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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 양장 ]
고명재 | 난다 | 2023년 05월 31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9.8 리뷰 43건 | 판매지수 14,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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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5월 31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268쪽 | 124*183*20mm
ISBN13 9791191859546
ISBN10 1191859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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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D 한마디

[스며든 사랑이 나를 먹여 살렸음을] 고명재 시인의 첫 산문집. 첫 시집으로 사랑을 받은 그가 무채색의 글을 들고 다시 찾아왔다. 온몸으로 나를 아껴주었던 사랑하는 사람을 보낸 뒤, 그 사랑을 말하기 위한 백 가지 이야기들로. 그의 몸에 스며든 사랑은 시를 낳았다. ‘밝은 것들’을 남겨준 리듬 속으로 들어갈 책. - 에세이 PD 이나영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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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순전히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고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썼던 글이다. 처음 김민정 시인을 만났던 날 그는 물끄러미 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갑자기 “명재씨는 무채색으로 글을 써보면 좋겠어요”라고 했다. 그때 사실 속으로 많이 놀랐다. 나는 비구니들이 업어서 키운 아이였으니까. 매일매일 회색빛 승복을 보면서 내 무릎은 팝콘처럼 부풀었으니까. 그때부터였다. 그 말이 귀한 씨앗이 되어 무채, 라는 말이 내 안에서 뿌리를 뻗었다. 결국 무채로 쓰다보니, 글이 아니라 사랑의 곳간만 열려버렸다.

이 글은 무채라는 이상한 세계, 이를테면 수녀복과 승복의 회색, 살 아래를 파고드는 뢴트겐의 빛, 흰 뼈의 눈-시림, 할머니의 바늘 끝, 눈사람과 숯과 솥과 우유의 세계다. 영도零度의 세계를 상상하는 것(바르트). 일상 속에 가득한 중간中間의 얼굴. 사랑하는 중음신中陰身, 그리운 사람들, 사랑과 빵과 명랑과 뽀얀 밀가루자루와 눈동자의 색채를 이루는 고요한 세계다.

가끔, 스님은 연락도 없이 과일을 한 박스씩 보내곤 했다. 뜬금없이 집 앞에 배가 주렁주렁 열릴 때 나는 아름다운 그 금빛을 모조리 기억하려다 그런 색채마저 거두는 게 사랑이라 고쳐 믿었다.

사랑은 화려한 광휘가 아니라 일상의 빼곡한 쌀알 위에 있다. 늘어난 속옷처럼 얼핏 보면 남루하지만 다시 보면 우아한 우리의 부피. 매일 산책하는 강변의 기나긴 길과 일렁대는 강물과 버드나무 줄기들.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그런 아름다운 걸 ‘무채’라고 퉁쳐서 불러보았다. 배앓이를 하듯 자꾸 보고 싶을 때 무채 무채 말하다보면 좀 나아졌다. 죽은 개들이, 인자했던 할머니 손끝이, 그렇게 건너온 저쪽, 너머의 존재와 말들이, 너무 귀하게 느껴져서 쥐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언젠가는 이 사랑도 비울 것이다. 그때까진 용감하게 사랑을 줘야지. 그럼 지금부터 이야기를 해볼까. 색을 열고 색을 삼키고 색을 쥔 채로 나를 키운 사람들의 마음 이야기.
---「들어가며」중에서

그리하여, 언제든 사라져버릴 사람을 우리는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
---「눈사람」중에서

한낮이면 할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더위사냥을 뚝 반으로 부러뜨렸다. 그러곤 말없이 곁에 와서 내 작은 손안에 반쪽을 쥐여주었다. 나란히 앉아서 사각사각 베어 먹는 소리. 달콤한 빙과로 입술은 끈적거리고. 옥수수보다 이게 낫지? 할머니는 물었고 내가 대답 없이 마주보고 실쭉 웃으면 다음날은 어김없이 옥수수를 삶아주었다. 여름은 그렇게 언제든 반으로 무언가를 잘라서 사랑과 나누어 먹는 행복의 계절. 간혹 나는 그 순간이 너무 좋아서 할머니 몰래 속으로 기도를 하고는 했다. 내 수명을 뚝 잘라서 당신께 주세요. 그렇게라도 좀더 지금일 수 있다면, 조금만 더 느리게 녹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리가 지금 이대로의 우리일 수 있다면.
---「더위사냥」중에서

부처는 신적인 존재나 초월이 아니라 비가 오면 흠뻑 젖는 우리 자체다. 나무와 풀과 지붕과 철물은 피하지 않는다. 비가 오면 강물은 고스란히 비를 맞는다. 내가 사랑했던 비구니는 생의 끝에서 병원에 가지 않고 그냥 그대로 살았다. 나는 빌었다. 스님, 제발 병원에 가요. 스님, 제발 곁에서 살아주셔요. 아무 말 없이 검지 하나를 세우고 웃는 것, 그것은 법, 그것은 진리. 살아내는 것. 풀 한 포기처럼 그저 살아내는 것.
---「돌부처」중에서

그러니까 한번은 공기가 될 뻔했었던
증기였던 쌀의 꿈. 곡물의 막바지.
---「소주」중에서

한식 레시피를 가만히 옮겨 적고 있으면 이것은 손에 관한 복음서 같다. ‘정량’이 아니라 ‘사람의 손’이 만져온 것들의 그 부피감을 온전히 믿어보는 것. 조리법이 이렇게 인간적일 수 있다니. 그래서 나는 한식이 좋다. 한의원이 좋다. 실수하거나 맥을 잘못 짚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엎질러지는 무릎이니까. 그릇 밖으로 넘치는 물결이니까.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살아간다. 잠든 엄마를 옆에서 꼭 끌어안을 때 그 부피, 그 형상, 엄마의 골격. 그 순간 나는 출렁이는 물의 마음이 되어 엄마를 위해 쏴쏴 나를 버릴 수 있다. 사랑은 언제나 부피와 질량 너머에 있다.
---「욕조」중에서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올 것이 있다. 비와 눈은 오는 것. 기다리는 것. 꿈의 속성은 비와 눈처럼 녹는다는 것. 비와 눈과 사람은 사라지는 것. 그렇게 사라지며 강하게 남아 있는 것. 남아서 쓰는 것. 가슴을 쏟는 것. 열고 사는 것. 무력하지만 무력한 채로 향기로운 것. 그렇게 행과 행 사이를 날아가는 것.
---「편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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