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의 또 다른 미래] 새롭게 도래한 한국 단편소설의 현재를 마주할 수 있는 <트리플 시리즈>, 그 첫 시작을 박서련 작가가 장식했다. 소설 속 청년들은 혹독한 현실과 추운 겨울을 온몸으로 감각하며 자신이 "얼마나 엉망인지를 숨김없이" 털어놓는다. 궤도를 이탈한 청년들의 내밀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 - 소설MD 김소정
예라는 글자는 예의 이름 끝에 들어갔다. 내 이름 앞 글자인 서 자와 같은 자였다. 미리 예豫, 펼칠 서豫. 똑같은 글자가 내 이름에서는 서로, 그 애의 이름에서는 예로 바뀌는 것을 우리는 신기하게 여겼다. ---「다시 바람은 그대 쪽으로」중에서
나 지금 서울이야. 갑자기 무슨 소리야? 서울은 나한테 도시가 아니고 상태인 것 같아. 겨울이 와도 나는 서울. 겨울이 가도 나는 서울. 여름도 가을도 봄도 없이 나는 서울이야. 그러다 예는 문득 나를 보며 물었다. 너도 서울이야? ---「다시 바람은 그대 쪽으로」중에서
마침내 나는 예를 만난다. 이루어지기를 너무나 바란 나머지 소설로까지 쓴 바람이 마침내 이루어지고 있음을 나는 고백한다. 내가 얼마나 멀리 와버렸는지, 얼마나 엉망인지를 숨김없이 털어놓는다. ---「다시 바람은 그대 쪽으로」중에서
이별은 핸드폰 메시지로 통보받았다. (……) 처음에는 이별조차 문자로 통보한 그 누군가의 무심함이 정말 원망스러웠으나 따지고 보면 애인이란 역시 일종의 비정규직이므로, 가능한 처우였다는 결론에 곧 다다랐다. 그때, 나는 드디어 완전한 백수로 거듭난 것이었다. ---「호르몬이 그랬어」중에서
모친과 나 사이에 어떤, 호르몬의 고리가 있는 것 같았다. 지구와 달 사이에 작용하는 여러 가지 힘들이 두 별의 거리가 더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게 유지해주는 것처럼 모친과 나의 호르몬들이 보이지 않게 연대하고 경쟁하기 때문에 둘의 생리 주기에 사이를 두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 고리에 아비는 어떤 힘도 행사할 수 없었다. ---「호르몬이 그랬어」중에서
모친의 애인을 알게 된 뒤로 모친과 아비 사이의 일을 상상하는 것은 죄책감이 들면서도 멈출 수 없는, 일종의 레포츠가 되었다. 아직 생리가 끊이지 않은 모친은 지금도 아비와 섹스를 할까? 한다면 며칠 주기로 한 번에 몇 분씩 할까? ---「호르몬이 그랬어」중에서
담요 두 채 펴면 꽉 찰 방 가운데 이불을 펴놓고 엎드린 너. 손을 많이 타 책등이 너덜너덜해진 불가사의 도록. (……) 그런 곳에서 지내면서 너는 가장 아름다운 무덤이라는 타지마할, 지상 최대의 무덤이라는 피라미드, 세계 유일의 수중릉이라는 문무대왕릉 같은 것에 매료되었다. ---「총塚」중에서
너는 난초당 42호에 보관되어 있었다. 매점 주인이 20분은 족히 걸릴 거라던 유리문 앞에 나는 12분 만에 당도했다. 건물 안은 바람이 들지 않지만 온도는 오히려 바깥보다 낮은 듯했다. 씨발 목욕탕 사물함도 이것보다는 커. 이토록 춥고 비좁은 곳에서 허술한 자물쇠 하나만 믿고 지냈을 너를 생각하니 화가 났다. ---「총塚」중에서
땀이 뱄다 마르기를 반복한 등판에는 소금 결정이 눈꽃처럼 맺혔다. (……) 버리지 못한 네 물건들을 머리맡과 발치에 쌓아두고, 이집트 왕의 시신처럼 양팔을 교차해 내 어깨를 붙든 채 새우잠을 잤다. 좁아서가 아니라 껴안을 사람이 없어서. 껴안을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고 좁아서. 혹은 둘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