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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패자의 관 / 2. 내 마음은 돌이 아니다 / 3. 추풍사
작품 해설_이재복 / 작가 연보 |
李炳注, 호: 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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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가 요란한다. 나는 몽롱해지는 의식 속에서 패자의 관이란 엉뚱한 관념을 되뇌어봤다. 월계관이 승리자의 관이라면 패자의 관은 무엇으로 어떻게 엮어야 할까. 패자의 관일수록 화려해야 되지 않을까. 예수가 골고다의 언덕을 기어오를 때 가시면류관은 이를 데 없이 화려한 관이었다. ---〈패자의 관〉중에서 p.30
정치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 건 잘못이라고 생각해요. 정치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니까 과격파가 생겨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좌익이나 우익이나 과격파는 모두 정치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 데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봐요. 정치란 본래 그렇고 그런 것이다 하는 한계의식을 갖고 부족한 건 각기 개인이 자기 자신의 수양과 노력으로써 채우도록 해야 하는 건데. ---〈내 마음은 돌이 아니다〉 중에서 p.58 세상 사람이 네게 가혹해도 너는 관대해야 한다. 네가 지은 모든 죄를 보상하기 위해서도 관대해야 하며 네 죽음에 저주가 있지 말게 하기 위해서도 관대해야 한다. 문학이란 관대하라고 가르치는 작업이 아니냐. 공자님은 종평생 행해 어김없는 것은 용서하는 마음이라고 했다. ---〈추풍사〉 중에서 p.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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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새로운 슬로건, 관대함
이념에 의한 흑백논리는 근대사뿐 아니라 현대사에도 지속되고 있는 문제다. 근간에 벌어지는 정치인 선거가 정책보다는 색깔론으로 물드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폭력적 흑백논리가 응당하게 받아들여지던 1970년대에 이병주가 선택했던 ‘회색’의 지대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세 소설을 통해 생각해보는 것은 여전히 매우 유의미하다. 〈패자의 관〉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의 사회 정세에서 좌익과 우익이 극도로 대립적인 때에 교수직을 그만두고 국회의원에 출마하게 된 노신호가 선거 운동을 하는 과정에 빚어진 얘기다. 천부의 재능과 성실과 의욕을 지닌 노신호가 우세해지자, 자유당은 그가 좌익 사상을 지닌 자임을 내세우고 갖은 권모술수와 중상모략을 펼친다. 그 결과 그는 정책 실현 기회조차 잡지 못한다. ‘나’는 “인간을 존중하고 민주주의적인 인격을 갖춘 사람”이 바로 노신호라고 판단하여 많은 어려움을 감내하면서도 그의 선거 운동을 돕는다. 그러나 노신호와 같은 인격을 갖춘 사람을 당시의 사회체제는 온갖 치졸한 방법을 동원해 정치의 장에서 소외시켰다. 이병주는 그 정치의 장에 대해 관대함이 부재하다고 판단한다. 노신호가 정치판에서 배제당한 것이 당연한 귀결로 보일 만큼 당시 사회체제는 좌우 논리가 팽배해 관대함을 찾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런 노신호의 절망적 상황이 소설 속의 그리고 당대의 문제만은 아니다. 2012년 현재, 유례없이 국민의 정치의식이 높아지고 있지만 정치인들은 민생은 뒤로한 채 실권 다툼에만 몰두하고 있지 않은가. 실권 유지 혹은 탈환을 위해 민생을 위한 정책은 수면 아애로 가라앉고 좌우 색깔론만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병주는 이 관대함의 부재를 정치 탓만으로 돌리지 않는다. 모든 문제를 정치 탓으로 돌리는 태도에서 벗어나 정치란 본래 그렇고 그런 것이라 받아들이고 부족한 것을 개인의 수양과 노력으로 채우라고 한다. 여기에서 흑백으로 세상을 나누는 것에 반대하는 이병주의 태도가 확연히 드러난다. 모든 것을 정치 탓으로 돌리는 행위 이면에는 이분법적 흑백논리가 작동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회색 사상은 인간회복이다 〈내 마음은 돌이 아니다〉는 사상범으로 무기형을 언도받고 20년을 꼬박 채운 뒤 출소한 비전향 장기수 노정필과 작가인 나의 얘기가 소설 형식으로 전개된다. ‘나’는 마르크스주의 비판에 석상처럼 입을 열지 않던 노정필이 말문을 열게 하고 차츰 행동에도 변화를 일으킨다. 자본주의 상징인 백화점에 가 소비도 하고, 직접 목공소에서 노동해서 임금을 벌기도 한다. 작가는 마르크스 사상의 맹점과 공산당이 이념이나 이론만 있을 뿐 실천으로는 연결되지 않는다고 극렬히 비판한다. 또한 남로당의 폭력을 넘어서는 간디의 비폭력주의만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역설하기도 한다. 게다가 자본주의 경제 구조 속에서 생산과 소비를 체험하는 노정필을 보면서 더욱 열정적으로 그를 만나 사회주의 사상과 체제를 비판하고 그에게 “착각을 신념인 양 오인하고 있는 폐인”이라는 인격적 공격도 서슴치 않는다. 하지만 ‘나’의 이런 열성도 노정필을 원하는 대로 이끌지는 못했다. 노정필은 사회안전법이 통과되고 난 후, 결국 “살기 위해 떠난다”라는 말을 남기고 죽음을 택한다. 소설 속 작가는 노정필을 죽음으로 몰아갈 의도는 아니었다. 노정필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사상의 우월함으로 그를 지배하고 계몽하는 데에 있지 않고 노정필의 인간성을 회복시켜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가 보기에 노정필의 가장 큰 문제는 인간성의 상실이었던 것이다. 한 인간을 어떤 이념보다는 인간적인 면 때문에 접근한다는 그의 말에는 이병주의 사상의 근간을 엿볼 수 있다. 그에게 인간 회복은 회색 사상이 지향해야 할 가장 궁극의 목표이자 노정필을 구원할 최적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인정의 관대함이 이념을 감싸안다 〈추풍사〉는 작가 자신을 남로당원의 경력이 있다고 날조하여 공격하는 최광열에 맞서 그를 고소할지 말지를 두고 생각의 변화를 들추어내는 이야기다. ‘나’는 최광렬을 고발해서 죗값을 치르게 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를 고발하지 않는다. 그에 대한 인정 때문이다. 관대함이 인정의 일종이라고 보는 나는 “세월은 바뀌어도 인정은 변하지 않는다”라고 믿고 있다. 이 말은 인정이 관대함의 본질이며 인간을 평가하는 척도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인정주의자다. 인정의 관대함이 이념적인 이념을 감싸 안는 형국이다. 작가의 이러한 논리는 인간에 대한 관대함에 머물지 않고 ‘문학의 관대함’으로 이어진다. ‘문학이 관대해야 한다’는 논리는 단순한 수식어구? 아니라 그의 인간을 바라보는 태도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은 인간다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하는 사상과는 거리를 두며, 인정이 있는 인간적인 사람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그의 사상은 회색의 사상인 동시에 휴머니즘적인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