 개념을 온몸으로 깨달으며, 사회의 부조리에 저항하는 민주 공화국의 시민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지만 제가 아이에게 하는 말과 행동은 아이를 시민에게서 더 멀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문제의식에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 머리말에서 "얼른 좀 일어나!" … 물론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건 학교에 가야 하는 입장에서는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효율’과 함께 ‘성실’이 불가침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아이들을 옥죄는 구속으로 작용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저는 성실하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왔습니다. 개근상 말고 정근상을 받으면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정근상을 받았다고 칭찬하는 어른들이 없었습니다. 아파서 죽을 것 같다고 했을 때 죽더라도 학교에 가서 죽으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별로 성실하지 못한 저이지만, 아이들에게는 성실을 강조합니다. 학교를 빠지는 것도, 등교 시간에 늦는 것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그치게 되는 거죠. 그런데 다그치는 것이 과연 효과적인 방법일까요? 민주적인 방법일까요? … 21, 22면에서 "이게 다 널 위해서야" 아이들을 설득하기 어려울 때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게 다 널 위해서야.”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그렇지 않다는 것, 아이도 알고 저도 압니다. 아이한테 하는 잔소리는 아이를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포장은 그럴싸하죠. 올바른 길을 제시한다는 명목하에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발 꺾어 신지 말라고 아빠가 얘기했지. 신발 꺾어 신으면 걸음걸이가 안 좋아진단 말이야.”, “손톱 좀 그만 물어뜯으면 안 돼? 병균 옮는단 말이야.”, “그렇게 자주 울면 아빠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니? 울지 말고 자기 말을 분명히 해야지.” 말만 봐서는 아이를 위한다는 게 빈말은 아닌 것처럼 여겨지죠. 하지만 그 근저에는 제 취향이 듬뿍 담겨 있습니다. 신발을 꺾어 신으면 불량하게 보여서 싫어합니다. 손톱 물어뜯는 건 보기에 안 좋고, 아이가 말을 하지 못하고 울음부터 터뜨리면 짜증이 납니다. 그러니 모두 아이를 위한다고는 하지만 사실 절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속이 터질 것 같아 아이에게 말로 된 비수를 꽂으며 그 스트레스를 푸는 것밖에 안 됩니다. ‘널 위해서’라는 그럴싸하면서도 속이 다 보이는 말과 함께 말이죠. 36, 37면에서 "학생이 인권은 무슨 인권이야" … 등굣길 학교 앞 풍경은 사뭇 살벌했습니다. 몇몇은 ‘엎드려뻗쳐’를 하고 있었고, 지휘봉을 가장한 매를 들고 있던 교사는 아이들을 매의 눈으로 살폈습니다. 선도부 완장을 찬 선배들 역시 매의 눈으로 살폈습니다. 선도부 완장을 찬 선배들 역시 매의 눈을 하고 있었죠. 등교 시간에 임박해 교문 안에 들어서는 날이면 제 뒤에 오는 아이들은 지각이라는 이유로 오리걸음 같은 얼차려를 받았습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는 6년 동안 반복된 일상이었습니다. 그때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머리 기르면, 지각 하면, 수업 시간에 떠들거나 졸면, 숙제를 안 해 오면, 문제를 풀지 못하면 벌을 받고 매를 맞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벌어지던 일이라서 무감각했습니다. 차이점이라면 학년이 높아질수록 교사들의 때리는 강도가 더 세졌다는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어떤 규정에 의해 저렇게 복장과 머리 길이를 단속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에 관한 교칙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어떤 내용인지 전혀 모른 채 학교를 다녔습니다. 너무나 일상적이었기에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이런 단속이 부당하다는 것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10여 년의 세월이 지나고서야 알았습니다. 문제는 여전히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 89, 90면에서 "교육이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지" … 흔히 교육은 정치색을 띠지 않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편협한 정치 인식을 심어 주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교사는 수업 시간에 어떠한 정치적 발언이라도 하면 안 되고, 정치적으로 중립에 서서 아이들에게 지식만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역사나 사회 등 정치를 다룰 수밖에 없는 수업 시간에도 정치적인 발언은 허용되지 않고, 그에 관한 토론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그런 발언을 하면, 아이들이 교사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것처럼 말이죠. 교사는 정치의 영역에서만큼은 무색무취여야 하고, 학교라는 교육 현장 역시 마찬가지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래야만 할 것 같고, 또 그래 왔던 것 같습니다. 허나 이는 허구에 불과합니다. 정치를 금하고 정치에서의 중립을 지키라고 강조하는 것으로 오히려 학교는 그 정치색을 강렬하게 내비칩니다.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정권의 구미에 맞는 ‘정치 교육’을 펼치게 되는 것입니다. … 186, 187면에서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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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던지는 어른들의 아픈 말
아침마다 아이를 깨우기 위해 전쟁을 벌이지 않는 집이 얼마나 있을까? 바쁜 부모가 “얼른 좀 일어나!”라고 말하는 것에 무슨 문제가 있을까? ‘잔소리’라고 여겨지는 부모의 말은 아이들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이게 다 널 위해서야.”라는 말에 다른 뜻이 있는 것일까? ‘학생’이라는 말이 ‘학교에 다니며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그럼 본분은 당연히 공부 아닌가? 필자는 자신이 세 아이에게 별생각 없이 건넸던 이런 말들이 어마어마한 폭력으로 가닿고 있었음을 깨닫고, 어떻게 하면 바로잡을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더하여 학교와 사회에서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하는 말,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하는 말에 숨겨진 억압의 기제를 읽어 내고, 일상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한다. 예로, 우리는 어른에게는 말대답을 하면 안 된다고 배웠다. 그런데 왜 말대답을 하면 안 되는 것일까? 필자는 민주주의는 다른 의견을 허용하는 체제라고 하며, 얼마든지 말로 누군가를 설득할 수 있고, 반대로 누군가에게 설득당할 수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자신 역시 말대답하는 아이를 나무랐지만 이제는 그 말을 입에 담지 않고, 그런 자신이 퇴근하기를 아이가 기다리는 것 같다는 소소한 기쁨까지 전한다. 어른들 말 잘 들으라는 말, 공부 못하면 저런 사람이 된다는 말, 능력을 결과로 증명하라는 말 등이 모두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그 안에 아이를 위한다는 진심이 조금이라도 담겨 있을 것이며, 본인들이 씁쓸한 현실을 경험해 보았기에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필자는 어른들에게 묻는다. 그런 말들이 정말 괜찮은지. 필자는 어른들이 ‘교육과 보육’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억압하고 있으며, 이것이 지속되는 한 우리의 미래는 모두 공멸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어린 사람이 아니라 ‘어린 시민’입니다 아이들은 그동안 가정과 학교에서 앎과 삶이 분리된 교육을 받아 왔다. 또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에 대해서 이론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이 패러다임을 바꿔야 할 때이다. 물론 쉽지 않다. 온 사회가 바뀌어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어디서부터 꼬인 실타래를 풀어야 할지 막막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필자는 상대방과 눈을 마주치고 대화하면 의외로 어떤 문제가 쉽게 풀린다고 하며, 풀리지 않을 것 같았던 아침잠 문제를 아이와 대화하며 싱겁게 해결해 나간 경험을 이야기한다. 부모의 말을 잘 들으라고 했던 자신의 말도 의심하기 시작하니, 부모라고 해서 항상 옳은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아이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아이를 해치고 있었다며 미안해한다. 필자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갈등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화목한 가정, 문제없는 학교와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절대적으로 따라야 할 불가침의 원칙이 되면 갈등은 생기지 않겠지만, 아이들의 내면에 생기는 갈등까지 없앨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갈등 가운데에서 각자 처한 입장을 이해하고 타협하며 균형을 찾아 서로 만족하는 결과를 도출해 나가자고 이야기한다. 아이들이 미성숙하다는 담론은 그것을 내세워 아이들을 통제하려는 목적에 불과하다. 여성도 참정권을 가지기까지 이와 같은 미성숙 담론에 시달렸다. 이제는 아동과 청소년 차례이다. 미래의 시민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에 기대, 현재의 권리를 박탈당하는 아동·청소년에게 시민의 권리를 돌려주어야 한다. 이렇게 아이들이 현재를 사는 ‘어린 시민’이라는 인식이 분명해지고, ‘어른 시민’과 ‘어린 시민’이 동등한 자리에서 이야기하게 될 때, ‘어린 시민’의 내일은 조금이나마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