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자기 생각을 글로 쓰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글로 읽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천 년 전 유럽에서는 정치를 움직이는 왕후 귀족이나 교회에서 일하는 사람, 법률이나 상업과 깊게 연관된 사람 외에는 글을 읽고 쓸 수 없었다. 인류의 긴 역사 속에서 모두가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된 시점은 최근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내용이 있을 때는 그림 등의 미술 작품을 이용했다. 요컨대 옛날의 미술은 오늘날보다 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전달하는’ 기능이 강했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나 옛날 사회를 알고 싶다면 미술을 이해해야 한다. 즉, 미술사란 미술 작품을 매개로 ‘사람을 아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으로, 더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을 아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미술사는 역사학이면서 동시에 철학의 측면도 지닌 학문이다.
---「미술사를 배우면 왜 좋을까?」중에서
〈비, 증기, 속도〉는 전체가 흰빛을 띠는 뿌연 그림으로, 잠깐 봐서는 무엇이 그려져 있는지 잘 알 수 없다. 자세히 살펴보면, 화면 오른쪽에는 철교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걸쳐져 있고, 그 철교를 증기기관차가 정면을 향해 달리고 있다. 또한 왼쪽 구석에는 산으로 보이는 것과 고대 양식의 돌다리가 있고, 그 밖에는 지면과 하늘이 펼쳐진 것까지는 파악할 수 있지만 이외에는 명확하지 않다. 이 그림에서 터너는 빗속을 엄청난 힘으로 달리는 기차의 ‘속도’ 그 자체를 그렸다. 실제로는 카메라가 아닌 이상 기차가 달리는 순간을 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작품은 터너가 찰나의 순간에 자기 눈으로 포착한 이미지만을 표현하고 있다. 한순간의 사건이니, 세세한 것까지 보일 리 만무하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일련의 흐름에 따른 ‘감동’을 이미지화하게 되었다. 자연히 무엇을 그렸는지 알기는 어려워졌지만, 동시에 이 작품은 ‘속도’를 처음 그려낸 그림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비, 증기, 속도〉,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를 처음으로 그린 작품」중에서
르네상스 시기에 피렌체를 중심으로 ‘소묘야말로 모든 미술의 기본이다’라는 사고방식이 정착했다. 이후, 미술 아카데미에서도 소묘를 수업의 기본으로 중시했다. 18세기에 인기를 끌었던 신고전주의에서도 이 사상을 주장했다. 지금도 미술을 배울 때는 대부분 소묘 훈련부터 시작한다. 본래는 연습이나 밑그림의 역할이 강했던 소묘지만, 종이가 보급되고 화가의 지위가 향상되면서 17세기경부터 작품으로서의 가치가 상승했다. 그래서 훌륭한 소묘는 회화처럼 수집의 대상이 되었고, 소묘집 등을 출판하기도 했다. 유명한 소묘 작품으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고양이의 성모자를 위한 습작〉 등이 있다. 이 소묘는 완성 작품의 구도를 정하기 위한 습작이지만, 이를 바탕으로 제작된 작품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귀중해졌다.
---「모든 미술의 기초가 되는 ‘소묘’」중에서
고대 그리스나 고대 로마의 미술에서는 나체를 이상적인 미를 표현하는 하나의 모티브로 중시했다. 하지만 성도덕에 엄격한 기독교가 유럽을 지배하자, 나체는 기본적으로 금기시되었다. 예외적으로 허용된 경우는 나체라도 자연스러운 에피소드가 있는 성서의 등장인물을 그릴 때뿐이었다. 그래서 중세에서는 최초의 여성인 이브나 외전 《다니엘 전서》에 등장하는 수산나라는 여성이 목욕하는 장면을 얼마 안 되는 ‘나체화’로 그렸다. 하지만 르네상스기 이후에도 자유롭게 나체를 그릴 수 있던 것은 아니었고, 성서나 신화에 나온다는 변명은 필요했다. 앞서 설명한 19세기 프랑스 화가 마네의 〈올랭피아〉는 형식적으로는 그리스 신화의 여신을 그린 그림이지만, 창부의 나체라는 점을 노골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강한 비난을 받았다.
---「금기시하던 ‘나체화’가 허용된 경우는?」중에서
상업의 요충지 네덜란드는 유럽 최초로 본격적인 시민사회를 이룩했다. 이에 따라 문화를 이끄는 주역도 왕후 귀족이나 교회에서 시민으로 배턴 터치했다. 예술도 시민을 위한 것이 되면서 미술 작품이 일반 가정에 널리 보급되었다. 다만 시민 개개인은 왕후 귀족이나 교회만큼 부를 가지지 못했기에 좀 더 저렴한 가격에 다루기 쉬운 유채 + 캔버스 조합의 소형 회화가 미술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림 주제로서도 또한 일반 가정의 식당이나 거실을 장식하는 데 어울리는 풍경화, 정물화, 풍속화가 독립된 회화 장르로 성립했다. 군주 단 한 사람이 아니라 시민 단체를 그리는 집단 초상화가 탄생한 장소도 이 시기 네덜란드였다. 이런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렘브란트나 페르메이르, 할스, 호흐, 라위스달 등 개성적인 화가들이 활약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왜 미술사에 남을 변혁이 일어났을까?」중에서
나이가 많은 남성과 젊은 딸로 이뤄진 연인을 주제로 한 회화가 서양 미술에는 때때로 등장한다. 이 주제는 당시 유럽 사회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 유럽에서는 옛날부터 딸이 결혼할 때 기본적으로 부모가 지참금을 부담한다는 규칙이 있었다. 그 액수는 일반 서민일지라도 1천만 원에서 3천만 원 정도였다. 물론 가난한 집은 그런 지참금을 준비할 수 없었다. 그 경우 딸은 하녀나 수녀, 창부가 된다는 정도의 선택지밖에 없었다. 한편, 당시에는 다양한 직업의 길드가 있어 도시 남성은 그 길드에 소속되었다. 그 남성이 길드에서 장인 자격을 받아 가족을 부양할 만큼의 경제력을 갖추기까지는 긴 수업 기간이 있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남성의 결혼 연령은 높아졌다. 또한 여성의 출산 시 감염에 따른 사망률도 높아, 아내를 잃은 남성은 곧바로 새로운 젊은 아내를 맞이했다. 이런 사정으로,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어울리지 않는 연인은 옛날 유럽에서는 당연한 모습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연인의 그림이 많은 이유는?」중에서
천사 또한 서양 미술에서 선호하는 주제다. 회화 속 천사는 사랑스러운 어린아이의 모습부터 늠름한 청년, 또는 소녀의 모습까지 다양하게 그려졌다. 천사는 신의 의지를 인간에게 전달하는 영적 존재로, 본래는 육체도 성별도 없다. 천사라고 하면 날개가 달린 모습을 떠올리는 사람도 많을 테지만, 사실 성서에는 천사에게 날개가 있다는 문장은 단 한 줄도 없다. 그래서 고대 로마 벽화 등에 그려진 천사는 날개가 없는 인간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점차 그리스 · 로마 신화에서 날개가 있는 신들의 이미지가 혼재하게 되자, 천사도 날개가 달린 모습으로 그려지게 되었다. 특히 어린아이에게 날개가 돋아난 모습으로 표현되는 천사는 그리스 · 로마 신화 속 사랑의 신 큐피드(그리스 신화에서는 에로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날개 없는 천사에게 왜 날개를 달아줬을까?」중에서
19세기 프랑스 화가 모로는 〈프로메테우스〉라는 그림을 그렸다. 이 작품 속 프로메테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려졌다. 인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예수 그리스도를 프로메테우스와 겹쳐 보았던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16세기 프랑스 화가 장 쿠쟁(아버지)은 신화와 성서에서의 최초의 여성이자 원죄의 행위자인 판도라와 이브를 동일시해 〈에바 프리마 판도라〉라는 작품을 그렸다. 르네상스 이후, 다신교 문화인 신화가 일신교 기독교 세계에 반영되면서 생긴 내적 모순을 어떻게든 해소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이다. 그림에는 판도라를 상징하는 항아리와 이브를 상징하는 사과 가지와 뱀이 그려져 있다.
---「왜 그리스도처럼 그렸을까? 모로의 〈프로메테우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