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21년 08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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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460쪽 | 818g | 150*220*30mm |
ISBN13 | 9791155401903 |
ISBN10 | 1155401905 |
발행일 | 2021년 08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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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460쪽 | 818g | 150*220*30mm |
ISBN13 | 9791155401903 |
ISBN10 | 1155401905 |
감사의 말 들어가는 글: 삶이라는 질문은 정답이 아닌 표현을 기다린다 1장. 생각할 수 있는 세계 중 최악의 세계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1788~1860 삶의 참을 수 없는 비참함 | 끔찍한 소음이 들리는 철학 | 세계의 진정한 본성과 우리 존재의 핵심 | 고통과 죽음 속에서 신뢰할 만한 위안 | 죽어도 죽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이유 | 의지를 부정함으로써 존재하지 않는 법 | 최악인 동시에 최선인 세계 2장. 나로 존재하지 못한다는 절망 쇠렌 키르케고르 1813~1855 ‘기독자’가 된다는 것 | 심미적 생활양식, 삶을 즐긴다는 것 | 윤리적 생활양식, 삶을 선택한다는 것 | 종교적 생활양식, 부조리에 대한 믿음 | 절망, 죽음에 이르는 병 | 침묵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되는 법 3장. 서로 복잡하게 뒤엉킨 신의 공포와 경이 허먼 멜빌 1819~1891 삶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환영 | 설선 위에는 심장이 없다 | 해수면 아래 헐떡이는 호랑이의 심장 | 방울뱀의 치명적 아름다움 | 진정한 불의 자식처럼 | 합리적으로 광대 노릇하기 4장.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면 그곳은 지옥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1821~1881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 | 인간은 이를 죽일 수 있는가? | 2 곱하기 2는 5 |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가능성 | 바보 성자가 발견한 아름다운 것들 | 영원은 구석구석 거미가 득실거리는 곳 5장. 피할 수 없는 모든 것의 끝 레프 톨스토이 1828~1910 어떻게 살 것인가? | 우리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기만을 기다리는 죽음이라는 용 | 탈출구는 어디에 있는가? | 믿음, 내면의 판사가 하는 말을 듣는 능력 | 부서지기 쉬운 삶의 의미 | 두 종류의 사랑 6장. 위험한 삶이 가져다주는 즐거움 프리드리히 니체 1844~1900 “신은 죽었다” | 말인의 행복에는 딱히 가치가 없다 | 선악을 넘어선 탁월한 파괴자 | 연민이라는 마지막 질병 | 성스럽고도 건전한 이기심 | 모든 좋은 것은 웃고 있으니, 무거움의 영을 피하라 | 무슨 일이 일어나든 지금의 삶을 사랑하라 7장. 구체적인 세계의 극적 풍성함 윌리엄 제임스 1842~1910 ‘의미 있음’의 실질적인 현금 가치 | 울타리 밑에 숨겨둔 뼈다귀가 가져다주는 황홀감 | 건강한 정신과 병든 영혼 | 자정의 고뇌에서 대낮의 믿음으로 | 신앙을 가질 권리 | 위험 없는 세계의 끔찍함 8장. 진정 삶을 살았다고 할 만한 유일한 삶 마르셀 프루스트 1871~1922 죽음을 극복하는 예술의 위력 | 사랑이라는 끔찍한 속임수 | 욕망이 불러일으키는 역설 | 끊임없이 죽어가는 자아 | 같은 강물에 발 두 번 담그기 | 보이지 않는 것을 탐구하는 사람들 | 시간 너머로 존재하는 법 9장. 언어의 경계를 넘어서려는 가망 없는 투쟁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1889~1951 별이 되고 싶었지만 지상을 벗어나지 못한 | 철학의 본질과 용도 | 삶이라는 수수께끼와 수수께끼의 소멸 | 이방인 같은 삶 |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과정으로서의 윤리학 | 언어의 의미는 살아가는 방식 속에 있다 | 의심할 수 없는 것들 10장. 세계의 부드러운 무심함 알베르 카뮈 1913~1960 원하는 것과 얻는 것 사이의 괴리 | 자유가 부여한 나쁜 소식과 좋은 소식 | “그래서 어떡하란 말인가?” | 의미 없는 세상에서 의미 창조하기 | 부조리는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 | 삶이라는 한계 안에서 반항하라 나오는 글: 요약할 수 없는 음악 작품 주석 |
모든 사람이 처할 운명이지만, 모든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운명, 죽음에 대해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우리는 끊임없이 묻는다. 인간은 태어난 이래 지금까지 삶과 죽음에 의문을 가졌다. 오랜 시간 수많은 철학자 및 사상가들이 고뇌하고 연구하고 답을 찾기 위해 고군부투해 왔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쉽사리 답을 낼 수 없었던 주제다. 누군가 나에게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삶과 죽음에 대해 묻는 것과 마찬가지로 쉽사리 답을 낼 수 없는 동일선상의 물음이다.
저자 미하엘 하우스켈러의 <왜 살아야 하는가>의 원제는 <The meaning of Life and Death> 이다. 삶과 죽음의 의미를 10인의 사상가를 통해 알아가는 이 여정이 우리에게 어스름한 힌트를 던져준다. '삶과 죽음은 바로 이거야' 라는 명확한 답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철학이다. 그렇기에 철학이 어렵고도 재미있다.
우리는 이 책에서 5명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쇠렌 키르케고르, 프리드리히 니체, 윌리엄 제임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와 3명의 소설가 (허먼 멜빌, 마르셀 프루스트, 알베르 카뮈), 2명의 소설가 및 사상가(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레프 톨스토이) 를 만날 수 있다. 낯설지 않은 이름들이라 무언가 친숙하게 다가온다. 10명의 사상가로 부터 깊고도 심오한 삶과 죽음에 대한 각자의 이야기를 펼친다. 그 중 유독 내 마음을 뒤 흔드는 세 명의 사상가들에 대한 내용을 아래에 살짝만 적어봤다.
우리의 삶이 무의미해 보이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벌어지는 일에는 어떤 종합적인 계획이나 합리적인 구상도 반영돼 있거나 실현돼 있지 않다. 그 대신 세계의 중심에는 맹목적이고 강력하지만 전적으로 우둔하고 목적도 없는 분투가 이루어지고 있다. 계속해서 존재하는 것 외에는 무엇을 바라는지도 모르는 채 하염없이 바라기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세계에는 이런 사실만이 반영돼 있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p43)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인간이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고통과 고난은 삶 곳곳에 만연하고 삶의 본질이라는 사상은 쇼펜하우어 철학의 가장 핵심이다. 고통은 언제나 올 수 있는 것이기에 미리 준비하고 감내해야 한다고 말한다. '생각할 수 있는 세계 중 최악의 세계'라는 부제목이 쇼펜하우어가 매우 부정적 사람으로 비춰질 수 있겠다. 하지만 이런 시각이 오히려 우리의 삶을 희망차고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돕는다. "삶이 왜 이리 무의미한 것 같지?" 라는 의문에 원래 삶이 무의미 하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삶을 더 바람직하게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다. 고통이 가득한 세상에 '행복'은 삶의 목적이 아니다. 즉, 행복하지 않음이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계가 원래 이렇게 고통스럽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그 고통이 그리 고통스럽지 않게 된다. 쇼펜하우어 철학을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포인트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설명한다. "마찬가지로 나는 죽음이라는 용이 나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려고 여지없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온전히 이해한 채 삶이라는 나무에 매달려 있다. ... 물론 나에게는 끔찍한 진실로부터 눈을 돌리게 만들어주는 꿀 두 방울이 있다. 바로 가족을 향한 사랑과, 내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글쓰기를 향한 사랑이다. 하지만 이조차 더 이상 달콤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레프 톨스토이 (p194)
"삶은 뛰어난 사기꾼으로 온갖 유혹을 통해 죽음이라는 진실을 숨기려고 애쓰고 있다"고 톨스토이는 <고백록>에 표현했다. 레프 톨스토이 편에서는 동부유럽 우화 '죽음이라는 용'을 통해 삶과 죽음을 빗댄 표현들이 매우 공감된다. 나의 삶에서 달콤한 꿀 두 방울은 무엇일지를 생각해 본다. 톨스토이와 마찬가지로 가족을 향한 사랑이 나에게도 역시 꿀 한 방울이 되겠으나 나머지 한 방울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니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다. 삶과 죽음을 이해하는 것과 더불어 또한 중요한 것은 이 생을 살아가면서 나에게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해 아느냐 모르느냐는 매우 큰 차이를 가져 온다고 생각한다. 한 편으로는 우리의 삶이 이 꿀을 찾아 떠도는 여정이 아닐까란 생각도 들었다. 그저 나뭇가지에서 버티다보면 용이라는 죽음이 기다릴 뿐이다. 이 삶은 달콤한 꿀을 맛보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과정이다. 생각만으로도 힘들고 고달프다. 이런 저런 참 많은 생각이 들게하는 우화다.
신의 죽음은 인간이 스스로를 재창조할 기회를, 더 고등한 형태의 인간으로 소생할 기회를 주었다. 신의 죽음은 곧 우리 인류의 부활이다. (중략) 확실성을 갈망하지 않는, 안전망이 필요 없는 자유로운 영혼이 돼야 한다. 오히려 자신이 누리는 자유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에 기뻐하면서 가능성만을 즐기는 영혼이 돼야 한다. 삶이 무엇을 내놓더라도, 심지어 심연의 끝자락에 있더라도 춤을 출 줄 아는 자유롭고 쾌활한 영혼이 돼야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p236)
살면서 던지지 않을 수 없는 질문들이 있다. 철학이나 문학을 공부해서도 아니고 무언가 사유가 깊어서도 아니다. 그저 살면서 문득, 혹은 절실하게 던지게 되는 질문이 있다. 여기 그 질문을 제목으로 삼아 눈길을 확 끄는 책이 있다. 마치 프루스트가 홍차와 마들렌에서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내듯이 말이다. 원제는 죽음과 삶의 의미이지만 그것 또한 쉽사리 지나치기 힘든 단어들이다. 저자가 말한 대로 음악과 같은 책, 교향곡 그중에서도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연상시키는 이 책을 만난 것은 이 가을의 선물이다. 봄, 여름 내내 자아와 삶이라는 주제에 푹 빠져 수행자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온 내게 가을은 이 과실을 툭 던져주었다.
팬데믹이라는 상황은 혼자 있는 시간을 늘려주었고 그래서 ‘나’에 집중할 시간이 갑자기 폭발적으로 많아졌다. 예상치 못한 시간들이 주어짐은 무언가 다른 세계, 시간 너머의 세계를 탐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추상적인 질문, 답을 구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이와같은 내용의 고뇌를 미리 했던 사상가들로부터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책, 혼자서는 소화하기 힘든 내용들을 발췌하고 밑줄쳐주며 조곤조곤 설명해주되 설교하려 들지 않는 이 나침반 같은 책을 발견하였다. 유레카~
삶과 죽음, 신앙과 과학, 철학과 문학의 대립적인 주제들이 읽다보면 구분이 없어진다. 철학이란 논증의 방식으로 객관화하고 문학은 감정이입으로 주관적 사태로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더 큰 주제 앞에서는 구별의 의미가 없어진다. 신앙이란 죽음을 두려워하는 나약한 인간이 위안을 얻고자 만든 것이며 그것을 믿지 않는 이들이 과학을 앞세워 현실을 지키려한다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는 그 둘이 이미 섞여있는 듯하다. 삶과 죽음의 문제는? ‘우리는 끊임없이 죽음을 맞이하고 새로운 인간으로 부활하기를 반복한다. 우리의 자아는 몇 번이고 죽었고 다시 새로운 자아로 대체됐다’고 프루스트는 말한다.
5명의 철학자와 5명의 문학가 모두 10명의 선구자들이 등장한다. 그 존재만으로도 눈부신 열 명의 등장인물들이 각각 다른 이야기를 하지만 읽다보면 자꾸만 기시감을 느끼게 한다. 내 기억에 문제가 있나? 그 중 하나인 윌리암 제임스의 말에 따르면 기억은 끊임없이 조금씩 유실된다고 한다. 무언가를 기억할 때는 기억 그 자체가 아니라 기억한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말과도 같다. 그것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소설을 통해서 한 말과도 같다. 저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연관성이 없는 것 같은데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서로 같은 것과 다른 것을 찾는 것이 이 책을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이들은 삶을 혹은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어떻게 받아들였고 또 어떻게 행동하였는지를 말이다. 톨스토이나 비트겐슈타인처럼 극단적으로 행동한 이도 있고 그저 덤덤히 그러나 강렬하게 살아간 이도 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살아야 한다는 건가? 저자는 답을 주지도, 관여하지도 않는다. 그저 알맞은 사람과 이야기를 툭 던져놓고는 들어보라고 한다. 그러나 눈치 빠른 사람들은 느낄 것이다. 서로 무관한듯한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가 서로 얽혀있다는 것을. 마치 인드라의 그물망처럼 하나를 톡 건드리면 다른 모든 것이 진동한다. 저자가 말했듯이 이 서술은 음악과도 같다. 베토벤의 교향곡처럼, 주제를 던지고 그것을 변주하고 또 반복한다.
묵직한 주제에다 우울한 성향의 철학자 혹은 작가들이 등장하니 굉장히 무겁고 가라앉는 독서가 될 것 같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어깨를 누르던 돌덩이들이 가벼워지는 걸 느낀다. 제법 두툼한 책인데도 남은 페이지가 얇아지는 것이 아쉬워진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많이 생각해왔을수록 가벼워지는 것은, 알면 불안하지 않다는 심리때문일까?
꼭 답을 찾으려고 문제를 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관점을 바꾸면 문제가 답이 되고 그것이 다시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 덧없고 허망할지라도 그 이면에 훨씬 견고하고 믿을만한 현실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것은 답이 아니라 해도 희망이 될 수 있다.
여기 등장하는 모든 이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탐구하려 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답은 아니어도 힌트는 될 듯하다. 늘 고뇌와 권태의 연속인 것 같은 우리네 삶속에 무수히 많은 골목길이 숨어있고 곳곳에 찾아야 할 보물이 있다면, 니체가 말한 바대로 어린아이가 되어 그것들을 찾는 재미가 있지 않을까? 당장 이 한 권의 책속에서 숨은 그림들을 찾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물론 이 가을, 발치에 툭툭 떨어지는 밤송이들처럼 단단한 껍질과 가시가 있으니 그것을 벗기는 노력 정도는 하여야 한다. 삶이 그렇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