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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때 후반 임진왜란과 대명관계>
1. 명군 참전과 정치적 영향 2. 명군 참전과 경제적 영향 3. 명군 참전과 사회, 문화적 영향 <광해군대의 대명관계> 4. 광해군 초, 중반 조명 사이의 쟁점 5. 대후금 출병 문제와 대명관계 6. '심하전투' 패전 이후의 대명관계 <인조반정과 대명관계의 추이> 7. 외교정책의 측면에서 본 인조반정 발생의 배경 8. 인조반정 승인을 위한 둘러싼 명과의 갈등 9. 인조반정 이후 병자호란 이전의 대명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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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금의 요구에 대한 답변 여부를 놓고 광해군과 비변사 신료들의 의견은 갈라졌다. 당시 대북파의 지도자였던 이이첨 등은 후금 사자의 목을 베고, 그들의 서신을 불태워버리자고 주장하는 등 강력한 척화론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기미하는 차원에서 그들이 보낸 서신에 속히 답하라고 지시하고, 동시에 자강책을 마련하라고 강조하면서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지겠다고 호언하였다. 나아가 말로는 후금과 결전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무장들이 서쪽 변방으로 부임해 가는 것은 한사코 회피하려 한다는 예를 들어 신료들의 이중적 태도를 질타하였다.
'중원의 형세가 참으로 위태로우니 이러한 때에는 안으로는 자강을, 밖으로는 기미하는 것을 꾀하여 한결같이 고려가 했던 것처럼 해야만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의 인심을 보면 안으로는 일을 분변하지 못하면서 밖으로 큰소리만 친다. 시험삼아 조정 신료들이 수의한 것을 보면 무장들이 말한 것은 모두 압록강에 이르러 결전해야 한다는 것이니 그 뜻은 참으로 가상하다. 그런데 어찌하여 지금의 무사들은 서쪽 변방을 사지(死地)처럼 두려워하는가. 생각이 한참 미치지 못하고 한것 빈말 뿐이다...'(광해군일기) --- p.2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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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군신들은 결국 송응창이나 원황 등이 강조했던 양명학 자체를 수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고, 다만 강학을 계기로 송응창을 만나 당면한 과제인 강화론을 철회시키는 것을 관철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이에 더하여 당시 이미 주자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중국과 거의 대등한 수준에 올라 있었고, 주자성리학을 정통으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던 상황 역시 명 지휘관들의 양명학 수용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들었다.
--- p. 16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