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는 노구의 몸을 쿨럭거리며 머리 풀고 있는 삼나무숲을 지나는데, 제법 큰 미석에 어금혈봉표(御禁穴封標)가 보인다. 1890년(고종25) 어명으로 다솔사 경내에 혈(穴, 묏자리)을 금지한다는 표석이다. 봉명은 군왕(君王)을 상징하는 봉황이 비약하는 울음을 울고, 다솔은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다스린다는, 풍수상 발복이 크게 일어난다는(성한 곳임을 뜻하는)곳이다. 하여 사세가 미약하던 조선 후기에 이곳에 묘를 쓰겠다는 권력자가 잇따라 나타나자 어명으로 그것을 금지한 것. 잠깐 차에서 내려 탐방하고, 다솔사 주차장에 도착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단이라는 다솔사 계단을 오른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찻집이다. 다솔사 그 찻집. 돌부리에 발을 다쳐 창가에 앉아 덧없는 세월을 마신다. 지나간 사랑은 애틋한 것. 7월 그 찻집에 가면 왜 한숨이 나는 것일까.
다솔사에는 ‘다섯 개의 멋진 밭’이 있다. 솔밭, 차밭, 대밭, 명당에 부는 바람밭, 살아온 날들이 그리움이 되는 그리움의 밭. ‘차반향초(茶半香初)’, 송나라 시인 황산곡의 시구(詩句)가 쓰여있다.‘정좌처다반향초(靜坐處茶半香初) 묘용시수류화개(妙用時水流花開)’, 고요히 앉은 곳에서 차를 반나절이나 마셔도 향기는 처음 같고, 미묘한 작용을 할 때 물이 흐르듯 꽃이 핀다는 뜻이다. 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솜씨다. 그 미려한 글과 글씨에 감탄한다.
장군대좌혈의 명당인 절 마당에 들어선다. 우담바라가 피어 유명했던 대양루를 살핀다. 우담바라는 깨달은 자의 말씀, 즉 부처님 꽃이다. ‘꽃을 집어 들고 미소 짓는다’는 그 꽃이다. 3천 년 만에 한 번 핀다는 우담바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은화식물이다. 비유하면 부처가 태어날 때 이 꽃이 한 번 피며, 부처의 법문을 듣는 것은 이 꽃을 보는 것과 같아 부처와 만나는 인연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이다.
- 문학의 산실 안심료
바로 옆 안심료 안마당으로 간다. 여기에 우뚝 서 있는 황금편백나무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한용운 선생의 회갑기념으로 열다섯 그루를 심어 지금은 세 그루가 남았다. 한용운 선생이 독립선언문의 초안을 작성하고, 김동리가 불후의 명작 ‘등신불’, ‘바위’를 집필한 곳. 효당 최범술 스님이 현대다도의 문을 연 곳. 김범부, 김법린, 변영만, 변영로, 변영태, 박영희 등 석학들이 두루 거쳐간 요사채인 안심료. 바람처럼, 구름처럼, 거쳐간 이들의 정신을 활활 태우는 황금편백나무의 꺼지지 않는 불이 내 가슴에도 옮아붙는다.
이곳에서 12년간 머물렀다는 한용운 선생은 항일 비밀결사단체인 만당(卍黨)을 조직하여 일제 식민불교에 대항해 불교혁신운동을 하였다. 불교를 나타내는 만(卍)자는 회전을 뜻한다. 우주는 회전으로 가득 차 있다. 지구는 자전하며 공전하고, 태양계도 공전하고, 은하계도 공전한다. 말하자면 우주는 온통 돌고 돌면서 존재하는 것이다.
안심료 뒤뜰로 들어가 다솔사 차밭을 구경하고 나온다. “말할 때 말하고, 침묵할 때 침묵하는 입아, 입아 그렇게만 해다오”란 글이 걸려있다. 곰은 웅담 때문에 죽고 사람은 혀(입) 때문에 죽는다는 말이 기억나 무심결에 웃음을 흘린다.
대웅전으로 건너간다. 부처님이 안 계신다. 대웅전 뒤편, 부처님진신 사리탑이 있다. 법당은 그냥 예배하는 장소다. 법당에서 염불소리 들린다. 황금편백 이파리 같은 염불 소리가 7월의 허공에 꽃비를 뿌린다. 몸이 있고 감정이 있으면 벗어날 수 없는 사랑과 미움의 투사심리, 꽃비에 젖어 화엄으로 바뀐다. 법열의 하얀 지느러미로 헤엄쳐 황금편백 흔드는 바람의 길. 느끼고 보니 7월의 바람, 염불 소리였으며 만해 한용운님의 한숨인가.
고통이 있는 사바세계 건너 고요한 기쁨 있는 적멸보궁으로 간다. 적멸은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의 적멸이다. 번역해 본다. 태어나고 사라지는 것, 현실의 법이네. 당신의 마음속에 만들고 없애고 하는 허상을 짓지 않으면, 고요의 기쁨 누리는 것을. 이 법의 구절 타고 법당 뒤 진신사리탑을 돈다. 2천500년의 숨결로 살아있는 영롱한 석가의 뼈 108과를 모신 진신사리탑을 돈다. 시곗바늘 방향으로 세 번 돈다. 한 가지 소원을 이룬다고 한다. 탐방객들이 모두 돈다. 지금은 그래도 기도와 수행이 통하는 시대다.
인류의 잔인성과 파괴성이 절정에 달하고, 인간이 그 인간성을 잃어 버려 자연으로부터 채찍을 맞는 시대가 곧 올지도 모른다. 기도와 수행이 천지에 닿지 못하는, 신에게 닿지 못하는 시대가 오면 지구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이 현재라는 밥을 꼭꼭 씹어서 깨달아야 한다. 더 이상의 파괴와 잔인함은 안 된다고.
- 푸른 이끼의 호소
산길이 아름답다. 우리는 살아있는 길로 간다. 나뭇잎 뒤에 핀 연주홍 야생화가 살아있다. 온통 천지가 살아있다. 모처럼 깊은 잠에서 깨어난다. 몽교일여다. 꿈과 현실이 만난다. 그 쓰잘데없는 개꿈을 이루겠다고 얼마나 부질없이 시달렸던가. 산그늘에서 휴식을 취한다. 아, 산속이 적멸이다. 어질병이 생긴다. 그 7월의 녹음 짙은 환상의 숲길, 잘 다듬어진 아름다운 길을 걷는 것은 방랑의 자유로운 멋이다.
7월의 나뭇잎 그늘을 지나 보안암에 선다. 보안암은 남성 출입 금지구역이다. 보안암 석굴에서 삼배를 올린다. 석불의 얼굴은 여느 시골 머슴같이 투박하고 다정하다. 기쁘게 보면 기쁜 얼굴이고, 슬프게 보면 슬픈 얼굴이다. 돌장승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이다.
석굴 안에는 두 개의 촛불, 하나의 빈 등, 이름 모를 붉은 꽃다발, 공양 그릇, 하나의 수박이 멋진 화폭을 그리고 있다. 도깨비 귀신문양의 석단 위에 앉은 부처님, 검은 흙 묻은 저 김매기 품앗이 얼굴,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깨달은 몸에는 항상 빛이 난다. 말하자면 깨달음은 빛이다.
석가모니불 좌우에는 16나한상이 안치되어 있다. 애석하게도 오른편 1구는 사라져 버렸다. 사라진 나한은 사하촌에서 포교당을 열고 있는지 모른다. 고려 말에 건축했다는 널찍한 널돌로 쌓은 고려석굴은 질박하다. 석굴 안에서 비구니 한 분이 불공을 드린다. 부처님을 그리는 염불 소리가 푸른 이끼에 물을 먹인다. “사찰 주변의 이끼를 떼어가지 마세요. 마음속에만 담아 가세요”라는 팻말이 보인다. 그 점판암 자연석에 법문처럼 푸른 언어로 살아가는 이끼마저 사람들은 떼어가고, 저렇게 이끼가 모두 사라지는 날이 오면 당신도 함께 사라지리라.
우리는 돌아가면서 근처에 있는 떡바위에 올라가 마치 장군의 투구를 닮은 봉명산과 만점과 무고리 마을, 저 멀리 아스라한 산하의 진풍경을 본다. 경맥이 뚫리는 것 같다. 누가 뒤에서 불러주면 돌아보고, 전설처럼 하나의 바위가 될 텐데. 그 아름다운 경관에 거듭 감탄한다.
다시 보안암 방향으로 돌아 나와 왔던 길을 되돌아 봉명산 정상에 올랐다. 돌아 나와 정상에 오르는 것이 더 쉽다. 402m의 산 위 팔각정자에서 비토섬이 있는 사천바다를 바라본다. 7월의 해무를 이고 바다는 천 년의 사랑으로 출렁이고 있다. 하늘이 내게 천 년을 빌려준다면, 저 바다를 사랑해 볼까. 봉황이 운다는 산, 사람은 사랑으로 우는데 봉황은 구만리 하늘을 날기 위해 운다.
이제 다솔사로 귀환한다. 솔숲 그늘에 초면의 야생화가 은은한 은빛을 토하고 있다. 마음을 여민다. 절집은 문이 없다. 그러나 아무나 다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옷깃을 여며야 부처의 땅에 이를 수 있다.
---「경남 사천 봉명산 다솔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