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아웃’은 패션 용어로 속을 뒤집다라는 뜻. 겉과 속을 뒤집어 입도록 만들어 안팎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옷입니다. 꿰맨 자국이 밖에 보이기도 하고, 커다란 주머니를 등에 매달기도 하지요. 시가 그렇습니다. 마음의 겉과 속을 뒤집어, 슬픔의 찬란한 바느질을 보여주지요. 그렇게 시인이 위대한 이유는 슬픔과 약함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때는 저도 마인드 컨트롤에 매달렸습니다. 화가 나거나 우울할 때, 그 끓어넘치고 추락하는 감정을 평균으로 다잡기 위해, 상처 입은 마음을 부단히도 다그쳤지요. 이젠 그러지 않습니다. 불안하고 외로운 저녁엔, 시를 읽습니다.--- p.5
엄마인 나는 아이의 산, 오두막, 밥공기, 밥알, 사탕, 별, 꽃, 물….
타인을 위해 둥글어진다는 것. 작은 타인을 내 몸으로 껴안고 굴러간다는 것. 그것은 참으로 무서운 진리더군요. 가끔씩, 새벽이면 또르르 눈물이 떨어져 내렸습니다. 오늘 하루도 멀리까지 굴러가기 위해, 굴러가서 먹이기 위해, 낙석을 피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몸을 동그랗게 말아야지, 뒹구는 돌이 되어야지. ‘응, 응, 응’, ‘예스, 예스, 예스’.--- p.18
그때까지 다정했을 모녀의 산책길은, 먼저 영정 사진을 찍고 계신 어르신 앞에서 급격히 반전되지요. ‘언젠가’라는 아득한 시제가 훅 눈앞에 다가온 것입니다.
‘나도 저렇게 하는 거냐’라고 흠칫 놀라던 어머니는, 사진사가 사진을 찍기 위한 구체적인 행위로 검은 보자기를 뒤집어쓰자, 급히 말씀하십니다. ‘나 웃으까?’
‘나 웃으까?’…
좌표 없이 허둥대는 당신의 물음표에 가슴이 내려앉습니다.
어떤 자식이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까요.
만약 당신이 웃으신다면, 그 웃음의 소유권은 어머니에게 있을까요, 자식들에게 있을까요.
시인은 아무 말도 못한 채 돌아오는 길에 속엣말을 합니다.
‘웃지 마세요 당신’이라고.--- p.42
아! 일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그럴 땐 부모님의 부고 소식을 들은 직후 무대에 올라가 남들을 웃겨야 했다던 코미디언의 일화가 생각납니다. 그 코미디언이 결국 박수를 받지 못했다고 해도, 눈물을 참고 마감을 사수하려던 데스크의 노력이 밀린 인쇄 공정 때문에 물거품이 됐다 해도, 배변 구별법이 전문가의 오류로 독자들의 항의 엽서를 받았다고 해도, 그들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데 안도감을 느낄 것입니다.
그것이 일의 신성함이지요.
할 일이 있을 때는 죽음도 생각하기가 어렵습니다. 나 또한 몇 년 전 배우 박해일을 인터뷰하러 가던 아침에 고속도로에서 차가 전복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날 뒤집어진 차에서 기어 나와 전철을 타고 촬영장으로 향했습니다. 모든 일정이 다 끝난 오후가 돼서야, 정신을 놓고 강남 대로변에서 병원을 찾아 헤맸지요. 대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그토록 일에 매달리게 하는 걸까요.--- p.90
30년이 지난 후, 이 시를 읽어보니 이제는 그 물리적 격리에 비통한 마음보다 그냥 ‘그렇구나, 그렇구나’ 고개를 주억거리게 됩니다. 살아보니 ‘삶은 작별로 완성된 집’이 아니던가요.
살아보니, 너와 나는 헤어질 걸 알면서도 사랑합니다. 떠날 걸 알면서도 추억을 쌓지요. 태어났기에 끈기 있게 웃으면서 무덤까지 걸어갑니다. 철자법을 익히듯 내가 만났던 세상과 ‘작별하는 절차를, 방법을, 말을’ 하나씩 배워가면서 말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아름다운 자연, 아름다운 인생, 아름다운 정, 아름다운 말’을 입속에 넣고 되뇌자면, 그 아름다움이 너무 아름다워, 쉬 발길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p.113
저 또한 시인만큼이나 소심한 사람. 미용실에서 헤어스타일이 맘에 안 들어도 불평 한마디 못하고, 후배가 정중하게 인사하지 않으면 밤새 잠을 못 이룹니다. 그러나 소심하기 때문에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소심하기 때문에 타인의 마음을 더욱 배려하려고 했고, 소심하기 때문에 매사에 수십 가지 상황 변수를 고려했고, 소심하기 때문에 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이렇듯 소심함은 때론 유치하고 한심한 모습으로, 때론 순진하고 섬세한 모습으로 다양하게 변주되어 일상에 나타납니다. 섬세하고 복잡하고 끝없이 출렁이는 마음 근육을 가진 우리 시대 소심증 환자들에게 위로가 되는 시, 제목마저 싱그러운 「사과 없어요」--- p.173
‘눈물의 시인’으로 유명한 신철규 시인의 시입니다. 그는 이 시의 한 구절에서 따온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를 제목으로 첫 시집을 냈지요. 수록된 64편의 시 대부분에 울음의 습기가 가득한데, 그중 「눈물의 중력」이라는 시에는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바닥 모를 슬픔이 너무 눈부셔서 온몸이 허물어질 때
어떤 눈물은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밖에 없다
우리 몸의 80퍼센트는 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생명을 이어가는 데 물이 그만큼 소중하다는 거지요. 지구의 80퍼센트도 바다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저는 캄캄한 밤에 갇힌 것 같은 슬픔의 나날이 이어질 땐, 빛 한줄기 스며들지 않는 심해를 느리게 헤엄치는 얼굴 없는 바다 생물을 생각합니다. 밤은 밤이라서 밤이고, 낮도 밤과 다름없어 밤이었을, 기약 없는 바다 생물의 시간을 생각합니다. 매일 밤 그들이 뜬 눈으로 흘린 눈물이 모여 파도가 되고 해일이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p.206
황지우의 「겨울산」 첫 구절 ‘너도 견디고 있구나’를 읽으면서 권부문의 사진 ‘겨울산’이 떠올랐습니다.
너도 견디어라, 나도 견딜 테니.
그리하여 그 산이 견딘 눈의 무게만큼, 바위의 차가움만큼, 나무의 뼈저림만큼, 굴러 떨어지는 돌멩이의 체념만큼, 해 질 녘 눈보라 속을 뛰어가는 토끼의 절박함만큼… 얼어붙은 겨울산이 그랬듯이 나도 묵묵히 삶을 견뎌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 p.2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