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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1부 길 위에서 그날 밤, 당진 동소문로의 붉은 달리아 박 사장이 팔아야 했던 것 귤이 배달된 저녁 분홍색 보온주전자 행복한 타일공 세상의 중심 폭력의 공범 기다리던 버스가 온다 단풍잎 여자들 담배를 피우는 시간 햄버거를 먹는 사정 무외시 사랑 발굴단 보고 싶다 골목 달빛 달에서 온 계피향 취한 말들의 시간 꿈을 잡으려는 꿈 가장 편안한 스웨터 2부 여행의 이유 어떤 무해한 삶 벽 레이크사이드의 건기 포카라는 번다 중 불청객은 누구인가 슈뢰딩거의 고양이 연인들의 안녕 정릉로와 보국문로 사이 나를 찾아서 별보배고둥 정체불명의 사람1 영리한 말 한스 우연의 목적 멀리, 더 멀리 3부 기억에 대하여 모든 곰은 자신이 주인이다 우리 집에 살던 백구 오리 웃다 하얀 새 검은 고양이 장소의 기억 삭제할까요? 분실 물건들 이태원 평행우주 앗, 나의 실수! 귀가 들려도 들리지 않는 빗방울이 부딪친다 여름방학이 끝나가고 있다 4부 세상에 없는 집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보러가다 폭설 귀농 실패기 미원의 잣나무 숲 내 마음의 호수 월식 달에게 주문을 걸다 응답하라 TV와 아파트 낯선 이들의 집 새벽 다섯 시 101호는 어디인가 맛없는 딸기를 사는 법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 시장의 기원 우체국 가는 길 당신의 플란넬 셔츠 5부 우리들의 안녕 1987 특별한 졸업 선물 안전지대 혐오 바이러스 광장에서 영혼의 침몰 가상시나리오 ‘3분’ 〈김군〉을 보았다 그보다는 긴 문장으로 슬프고 잔혹한 역사 상처받는 능력 나는 주인공 너 없는 평화 괴물이 창궐하는 세상에서 사랑은 6부 가깝고 먼 시간 사소한 저항의 기록 그래서 사랑한다 어머니의 눈물 병원 복도에서 낙화유수 한여름 밤의 꿈 존재의 중심 하얀 깃털 축복 엄마가 되는 일 그의 어머니 차가운 바닥을 닦는 일 한 뼘 위의 세상 두 명의 나 느리게, 더 느리게 운 나쁜 사람 문학이라는 코끼리 나를 사랑하고 싶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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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써야 할지 궁리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나는 세상을 향한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된다. 눈앞에 펼쳐진 4차선 도로 위로 온갖 사건과 장면들이 질주한다. 이따금 흐름이 엉키기도 하고 충돌이 일어나기도 한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고작 나에 불과해서, 서 있는 위치에서 가까운 곳이 잘 보이기도 하고, 희로애락 오욕칠정이 요동칠 때마다 보이는 광경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래도 내 이야기만 하고 싶지 않아서 조금 더 멀리, 더 세밀히 보려 애쓴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나, 세상은 변덕스럽고 쌀쌀맞은 말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도 신호등이 빨간색에서 초록색으로 바뀌는 순간이 오고 마침내 길이 열린다. 너무 빛나는 말들은 버려야 하는 길이다. 불타오르는 열의도 밀려드는 호의도 이야기하지 않는 길이다. 그렇게 무정한 마음을 붙들고 참으로 유정해서 무정한 세상을 건너간다.”
--- 「머리말」중에서 “잊었나 하면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관객이 거의 없는 극장 안에서, 왜 그러는지 모르지만 통로를 기어 다니던 사람. 눈 오는 겨울밤, 시골 읍내의 문구점 앞 구식 오락기계로 게임에 열중하던 초등학생. 종로 한복판의 어느 학원 앞에서 가방도 없이 책과 공책과 필통을 들고 어쩔 줄 모르던 여학생. 모두 사소한 일,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다. 깜짝 놀랄 일도 아니고,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 내게는 세상의 진짜 중심처럼 느껴진다. 흔히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집중하는 중심과 달리, 그런 장면들은 나도 모르게 다가가 손을 내밀게 만든다. 중심이란 그런 것이다.” --- p.38 “나는 문득 궁금해진다. 홀로 빙하 속을 헤매다가 해발 7천 미터 높이에서 죽음을 맞이한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어리석고 비현실적인 자, 구제불능의 몽상가 혹은 이상주의자? 어쨌든 그는 세상에 널리 유익하지 않았으나 해롭지도 않았다. 무해했을 뿐 아니라 흔히 우리가 ‘어리석음’이나 ‘광기’라고 부르는 욕망이, 안온한 일상과 사회에 적응하려는 욕망보다 더 대단한 결단력과 의지를 발휘할 수 있음을 증명한 사람이다. 만약 그가 누군가에게 해로웠다면 그것은 아마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였을 것이다. 나는 모리스 윌슨이 마주친 구체적 현실인 수직의 빙벽을 떠올리며 이상하고도 슬픈 느낌에 잠긴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널리 유익하지는 않으나 무해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 p.91 “곰은 연해주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우랄산맥 너머까지, 그리고 베링해협을 건너 북아메리카까지 널리 숭배를 받았다. 타이가에는 곰을 대적할 천적이 없을 뿐더러 숲 언저리에 모여 사는 사람들도 혼자 힘으로는 죽이거나 잡을 수 없었다. 겨울에는 잠들었다가 봄에 다시 살아나는 신비한 존재였으며, 풍요를 담보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수렵과 채취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곰은 타이가의 주인이자 털가죽을 입은 또 다른 사람이었다. 곰은 친구이자 경외의 대상이었다. (…) 그러나 살아 있는 곰을 동물원에서만 볼 수 있는 도시의 밤하늘에서는 방황하는 곰의 넋도 보이지 않는다. 이따금 밤하늘을 바라보며 사라진 별자리를 찾아보고 있노라면 떠오르는 말이 있다. 모든 곰은 자신이 주인이다.” --- p.1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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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마음으로 우리 삶의 뒷면을 바라보다 “계몽으로 흐르지 않고 섣부른 과시도 없이, 기품 있는 글이란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부희령의 글쓰기에 대한 이서희 작가의 평이다. 작가 요리사 박찬일은 또 이렇게 말한다. “읽으면 서늘하게 쓸쓸해지고, 덮으면 다시 따뜻해지는 기묘한 문장들.” 소설가 부희령은 그의 글을 잘 알고 좋아하는 이들 사이에서 곧잘 ‘철학자 부희령’으로 불리곤 한다. 사물과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서, 깊이 숨은 듯하지만 늘 우리 가슴에 기거해온 진실을 붙잡는 남다른 힘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 『무정에세이』는 그런 작가의 눈과 기억에 새겨진 우리 삶과 세상의 장면들을 99편의 사색적 문장에 담아낸 책이다. 작가는 너무 빛나는 말보다는 조용히 귀 기울여야만 들리는 나직한 말로 우리 삶의 편린들을 이야기한다. 너무 지나친 열의와 호의, 또 그 반대편의 혐오들로 들끓는 이 유정한 세상을 껴안는 방법은 차라리 무정한 마음이다. 사소하고 시시해서 금방 삭제될지 모르는 언어들이 오히려 찰나적 진실들을 붙잡는 데 유용하다. 우리는 작가처럼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손바닥의 온도로, 또는 너무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오후 3시쯤의 마음으로 그것을 잡을 때, 비통하고 억울한 이 세상을 껴안고 마침내 내 삶의 의미까지도 수긍할 수 있다. 좋은 에세이를 읽는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마음을 배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머뭇거리며 기다릴 줄 아는 마음에만 보이는 것들 이 책 『무정에세이』는 작가가 2001년 등단 후 2012년 소설집 『꽃』을 내고 (그 전후에 몇 권의 청소년 소설과 교양서, 수십 권의 번역서를 냈지만) 다시 7년 만에 독자들에게 선보이는 첫 산문집이다. 2015년부터 2019년까지 국민일보, 한국일보 등의 신문과 기타 매체에 선보인 글들 가운데 가려 뽑은 것이다. 글을 쓴 시점은 최근이지만, 글 속의 시간은 작가의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공간적으로는 서울 그리고 경기/강원 어름의 깊은 시골에서부터 네팔, 슬로베니아 등의 먼 이국땅까지 아우른다. 수십 년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작가가 만난 사건, 인물, 장소, 사물들에 대한 소회와 사색이 조각보처럼 이어져 있다. 그 조각들에는 밤길에서 만난 여인, 어릴 적 여름방학의 기억, 사회를 흔든 사건들, 여행지의 폐가 등이 포함된다. 그 조각들은 사소하고 하찮을지 모르지만 작가의 손끝에 와서 깊은 속내를 드러내고, 우리에게 세상과 삶을 반문하는 물음표 구실을 한다. 왜 우리 삶은 이렇게 어색하고 부끄러운가? 우리는 어디까지 가난할 수 있고 어디까지 욕망할 수 있는가? 우리는 타인에게 진심으로 다가갈 수 있는가? 작가는 이 물음들에 굳이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문학이 소구하는 목표가 그러하듯이, 사물의 표면과 당신의 문 앞에서 서성이며 진실의 실체가 서서히 떠오르기를 기다린다. 부희령의 글쓰기는 이 산문집에서 그렇게 발휘된다. 우리 삶의 아름다움과 서정은, 현실이 가진 비애에서 온다 부희령의 글은 무엇보다 쓸쓸하고 서럽다. 슬픔은 분명 우리들의 중요한 감정이다. 하지만 부희령의 글에서 그 감정은 강요되지 않고 우연한 사건들과 먼 기억들에서 자연스럽게 소환된다. 작가는 스스로 집도 없고 직업도 가진 것도 없는 누추한 일상을 가볍게 고백하고, 그런 삶의 가치도 너무 열띤 욕망을 버린다면 느슨하고 즐겁게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너무나 시끄럽고 뜨거워서 유정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무정하기만 한 이 세상을, 무정한 마음으로 건너가는 법을 가르쳐준다. 확실히 우리가 사는 세계의 무능력과 불의는 참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한 그 현실이 보여주는 비애 속의 아름다움과 서정은 이 세상의 한계를 절실히 인정하는 사람에게만 보일 것이다. 외롭고 쓸쓸하지만 그럴수록 따뜻하게 느껴지는 등불처럼. 여섯 가지 테마로 엮은, 우리들 시시한 존재에 깃든 큰 의미들 부희령의 『무정에세이』에는 이러한 정조로 이어지는 여섯 가지 글 묶음이 실려 있다. 1부 ‘길 위에서’는 작가가 오가던 길목에서, 또는 우연한 낮과 밤의 시간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일찌감치 늙어버린 젊은 여자, 다정한 할머니들, 목이 늘어진 스웨터의 소설가 친구에게서 작가는 자신의 얼굴을 본다. 2부 ‘여행의 이유’는 여행지에서 불현듯 작가에게 틈입해온 삶의 감상(感傷)과 이유에 대한 이야기다. 네팔의 지진, 포카라 궁의 도인, 슬로베니아 아파트의 빈 고둥이 우리의 존재를 소환한다. 3부 ‘기억에 대하여’는 시베리아 타이가 지대의 곰 신화에서부터 삭제된 핸드폰 사진과 어릴 적 빗속의 달음박질까지, 작가 자신을 만들어온 기억들을 스케치한다. 그 기억들을 통해 영영 사라지는 시간과 공간은 없다는 깨달음을 건져낸다. 4부와 5부는 좀 더 사회적인 이야기에 집중되어 있다. 4부 ‘세상에 없는 집’은 우리가 머무르고 살아가는 ‘집’이라는 공간과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작가는 일상의 대부분이 벌어지는 그 공간을 내 것으로 갖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공감을 표현하고, 그럼에도 여전히 부단하게 이어지는 삶의 다채로운 색깔들에 대해 말한다. 5부 ‘우리들의 안녕’은 이 사회가 가하는 불의와 잔혹함의 피해를 가장 크게 입은 사람들, 그 영혼들에 대한 애도와 응원의 글들을 묶은 것이다. 작가는 거기서 이 사회만이 아닌 나 자신의 불의를 보고, 그래도 남아있는 선의와 희망을 본다. 마지막 6부 ‘가깝고도 먼 시간’은 작가 자신의 이야기다. 어린 시절 결락의 경험, 늙은 아버지와의 화해, 작가 자신의 삶에 대한 부정과 긍정을 통해 우리들 각자의 존재에 대해서도 따뜻한 위로의 말을 들려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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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희령은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오고가는 사소하고 느슨한 선의에 대해 쓴다. 바람이 지나가는 길, 햇살이 꺾어지는 골목 어귀에 남아 있는 기억에 대해 쓰며, 코끼리, 혹은 내가 아닌 존재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경이로움에 대해 쓴다. 물론 그해 커다란 배가 침몰할 때 덩달아 침몰한 우리 영혼의 일부에 대해서도. 책을 다 읽고 나서 약간은 시크한 그녀의 이름을 새삼 혀에 올려보았다. “그래, 이 사람이 부희령이지.” 이제 많은 사람들이 이 이름을 기억하게 되리라. - 김남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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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희령의 글을 가끔 읽었다. 그럴 때마다 촉수 낮은 등이 하나씩 마음 한 켠에 켜졌다. 그렇게 모은 등이 어느덧 마음을 데우고 길을 밝혔다. 그이가 한 글자씩 타자기를 두드렸던 공력이었다. 그렇게 희미한 등을 의식하면서 가로등도 없는 어두운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작가란 본디 그런 의무를 지고 있기도 하지만, 남의 길에 빛을 비추는 일의 공덕을 잊을 수 있겠는가. 다만 작가가 짚단처럼 성긴 속을 허물어 태운 빛이 늘 아슬아슬해 보였을 뿐. 나는 염치 있는 마음은 언제나 위태로운 법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다시 작가의 염치를 생각한다. 여기 실린 글들은 어쩌면 늘 실패하고 곤란에 처해 살아가는 우리에게 보내는 작가의 따뜻한 작은 불빛일 것이다. 그 불이 설령 꺼질지라도, 다시 잘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 박찬일 (요리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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