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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지 않는 사탕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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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시선-0050이동
오영미 | 파란 | 2020년 01월 3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10.0 리뷰 1건 | 판매지수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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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1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133쪽 | 208g | 128*208*10mm
ISBN13 9791187756606
ISBN10 1187756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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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네게 줄 초콜릿을 손에 쥐고 가슴을 두근거린 게 15년 전의 일이었을까, 아니면 어제의 일이었을까? 온종일 사내 녀석들에게 두들겨 맞아 피범벅이 된 네 몸을 씻기고 엉엉 우는 너를 내 품속에 넣고 다독였던 것은 불과 몇 시간 전에 벌어졌던 일이었을까? 루시, 그 무엇도 뚜렷하지 않아, 루시. 나는 움푹하게 팬 시간 속에서 밀가루 반죽처럼 사정없이 짓이겨지고 있어. 내 다리에 친친 감긴 사슬이 보이니? 네가 그곳에서 긴 머릴 휘날리며 부드러운 밀크 초콜릿을 입에 넣는 순간에도 이 사슬은 절망적으로 길어져만 가고 있어. 제발 루시, 그렇게 공허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지 마. 어째서 너는 내 손을 잡아 주지 않는 거지? 너는 공기처럼 가볍고 투명하지만 나는 아직 무겁고 달린 것이 많기 때문일까? 하지만 곧, 나도 너처럼 가벼워질 거야. 기다려 루시. 그 자리에서.

선생님. 당신은 나를 뒤덮고 있는 이 무겁고 성가신 피부를 벗겨 줄 수 있겠지요? 한 점도 남김없이 모조리 말이에요. 루시, 사랑하는 나의 루시가 바로 저기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 선생님, 어서요! 이러다 나의 루시가 영영 달아나 버리면 어떡해요? ***
--- 「마터스」 중에서

내 감정은 양파로 이뤄진 것 같아, 라고 너는 말한다 까도, 까도 끝이 안 보여 그래서 무심코 눈물이 나 깨진 유리 조각과 사지가 뜯긴 봉제 인형이 따귀 맞고 붉어진 뺨처럼 너와 내 주위를 뒹군다 어째서 감정은 토해 낼 수 없는 걸까, 습관적으로 목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는 너는 손끝만 대도 문드러지는 연두부처럼 위태롭다 어제는 내 자궁에 타다 만 담배꽁초를 던졌지만 아마 실수였을 거야 그렇고 말고, 너는 팽팽한 활시위처럼 입술을 당기고 너의 목에 새겨진 애인의 손자국은 무섭도록 검푸르다 언제라도 너를 데려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검푸름은 깊고도 음험하게 웃는다 어느덧 알맞게 발효된 새벽이 네 눈을 부드럽게 적셔 주고 나는 너를 네모반듯하게 접는다 소용없는 짓이야! 몇 시간 전보다 훨씬 짙어진 검푸름이 나를 노려보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옷깃을 살짝 벌려 그 안에 너를 넣는다 조용히 흩어지는 너의 숨소리가 솜털을 간질이고 정수리 위로, 까면 깔수록 매운 감정이 별처럼 쏟아진다 ***
--- 「하얗고 연약한」 중에서

바닥에 떨어진 내 눈동자가 당신의 비명 속에서 으깨집니다 하지만 코를 감싸 쥘 필요는 없어요 당신의 불규칙한 생리 주기와 주저흔이 복잡하게 새겨진 여고 시절만이 약간 흐를 뿐, 고약한 냄새는 나지 않을 테니까요 당신과 눈이 마주칠 각도를 미처 계산 못 한 나의 불찰입니다 당신이 떼어 내려던 눈곱을 막 포착한 순간이었는데요 폴란드 영화였지요, 아마? 기차에 탄 여배우가 유리구슬을 가지고 놀던 장면을 기억하시나요? 나는 당신을, 그 유리구슬처럼 이리저리 돌려 보았을 뿐입니다 만약 내 눈동자가 입안에서 살살 녹을 정도로 달았다면 이런 상황까지 오진 않았을 텐데요 지금 당신은 뾰족하게 깎은 연필심처럼 진저리 치고 있지만 연필심은 언젠가 무뎌지기 마련이지요 안 그런가요? 당신이 마구 화를 내려는 찰나, 나는 눈동자를 버리는 시늉을 합니다 망가진 동그라미 따위, 세모꼴로 바꿔 끼우면 그만인 걸요! ***
--- 「매력적이고 상냥한 피핑 톰 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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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한 시들이다. 시작하고 ‘있는’ 시들이다. 말하는 시들이다. 말하고 ‘있는’ 시들이다. 보는 시들이다. 보고 ‘있는’ 시들이다. 많이들 뭐가들 나오는 시들이다. 많이들 뭐가들 나오고 ‘있는’ 시들이다. 벌어진 시들이다. 벌어지고 ‘있는’ 시들이다. 느끼는 시들이다. 느끼게 하고 ‘있는’ 시들이다. 화난 시들이다. 화가 나고 ‘있는’ 시들이다. 싸우는 시들이다. 싸우고 ‘있는’ 시들이다. 화해를 모르는 시들이다. 화해하지 않고 ‘있는’ 시들이다. 떠올리는 시들이다. 떠올리게 하고 ‘있는’ 시들이다. 만나는 시들이다. 만나게 하고 ‘있는’ 시들이다. 때리는 시들이다. 때리고 ‘있는’ 시들이다. 아픈 시들이다. 아프게 하고 ‘있는’ 시들이다. 베어 무는 시들이다. 베어 물게 하고 ‘있는’ 시들이다. 고함치는 시들이다. 고함치게 하고 ‘있는’ 시들이다. 뜨거운 시들이다. 뜨겁게 달구고 ‘있는’ 시들이다. 달리는 시들이다. 달려서 가고 ‘있는’ 시들이다. 먹는 시들이다. 먹게 하고 ‘있는’ 시들이다. 코를 감싸게 만드는 시들이다. 코를 감싸게 만들고 ‘있는’ 시들이다. 입맛을 다시게 하는 시들이다. 입맛을 다시게 하고 ‘있는’ 시들이다. 일상인 시들이다. 일상이 ‘있는’ 시들이다. 척하지 않는 시들이다. 척하지 않게 하고 ‘있는’ 시들이다. 아픈 시들이다. 아프게 하고 ‘있는’ 시들이다. 실은 건강한 시들이다. 건강을 위해 ‘있는’ 시들이다.
-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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