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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윤 한국통사 1-3 세트
한국인이 꼭 읽어야 할

오정윤 한국통사 1-3 세트

[ 전3권 ]
리뷰 총점10.0 리뷰 1건 | 판매지수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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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8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840쪽 | 153*224*40mm
ISBN13 9791191215151
ISBN10 1191215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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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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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문명을 바탕으로 발전하던 고조선은 철기시대의 도래와 중국의 전국시대라는 격변기를 맞아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걸었다. 정치·종교·교역 등 여러 방면에서 주도권을 잃어갔고, 제후국 또는 거수국으로 불리던 여러 소국들이 고조선의 통치권에서 벗어나 곳곳에서 독립하기 시작했다.
고려시대에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는 고조선의 뒤를 이어 대략 70여 개의 나라가 들어섰다고 전한다. 이를 근거로 이 시기를 열국시대라고 부르며, 조선후·위만조선·부여 등이 고조선을 대체하여 치열한 경쟁 관계에 돌입했다.
*
이규보의 〈동명왕편〉,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따르면, 북부여의 건국자인 해모수는 임술년(B.C. 239) 4월 8일에 신검 용광검(龍光劍)을 들고 다섯 마리 용이 이끄는 수레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하늘에서 웅심산으로 내려와 그곳에 도읍으로 정하고 나라 이름을 북부여라고 했다. 웅심연에서 하백의 장녀인 유화를 만나 혼인했지만, 나중에 유화를 버리고 하늘로 돌아갔다고 한다. 오룡거와 용광검은 북부여 세력이 철기 문명을 가졌다는 걸 뜻한다.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천손 신화를 반영하며, 그가 천손족(태양족)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또한 웅심산에 내려왔다는 것은 모계나 처계가 웅족(곰 부족)일 가능성을 말해준다.
*

백제는 소서노라는 여걸의 출현과 함께 시작되었다. 소서노는 주몽의 부인이며 비류와 온조의 어머니이다. 졸본부여의 왕녀인 소서노는 자신의 집안이 가졌던 기득권을 깨끗하게 버리고 고구려 건국에 참여했다. 그리고 비류와 온조가 주몽의 뒤를 계승하지 못하자, 이번에는 과감하게 고구려를 포기하고 백제를 건국하는 모험에 뛰어들었다.
비류와 온조는 어머니 소서노를 모시고 남쪽으로 이동했다. 이때 요동반도에는 남옥저, 압록강 남쪽에는 낙랑국, 대방국이 있어서 육로로 이동하지 못했다. 그래서 비류와 온조는 압록강 하류에서 요동반도로 나와 네 곳에 해상 교두보를 마련하고 정착지를 찾았다. 이 네 지역이 요동반도, 요서 지역, 산동반도, 강화만 지역이다.
*
광개토태왕은 선비족과 백제에 당한 선조들의 치욕을 씻어 무너진 고구려의 자존심을 세우고 고조선 영토를 모두 회복하여, 고구려 중심의 천하 질서를 수립하고자 했다. 즉위한 391년 7월에 백제를 공격하여 10성을 차지했고, 9월에는 거란을 쳐서 포로로 끌려간 백성 1만 명을 되찾았다. 10월에는 다시 백제를 공격하여 20일 만에 관미성을 점령해 강화도와 한강 하류를 차지하고 서해의 제해권까지 장악했다.
*
수양제는 이듬해인 613년, 다시 고구려 정벌군을 일으켰으나 각지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와 전쟁 물자를 담당하는 양현감의 반란으로 침략을 포기했다. 또 614년에 다시 3차 전쟁을 일으켰으나 여전히 농민 봉기와 각지의 반란으로 끝내 고구려 정벌에 실패하고 말았다. 수나라는 세 차례에 걸친 고구려 정벌 실패와 내란으로 멸망했다.
*
동아시아 백년 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천문령전투는 697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치러졌다. 요동에는 겨울 추위가 매섭게 몰아쳤고, 천문령으로 이어지는 산자락은 폭설로 뒤덮여 있었다. 대조영은 기후와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고 매복과 유격전을 적절히 구사해 이해고의 10만 군대를 이곳에서 전멸시켰다.
중국 역사서는 천문령에 큰 눈이 내려 당나라군이 열에 아홉은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치욕스런 참패를 숨기려는 역사 왜곡일 뿐이다.
*
장보고가 건설한 청해진은 신라가 극심한 내란과 분열을 극복하고 다시 7세기 무렵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하지만 신라는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하고 청해진을 해산시켜 결국 멸망의 길에 접어들었다. 장보고의 청해진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시기는 신라 하대가 분열과 내분으로 멸망에 이르는 분기점이었다.
*
태조 왕건은 송악에 뿌리를 내린 해상 무역 집단의 후손이다. 멀리 거슬러 올라가보면 장보고의 무역선단과 깊은 관계가 있다. 왕건의 조상들은 이 개성의 해상 세력을 외가나 처가로 삼아 성장한 대표적인 해상 토호로서, 서해의 해상 무역을 관장하는 호족이었다.
*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군인 출신이다. 군인은 명령에 복종하고 위계질 서를 중요시하는 직업이다. 그래서 견훤은 원칙주의자이며 권위적인 인 물로 무력 통일을 추진했다. 후고구려를 창건한 궁예는 당시 최고 지식 인 계층인 승려였다. 그런 까닭에 궁예는 불국토를 구현하려는 이상주의 자로서 개혁적인 사상 통일을 추진했다. 왕건은 황해도 패서 지역의 상인 집안 출신이었다. 왕건은 상인의 후예답게 현실적인 실리를 추구했고, 타 협과 협상으로 여러 세력을 포용함으로써 고려를 건국했다.
세 명의 건국자는 모두 한 시대를 이끈 풍운아들이었지만, 역사는 한 명의 영웅만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상인의 후예인 왕건이 삼한 일통의 대업을 이루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
서희의 외교론이 받아들여지고 고려는 안북부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고려군을 지휘하는 상군사 박양유는 중군사 서희에게 봉산성을 탈환하도록 했다. 거란군은 고려의 군세가 만만치 않다고 판단하고는 전면전을 피하고 먼저 화의를 제안했다. 그러면서 협상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자 안북부를 협공하기 위해 별동대를 서쪽으로 우회시켜 영변 쪽으로 이동시켰으나 연주성에서 고려 군민들의 완강한 저항을 받아 패퇴했다.
*
인종은 이자겸의 난으로 개경의 궁궐이 불타고 민심도 흉흉하며 금나라의 동향도 불안하던 차에 묘청이 천도를 건의하니 마음이 움직였다. 인종이 흔들리자 개경파는 태조 이래 끈질기게 제기된 서경 천도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이를 막고자 했다. 그들은 고려가 신라의 계승국이라는 논리를 제기하며, 유교의 정치 질서인 조공책봉 제도에 따라 금나라에 사대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서경 천도를 놓고 신라계 개경파와 고구려계 서경파가 한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권력 투쟁에 돌입했다.
*
무신 정권은 자신들의 정변을 시대적 변혁의 반영으로 설정한 뒤, 문벌귀족과 결탁한 화엄종·법상종 등 교종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선종 계열을 끌어들였다. 선종은 체제 변혁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무신 정권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이념적 도구가 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
고려의 신분을 문벌귀족, 중간층, 양민, 천민으로 구분하는 것은 잘못된 방식이다. 고려의 신분제인 양천제는 모든 백성을 양인과 천인으로 나눈다. 양인은 벼슬길에 나선 관료(문관, 무관)층, 군인·향리 등의 정호층(丁戶層), 일반 농민에 해당되는 백정층, 수공업이나 잡역에 종사하는 잡척층(雜尺層)으로 구성되었다. 천인은 노예들로, 고려민의 40퍼센트 정도를 차지했다.
*
삼별초 반란은 몽골군에 무릎 꿇지 않겠다는 고려 무사들의 자주 정신이 그대로 드러난 대표적인 항쟁이었다. 하지만 삼별초는 무신 정권의 사병으로 백성을 핍박하고 무신 정권의 이익을 지켜준 군인들이기도 했다. 이들이 민중을 억압하는 권력의 도구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
현대사에서 민주 정부를 억압하고 군사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찬탈한 박정희와 전두환 군사정부는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삼별초의 항쟁 정신을 강조하고 진도와 제주도 등지에 항몽 전적지를 만들었다. 삼별초의 항쟁은 이들에 의해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평가된 면이 있다.
*
그러나 농민과 천민 계급의 이익을 우선하는 신돈의 개혁은 급진적이어서 숨죽이고 있던 기득권 세력의 표적이 되었다. 게다가 1365년에 개혁을 지지하며 공민왕을 돕던 왕후 노국공주가 세상을 떠나자, 공민왕은 정치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이에 이존오, 김흥조, 김제안이 연달아 신돈을 탄핵하고 재상 김속명이 신돈을 역모죄(逆謀罪)로 몰았다.
*
결국 고려 내정의 불안정성,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 등 외적 요인, 권문세족의 조직적인 반대 등으로 개혁은 아쉽게도 성공하지 못했다.
개혁이란 당대에 실패했어도 그것이 추구한 가치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신진사대부는 비록 신돈과 개혁의 방향은 달랐지만 개혁 정책의 정당성이란 측면에서는 추구하는 목표와 가치가 같았다. 신진사대부는 신돈이 추구한 개혁 정책을 바탕으로 훗날 조선을 개국하는 밑거름으로 삼았다.
*
요동 정벌의 추진 의도는 종친 세력과 공신들의 사병을 정부군으로 편입시켜 그들의 무력 기반을 약화시키고, 군사 훈련과 진법 훈련 등을 통해 정국을 전시 상태로 전화시켜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위화도회군의 정당성을 합리화하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위화도회군은 이성계의 사적인 욕심에 의해 단행된 것이 아니라 구국의 결단으로 당시 정세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지금은 시기가 무르익어 다시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
정도전은 조선 건국의 법통을 세우는 데에도 치밀했다. 실제로는 왕위 를 빼앗은 찬탈이지만 형식은 공양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는 선양의 방 식을 택했으며, 태조 왕건의 스승인 도선이 한양에 왕십리(往十里)라고 새긴 비석을 묻고 이성계의 한양천도를 미리 예언했을 뿐 아니라, 명나라로부터 국호인 조선을 승인받아 국제적으로도 정권을 보장받았다. 이처럼 조선 개 국은 우연히 진행된 역성혁명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계획적으로 진행된 치밀한 개국 프로젝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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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은 황표정사를 군사반란의 명분으로 삼았다. 군주의 고유 권한인 인사권을 신하들이 사사롭게 처리했다는 지적이었다. 여러 대군, 왕족, 종친들은 태종, 세종 시대에 약해졌던 신권이 어린 단종을 앞세워 다시 강해지고, 그로 인해 왕실 세력이 약화되면 자칫 제거당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뼈저리게 느끼며 수양대군에 동조했다. 이때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신하가 군주를 내쫗는 정변의 싹이 움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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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시기는 훈구파와 사림파가 세력 균형을 이루었고, 사림파들은 주 로 홍문관·사간원·사헌부 등 3사에 있으면서 도덕성을 앞세워 훈구파와 왕권을 비판하고 견제했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왕당파가 등장하고, 훈구 파와 사림파의 균형이 무너졌다. 이로부터 사림파가 주로 화를 당하는 무 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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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은 1553년에 친정을 하면서 기대승, 허엽, 윤근수 등 사림들을 다시 중앙 정계에 불러들였다. 1565년에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사림의 탄핵을 받은 윤원형은 부인 정난정과 함께 강음으로 도망했지만 결국 사약을 받았다. 이로써 훈구파는 공식적으로 무너지고 조선의 중앙 정계는 사림파의 세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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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은 천하에 주인이 따로 없다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을 주장하고,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내세운 혁신적인 사상가였다. 정여립은 기득권 사림으로 점차 변질되는 서인을 비난하고 스승격인 이이, 성혼, 박순을 비판했다.
당시 ‘인군위당설(引君爲黨說)을 내세워 스스로 이이와 성혼의 당인을 자처한 선조는 정여립을 관직에서 내쫓았다. 그 뒤 정여립은 고향인 진안 죽도로 낙향하여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고 군사 훈련을 시키며 병력을 양성했다.
*
1592년 7월 8일, 이른 아침에 이순신은 5척의 척후선을 견내량에 파견하여 적선을 한산도로 유인했다. 70여 척의 적선이 한산도 바다에 들어오자 조선 수군 56척은 학익진을 펼치고 좌우에서 일제히 총통을 발사했다.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에 근접하여 조총을 발사하고 배 에 올라 도검을 휘두르는 전통적인 전술을 구사했는데, 이순신은 이를 간파하고 미리 준비한 화포전으로 대응했다. 적선은 접근도 못한 채 한꺼번에 66척이 불타고 그중 47척이 격침되어 수많은 일본 병사가 물에 뛰어들어가 익사하거나 섬으로 달아나 굶주림으로 죽었다.
*
소현세자는 심양에서 인질 생활을 하면서 조선의 부흥을 위한 경험과 방법을 배우고자 노력했다. 그는 청나라가 조선에 요구하는 지나친 공물과 정치적 압박을 조정하고, 양국의 갈등을 해소하려는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1644년에는 도르곤을 수행하여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하는 과정을 직접 체험했다.
*
효종은 명분론과 사대의리론을 내세우는 산당의 지지를 받아 청나라를 공격하는 북벌을 준비했다. 하지만 민생을 중시하는 정통적인 관료 계층인 한당은 명분을 중시하는 산당의 정국 운영에 반대하고 대동법 실시 등의 현실 문제를 우선해야 한다며 북벌을 반대했다.
*
노련한 정치가였던 외척 김석주는 강력했던 산당(송시열)을 몰락시킨 경험을 살려 이번에는 비대해진 남인 세력의 성장을 막고자 서인과 결탁했다. 영의정 허적이 사사로이 왕실의 천막을 사용했다는 기름 천막 사건과, 허적의 서자인 허견이 인조의 셋째아들 인평대군의 세 아들(복창군, 복선군, 복평군)과 역모를 꾸몄다는 허견 역모 사건을 일으켜 남인계 탁남의 영수인 영의정 허적을 제거하고 남인을 정계에서 축출했다.
*
낙론은 사람과 사물의 본성은 같으므로 만주족의 청나라도 조선과 마 찬가지로 모두 우주의 기운을 받은 존재이며, 따라서 그 실체를 인정하자 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이었다. 낙론이라 칭하는 것은 이를 주장한 이간 의 견해에 동조하는 학자들이 주로 한양 일대(낙하)에 살았기 때문이다. 낙 론의 견해는 훗날 청나라의 문물을 수용하자는 북학파의 사상으로 이어 졌다.
*
영조는 3월에 종묘에 나가 선왕들에게 경종의 즉위 이 래 발생한 사건들은 모두 소론에서 비롯되었다고 선언했 다. 이로써 정국은 완벽하게 노론의 세상이 되었고 탕평책은 공식적으로 무너졌다. 영조는 이때부터 노론, 소론, 탕평당을 멀리하고 정국 안정을 외척에 기대었다.
*
순조(1800~1834)는 종조와 수빈 박씨 사이에서 1790년에 태어났다.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1세에 즉위했으며, 영조의 왕후였던 증조할머니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1800년 10월에 정조의 국상이 끝나자 정국을 주도한 노론 벽파의 김한구, 김관주, 심환지는 정순왕후와 함께 정적인 남인, 소론, 그리고 노론 시파(서유란)를 정계에서 내쫓았다.
노론 벽파는 1801년에 천주교를 신봉한다는 구실로 남인들을 제거하는 신유박해(신유사옥)를 일으켰다. 이때 남인의 이가환, 권철신, 홍낙민, 정약전 등 실학파들이 사형을 당했고,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이때 남인들은 중앙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되고 말았다.
*
세도정치 기간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1811)과 임술민란(1862)은 농민들의 분노와 저항이 얼마나 거셌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1863년에 섭정에 오른 흥선대원군이 비변사 축소, 서원 철폐, 호포제 실시, 토지 조사, 환곡제 폐지, 문벌타파 등 강도 높은 개혁을 단행한 것은 세도정치에 대한 응징이었다.
*

한국의 근대사는 봉건적 수탈의 잔존, 외세의 침략과 일제의 지배, 이에 굴하지 않은 민중의 항일 독립투쟁과 무력 항쟁의 시대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 근대사는 피침략과 피지배의 역사이지만 그 속에서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불의에 대한 저항, 봉건제와 전제정치를 탈피하고 민주공화정을 수립하기 위한 고난의 시간을 거치면서 인류 평화와 진보에 기여한 민족 대중들의 투쟁의 역사라는 관점으로도 볼 수 있다.
*
고종이 청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 일본에 공사관을 설치하자, 청나라는 미국과 조선에 압력을 넣어 초대 주미 공사 박정양을 소환하는 등 조선의 다원 외교를 견제했다.
고종은 러시아를 끌어들여 비밀 협약을 추진했는데, 이 번에는 영국이 러시아의 영향력이 조선에 미치는 것을 막 고자 1885년 4월 15일에 거문도를 점거하고 영국기를 게양했다(거문도사건). 그러나 조선 정부의 항의와 청나라의 중재로 영국군은 1887년 2월 27일에 물러났다. 나중에 영국과 일본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영일동맹을 맺고 일본의 조선 지배를 용인했다. 거문도사건은 당시의 문제가 아니라 미래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
1895년 3월 29일 전봉준과 손화중, 최경선, 성두환, 김덕명 등 농민군 지휘자들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일본군에게 학살당했다. 이로써 제2차 갑오농민전쟁은 실패로 끝났다.
동학농민군은 비록 일본군의 무력 앞에 무릎을 꿇었지만 농민 세력은 그 뒤 민권의 성장, 민중의 각성을 불러일으켜 훗날 의병 전쟁, 독립전쟁으로 계승되었다.
*
제2차 갑오농민전쟁에서 우리나라 농민들은 비록 무력을 앞세운 일본 군에게 패하여 투쟁은 좌절되었지만, 반봉건 반외세 투쟁 정신은 곧바로 항일 의병전쟁, 항일 독립전쟁으로 이어지고, 해방 후에는 민주화 투쟁, 통 일운동으로 계승되어 승리의 역사를 만들었다.
*
1904년 2월 8일, 일본은 여순항에 있는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여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친러파를 앞세운 광무개혁을 중단시키고, 만주로 진출하려는 러시아를 막으려 한 것이다.
일본은 탁지부 대신 이용익을 일본으로 납치하고, 2월 23일에 외부대신 이지용을 앞세워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한일의정서는 대한제국을 일본군의 군사 기지로 삼고, 조선에서 러시아의 이권을 폐기하는 내용이었다. 이는 조선에서 친러파가 무너지고 친일파가 득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조선을 병참기지로 삼아 육군 제1군은 5월 초에 압록강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제2군은 요동반도에 상륙하여 남산, 대련을 점령하고 여순을 포위했다.
*
고종 황제는 1902년, 비밀리에 제국익문사(帝國益聞社)를 설립하고 일본과 서양 열강의 움직임을 파악했다. 국제 사회에서 조선의 독립을 홍보하려는 의도였다.
고종은 국제 사회에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고자 1907년 4월에 덕수궁 중명전에서 의정부 참찬을 지낸 이상설, 평리원 검사를 지낸 이준을 은밀하게 만나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했다. 〈대한매일신보〉에도 친서를 보내 조약에 친필로 서명하지 않았음을 알렸다.
*
국채보상운동이 점차 애국적인 운동에서 자주적인 주권수호운동으로 확산되자 통감부는 일진회를 앞세워 방해 공작을 펼치고 끝내는 양기탁을 횡령 혐의로 체포하여 운동을 좌절시켰다. 이런 가운데 안창호, 장지연, 신채호, 박은식, 이동휘, 이동녕, 이회영, 이승훈 등 변법자강을 추구하는 개신 유학자와 공화제를 추구하는 외국 유학파들이 공동으로 1907년 9월에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를 창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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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간도협약의 핵심은 제1조이다. 백두산정계비의 동쪽 국경인 도문 강(토문강) 상류는 석을수라고 하며 두만강으로 흐른다고 정의하였는데, 일 본은 자의적으로 도문강을 두만강으로 정하고 간도를 청나라에 넘겼다. 그러나 간도협약이 무효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 조항도 무효가 된다. 따라서 한중 국경은 1712년의 백두산정계비 기록으로 되돌아가 다시 논의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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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으로 민족자결주의와 사회주의 혁명은 약소민족의 독립을 자극했다. 해외 독립운동 세력은 1919년 2월 1일 중국 길림에서 무력으로라도 조선의 국토와 국권을 쟁취할 것이라는 무오 독립선언을 했으며, 일본 도쿄(동경)에 유학중인 학생들은 1919년 2월 8일 조선청년독립단의 이름으로 2·8독립선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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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의거는 1920년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표적인 항일 민족운동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지극히 개인적인 충돌이었지만, 조선 학생과 일본 학생 사이에 잠재되어 있는 민족 차별과 경쟁의식은 언젠가는 한꺼번에 분출될 화약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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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7월 7일에 일본군이 북경의 노구교(蘆溝橋)에서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7월 15일에 남경에 머물던 임시정부는 분열된 독립 진영의 세력 통합에 나서 김구의 한국국민당, 조소앙의 한국독립당, 이청천의 조선혁명당을 중심으로 대내외 9개 단체를 통합한 한국광복진선(광선)을 결성했다. 의열단을 이끌던 김원봉은 1935년 6월 29일에 한국(조선)민족혁명당을 발족시키고 1938년 10월 10일에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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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6일과 9일에 미국의 폭격기가 각각 일본 본토의 대도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폭발과 함께 순식간에 고열과 폭풍, 방사능으로 히로시마에서는 14만 명, 나가사키에서는 7만 명이 사망했다. 히로히토 일본 왕은 8월 15일에 연합군에게 무조선 항복을 선언했고,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전쟁)이 끝났다.
하지만 우리 독립운동 세력은 항일 전쟁에서 자력으로 승리를 얻지 못해 승전국의 지위를 확보하지 못했다. 조선의 독립 여부는 이제 대일본 승전국인 미국, 중국, 소련 등 연합국이 결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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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균주의는 노예 해방, 토지 공유, 사유제 철폐, 계급 타파, 자주국가의 이념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민중혁명론이자 민족구국론으로, 1941년에 대한민국 건국 강령으로 채택되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미군정에 의해 임 시정부의 법통성이 부정되고, 국토 분단과 남북한 체제 경쟁이 격화되면서 삼균주의는 끝내 민족 사상으로 채택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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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은 12월 12일에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선거를 강행 했다. 미군정이 우익만의 입법기구 구성을 강행한 것은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지지한 한민당과 이승만 세력을 중심으로 반공 정부의 수립이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947년 1월 20일에 한민당 계열이 주도권을 장악한 입법의원은 신탁통치 반대를 결의했다. 미군정은 2월 5일에 안재홍을 최고 행정장관인 민정장관으로 임명하고 남조선 과도정부를 수립했다. 이대로 가면 남한에는 단독 정부가 수립되고 우리나라는 분단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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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6·25전쟁)은 수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손실을 남겼다. 남한에서 유엔군과 한국군은 18만 명이 전사하고, 민간인은 99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북한군은 52만 명, 중공군은 90만 명이 죽었으며,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북한 주민이 희생되었다. 산업 시설과 주택이 파괴되고 부상자가 속출했으며, 부모와 가족을 잃은 어린이·부녀자·이산가족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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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일어나 성공한 시민혁명이었다. 4·19는 지배 계급이나 군인들이 정치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일으킨 무력 혁명이 아니었다. 오랜 항일 전쟁 과정에서 단련되고 성장한 민족 역량의 분출이었으며, 국민들의 자유와 민권에 대한 요구와 독재를 용인하지 않는 자주의식의 표출이었다.
이때의 성공 경험은 뒷날 광주 민중항쟁과 6·10민주항쟁으로 이어져 30여 년을 지배해온 군부 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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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출범하자 박정희 정권은 1964년부터 한일 회담의 타결을 밀어붙였다. 학생·재야·시민들이 한일 회담을 굴욕적인 경술국치(1910)에 견주며 결사적으로 반대하자 4월에 회담은 중지되었지만 반대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964년 6월 3일에 시위대가 광화문에서 반대 시위를 하며 정권 퇴진을 주장하자(6·3항쟁), 4·19혁명과 같은 사태를 우려하여 박정희 정권은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1천 200명의 학생을 연행했다. 12월에 7차 한일 회담이 재개되고 1965년 6월 22일에 한일 기본 조약이 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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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공동성명의 후속 조치로 1972년 8월 29일부터 9월 2일까지 남측 적십자 대표단이 평양을 방문하고, 9월 12일부터 16일까지는 북측 적십자 대표단이 서울을 답방했다. 이산가족을 찾아주기 위한 회담은 남북한 민중에게 통일이 눈앞에 닥친 듯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가운데 박정희는 유신 독재를 준비했고, 김일성은 주체사상을 통한 수령 체제를 구축했다.
박정희는 국가 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의거하여 1972년 10월 17일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시켰다. 이로써 모든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고, 비상 국무회의에서 비밀리에 유신헌법이 기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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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의 오랜 가난을 극복하고 한강의 기적과 경제 성장을 이루도록 노력한 대통령이었다. 공과를 놓고 본다면 경제 발전을 일으킨 업적이 가장 클 것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살펴보면 경제 성장의 성과는 재벌과 자본가의 배를 불리는 데로 흘러갔고, 저임금과 과노동에서 벗어나지 못한 노동자와 서민들은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당했다.
그리고 반공 독재와 함께 경제 성장을 하기 위한 명분을 내세워 유신 독재의 길을 걸었으며, 국민들의 인권과 자유를 짓누르고 양심과 도덕을 억압했으며 수많은 정적을 죽이고 감옥에 가두었다. 경제 성장의 외피에 현혹되어 경제적 공로만 부각시킨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모독이고 국민 대대수의 희생과 고통을 은폐하는 역사 왜곡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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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남북공동성명은 투명하지 않은 비밀 접촉, 국민 총의를 거치지 않 은 정치적 결단, 독재 정권의 연장 수단이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1) 통일 정책의 원칙을 천명했다는 점, 2)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전쟁을 통한 방식은 민족 범죄이며, 3) 통일의 주체가 정부만이 아닌 민족 구성원 전체이며, 4) 향후 통일운동이 이정표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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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유신 독재 시대를 ‘정치의 겨울’이라고 했고, 박정희가 서거한 뒤 맞이한 한국사의 전환기 1980년을 ‘서울의 봄’이라고 불렀다. 서울의 봄은 유신 시대에 정치적으로 성장한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의 시대를 예고했다. 김대중은 유신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 투쟁의 상징으로 재야를 이끌었으며, 김영삼은 선명 야당을 표방하는 신민당의 총재로 야당의 대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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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사이에 민주정부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고, 민주 화운동의 상징인 김대중이 신군부 세력에 의해 내란음모 죄로 체포되었다는 소식은 민심을 들끓게 했다. 특히 김대중의 정치적인 고향인 호남과 광주는 5월 18일부터 대규모 집회와 시위가 벌어지며 한국사에서 민주항쟁의 역사를 새로 쓴 광주민중항쟁(5. 18.∼5. 27)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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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 세력은 광주민중항쟁의 진상을 철저하게 감추고 왜곡했다. 또한 광주민중항쟁에 관한 어떤 논의나 토론, 신문기사, 방송이 불가능했다. 5년 뒤의 정부 발표에 따르면 희생자는 사망 191명, 부상 852명이었다. 이 가운데에 계엄군 23명, 경찰 4명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사실대로 믿는 국민들은 많지 않았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피살되거나 실종되었을 것이라 수군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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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남북공동성명이 남북한 독재 정권의 연장에 이용되었다 할지라도 통일운동의 역사를 진전시켰듯이, 만일 남북한 정상회담이 성사되었다면 남북한 긴장 완화에는 상당히 기여했을 것이다. 당시 실무를 책임졌던 정무장관 박철언은 노태우 정부 시절에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북방 정책을 추진하여 중국, 소련, 동구권과의 수교,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을 성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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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지의 대학생들은 6월 7일부터 학교 민주광장에서 6·10 국민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총궐기대회를 시작했다. 그런데 6월 9일에 6·10민주항쟁의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 연세대에서 발생했다.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2학년 학생 이한열이 시위에 나섰다가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의식을 잃고 세브란스병원에 실려 간 것이다.
이제 시위는 학생 중심에서 분노한 일반 시민으로 확대되었다. 이튿날 6월 10일에 전국에서 1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시위에 참가했고, 서울에도 수십만 명이 서울시청 맞은편에 위치한 대회장인 대한성공회 서울주교대성당으로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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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항쟁은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의 불법적 통치행위 를 시민들이 헌법에 보장된 정당한 권리로 심판한 위대한 민주항쟁이었다. 헌법적 질서와 절차적 민주를 획득하지 않은 정권은 아무리 총칼로 위협해도 결국 시민들의 저항으로 무너진다는 역사적 교훈도 확인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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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당선자는 이듬해인 1993년 2월 25일 제14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노태우 정부(제6공화국)의 후신을 부정하고, 32년 간 지속된 군인 출신 대통령이 아닌 민간인 출신 대통령이라는 자부심으로 자신의 정부를 ‘문민정부’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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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기본합의서에 담긴 정신은 남북한이 더 이상 체제 경쟁과 군사 대결 의 상대가 아니라 남북 화해와 호혜 평등, 경제 협력과 평화 공존을 추구 하는 동반자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고,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김영삼 정부의 남북 정상 회담 추진, 김대중 정부의 6·15공동선언, 노무현 정부의 10·4 정상선언으로 그 맥이 이어져 남북한 통일 정책의 기본 정신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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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정부(1998∼2003)는 대한민국 정부 탄생 이후 국민의 손으로 야당 후보가 평화적으로 실질적인 정권 교체를 이루었다는 의미에서 국민의 정부를 표방했다. 김대중의 당선은 정통 민주화 세력과 유신 세력인 김종필의 합작으로 얻어진 한계를 지녔지만, 국민의 정부라는 이름과 함께 50년 만의 정권 교체라는 역사적인 의미를 획득했다. 국민의 정부는 집권 초기에 IMF 사태 극복, 남북한 관계 개선, 지역 차별 해소, 인권 개선이라는 시대적인 과제를 안고 출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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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는 참여정부라고 부른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른바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비주류가 처음으로 집권한 역사적인 정권 교체였다. 노무현은 1946년생으로,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가운데 최초의 해방 이후 출생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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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9일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는 48.7%를 득표하여 26.1%에 그친 정동영 후보를 530만여 표 차이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어 김대중 정부가 정권 교체를 이룬 것처럼, 또다시 여야 간 정권 교체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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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 역사인 만주 지역의 요하 문명, 고조선, 부 여, 고구려, 발해, 그리고 북방 민족인 거란, 여진, 몽골, 만주족의 역사를 모 두 중국사로 만드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만주 지역이 한 민족이 개척하고 활동했던 고유한 역사 영토임을 지속적으로 국제 사회에 홍보하고 간도 지역의 반환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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