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재가 쪽팔리다고 한 이유를 실은 나도 알고 있다. 리코더를 불고 있을 때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 축제 때나 동아리 시간에 야외 공연이라도 할라치면 야유와 함께 같잖다는 눈길을 던지고 가는 놈들이 꼭 있었다. 그래, 나도 그 시선이 달갑지 않다. “그렇다고 헌신짝처럼 리코더를 던져 버리다니!”
효재의 배신에 도무지 화가 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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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시합을 하려고?”
정빈은 무심한 목소리로 선생님의 물음에 답했다.
“철인 대회요. 거기서 이기는 사람이 동아리실 쓰기.”
그 말을 듣자마자 선생님은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니?”
“왜요? 이것만큼 정정당당한 게 어디 있다고.”
“너 인마, 그러는 거 아니야. 누굴 상대로 뭘 하겠다고?”
최정빈보다 선생님의 반응이 더 불쾌했다. 내가 왜? 뭐가 어때서?
“대한이가 달리면 얼마나 달리겠니? 이건 뭐 다윗과 골리앗 싸움도 아니고.”
역전의 명수로 불리는 다윗이 오더라도 이기지 못할 승부라 이거지? 오기가 생겼다.
“할 수 있어요.”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나 싶었지만 한 번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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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물었다. 나는 왜 다르냐고. 엄마도 B형, 아버지도 B형인데 어째서 나는 A형이냐고. 두 사람 사이에서는 형처럼 O형은 나올 수 있어도 나처럼 A형은 나올 수가 없다고.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그해 겨울이 내 인생의 겨울이 될 줄 알았다면 차라리 그 질문을 하지 말 걸 그랬다. 이후 나는 영원히 봄이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 겨울의 긴긴 밤을, 불면증에 시달리며 이제까지 보내고 있다. 그 빌어먹을 비밀을 모르고 있었다면 봄이 왔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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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줘. 힘줘. 다 왔어. 다 왔어.”
형의 호흡도 가빠졌다. 마지막이다 하는 심정으로 온 힘을 쏟아부었다. 이러다가 진짜 어디 한군데 터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몸이 부풀어 올랐다.
마침내, 턱 끝이 철봉 위를 정복했다. 그 순간 힘이 풀려 손을 놓아 버렸다. 나는 밑에 서 있던 형 위로 무너지듯 쓰러졌고, 형은 그런 나를 붙잡아 바닥에 착지시켜 주었다.
“해냈어!”
감격의 외침을 터트리며 형은 나를 꼭 껴안았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 먹먹한 귀, 언제 흘렸는지 모를 땀으로 이마와 등은 흥건했고 손바닥은 119를 불러야 할 정도로 뜨거웠다. 팔은 알통이라도 생겼는지 빵빵해졌다.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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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런 취급 많이 당해 봐서 안다. 리코더를 분다고, 오른쪽 다리가 쭈글쭈글하다고, 자기들은 들키지 않으려고 곁눈질하듯 바라보지만 나는 다 느낀다. 그들의 불쾌한 시선을.
“걔들이 우주에 대해서 뭘 안다고. 티끌 같은 놈들. 민들레보다도 못한 놈들이야, 그 자식들.”
윤서는 대꾸하지 않았다. 밖에선 다시 축제가 시작되었나 보다. 소란스러운 가운데 동아리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윤서가 입을 열었다.
“나 냄새나요.”
“무슨 소리. 아니야, 절대.”
“나, 빅뱅과 같은 확률로 태어났어요. 바다를 건넌 사랑의 결실이라고요. 지들은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항의하듯 소리치던 윤서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어깨가 들썩이더니 울음을 삼키는 숨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위로해야 할까.
“예뻐.”
왜 하필 지금일까. 타이밍하고는. 나도 모르게 내 입이 진심을 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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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덩!
거품 같은 물보라가 일며 눈앞이 흐려졌지만 당황하지 않고 물속으로 깊이 잠수해 들어갔다. 금세 시야가 확보되며 물장구를 치는 다른 선수들이 눈에 들어왔다. 몸이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자 나는 호흡을 길게 들이마시며 빠르고 유연하게 팔을 저었다. 이번에는 물 같은 거 마시지 않았다. 컨디션도 나쁘지 않고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한 호수의 모습도 마음에 들었다.
잘하면 오늘 일 내겠는데? 느낌이 좋다. 저 멀리 정빈의 넓은 어깨가 보인다. 기다려라, 최정빈. 혼자 질주하게 놔둘 순 없지. 팔에 힘을 주어 물살을 갈랐다. 은빛 물결을 가르는 인어처럼 나는 빠른 속도로 정빈을 향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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