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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_4
1장 동아시아와 조공질서 화이관, 조공질서를 만들어 내다 _13 한족도 한때는 흉노에 조공하였다 _17 2장 삼국시대의 공녀 고구려 고국원왕, 스스로 신하 됨을 칭하다 _23 벽화로 본 고구려·신라·백제의 조공사절 _26 장수왕의 남진정책과 북위의 공녀 요구 _30 3장 고려시대의 공녀 원나라 사신 저고여의 피살과 공녀 요구의 시작 _35 고려 조정, 공녀 선발을 위해 국가 기구를 설치하다 _38 공녀를 기피하는 그 처절한 모습들 _42 공녀를 바라보던 고려 지식인의 이율배반 _46 공녀를 출세를 위한 뇌물로 바치다 _51 공녀 예방책, 일부다처를 주장하다 _55 고려 공녀, 얼마나 많이 끌려갔을까 _59 몽골에는 ‘고려양’, 고려에는 ‘몽골풍’ _64 원나라 시에 등장하는 고려 공녀의 아름다움 _72 4장 조선시대의 공녀 명 태조 주원장은 왜 조선 왕실과 정략결혼을 추진했을까 _81 1차 공녀, 그녀들은 왜 모두 후궁이 됐을까 _85 2차 공녀 정씨 처녀, 불행을 면하는가 했지만 _98 3차 공녀와 임신 경험이 있던 황씨 _101 1~3차 공녀의 비극적인 죽음과 ‘어여의 난’ _105 4차 공녀, 명나라행 가마에 자물쇠가 채워지다 _112 오라비 출세욕의 희생양(?), 5차 공녀 한계란 _117 6·7차 공녀에는 왜 어린 집찬녀가 많았을까 _121 태종~세종 대의 공녀 일부, 고국으로 돌아오다 _126 공녀 소문에 다시 전국적인 대소동이 일어나다 _129 공녀 차출 소문, 현실이 되다 _133 불쌍한 효종 대 공녀 ‘의순공주’ _138 5장 국내의 「황친」과 그 대우 현인비 오라비 권영균 _148 순비 아버지 임첨년 _151 소의 오라비 이무창 _154 미인 아버지 최득비 _156 정씨 아버지 정윤후 _158 두 한씨의 오라비 한확 _160 오씨의 아버지 오척 _164 나가며 _1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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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족(한족)은 화이관을 만들었고, 그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에는 조공질서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조공질서 아래에서 인간 공물인 공녀(貢女) 제도가 등장하였다.
--- p.13 그러나 고국원왕의 어머니 주씨(周氏)는 고구려로 돌아오지 못하고 인질로 남았다. 고국원왕은 그로부터 2년 후, 어머니를 되찾기 위해 전연에 또다시 비싼 대가를 제공해야 했다. 그는 전연에 조공을 바쳐야 했고, 거기에는 사람도 포함돼 있었다. 사람이 공물에 포함된 것은 이때가 처음으로 이는 다분히 인질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 p.25 공녀로 선발된다는 것은 태어난 곳을 뒤로 하는 것은 물론, 가족과의 기약 없는 생이별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고려사회에서 공녀라는 말은 공포 그 자체였고, 당연히 누구라도 공녀로 선발되는 것을 피하려 했다. 때문에 고려 조정은 국가 차원의 기구와 제도를 만들어 공녀를 강제적으로 선발할 수밖에 없었다. --- p.38 고려는 80여 년간 원나라의 번속국이 되어 정치적 간섭을 받아야 했다. 뿐만 아니라 고려는 원나라의 강압적인 문화적 간섭을 피할 수 없었다. 이것이 이른바 ‘몽골풍’이다. 대표적인 몽골풍으로는 고려 궁중 용어의 변화, 원나라 음식 유입, 원나라 복식 유행 등이 꼽힌다. 원나라는 고려가 부마국이 된 만큼 궁중 용어도 자국보다 한 단계 낮게 사용할 것을 강요했다. --- p.67 명나라 영락제는 태종의 생각을 듣고 원나라식 공녀 요구로 전환하였다. 명나라 환관 황엄이 영락제의 이 같은 뜻을 지니고 조선에 입국했다. 공녀를 거부한다는 것은 명나라와 조선 사이 조공과 책봉질서의 파탄을 의미했다. 태종은 명의 공녀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 p.86 한확은 이듬해 귀국할 때 성(成)·차(車)·정(鄭)·노(盧)·안(安)·오(吳)·최(崔) 씨 성을 가진 7명의 조선인 여자가 주는 편지를 가져왔다. 봉투 속에는 편지글과 함께 공녀의 머리카락이 들어 있었다. 이에 공녀의 친족들은 “평생토록 상견(相見, 서로 만나 봄)할 것은 다만 이 머리털뿐이다”라고 한숨 지으며 울먹였다. --- p.118~119 다이곤은 6만의 무리를 이끌고 요동 접경에서 의순공주를 맞았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그때만 화려했을 뿐, 이후는 불행의 연속이었다. 다이곤은 곧 변심해 용모가 아름답지 못하다며 그녀를 구박하였는데 이는 효종의 북벌 계획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것이었다. --- p.139 그러나 세종은 한확의 탄핵을 윤허하지 않았다. 세종은 “이 사람은 내가 죄줄 수 없는 사람이다”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그 후 권력의 달콤함을 맛본 한확은 혼수를 준비하던 누이동생 한계란(5차 공녀)을 선덕제의 후궁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자 계란은 “누이 하나를 팔아서 부귀가 이미 극진한데 무엇을 위하여 약을 쓰려 하오”라며 울분을 토하였다고 『세종실록』 9년 5월 1일 자는 기록하고 있다. --- p.163 그러나 중국 대륙에 강력한 통일국가가 들어서면서 마의 삼각구도가 해체되면 대륙 국가와 한반도 국가 사이에 공녀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이는 국가 간 국력 차이를 배경으로 한 갑-을 관계가 보다 명확해지며 생긴 것이다. 고려가 원나라에, 조선이 명나라에 공녀를 진공한 것은 이 같은 역사적 환경을 배경으로 성립된 것이었다. --- p.175~1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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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인 이상화는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을 이처럼 노래했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그리고 오랜 설움을 거쳐, 드디어 빼앗긴 들에도 새봄은 왔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던지지 못했던 질문이 있다. 그 질문은 이 시의 마지막을 장식했고, 안타깝게도 실제로 우리가 겪어야 했던 악몽 같은 현실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들을 빼앗긴다는 것은 단순히 들만을 빼앗긴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들에 사는 모두의 봄을 빼앗긴다는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들을 빼앗겼던 우리는 우리의 젊은 청년과 처녀들의 푸른 봄을 빼앗겨야만 했고, 그 봄은 아직도 돌려받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빼앗긴 봄에도 봄은 오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은 미완인 채로 있다. 봄조차 빼앗긴 이들을 위하여, 흉노의 땅에 끌려가야 했던 왕소군을 두고 동방규는 이렇게 노래했다. “오랑캐 땅엔 꽃도, 풀도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그러나 봄이 봄 같지 않은 까닭은 그 땅에 꽃과 풀이 자라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봄이 봄 같지 않은 까닭은 비록 드넓은 초원에는 꽃이 흐드러지고 창공엔 제비가 지저귀지만, 그 마음속에는 아직 엄동설한 같은 추위가 이어지는 탓이다. 그들은 우리의 왕소군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봄을 빼앗긴 이들이 있었던 것이 아주 근래의 일만은 아니다. 병자호란 때 봄을 빼앗긴 환향녀들과 그 이전의 공녀들 역시 들을 빼앗은 자들에 의해 봄을 빼앗겨야만 했다. 그들은 외로운 타향에서 생을 보냈고, 대부분은 거기서 생을 마감해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잊어버린 채 되돌아보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봄(見)조차도 빼앗겨야만 했다. 봄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이미 늦어 버린 지금에, 우리가 그들에게 돌려줄 수 있는 건 고향의 봄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고향의 봄(見)만큼은 내줄 수 있다. 저자는 홀로 아파야 했던 우리의 ‘봄’들을 살펴봄으로써 그들에게 봄(見)을 되돌려주고자 한다. 이 책을 읽으며 그들과 함께 아프다 보면, 고달팠던 그들의 봄도 우리 곁에 되살아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그들에게 봄을 돌려줄 유일한 길이다. 추운 이 겨울이 지나면 “꿈속에 들어와 푸르”던 그들의 산천에는 또다시 꽃이 필 것이다. 그러나 봄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봄은, 우리의 눈이 “추워한다고 덮어 주는 이불”이 될 때, 그때야 온다. 어쩌면, 타향에 끌려간 이들이 그토록 원했던 것도 고향 산천의 초목이 아니라 고향 사람들의 주목이었을지 모른다. 우리가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던 그들의 한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