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적으로 전개되고 공간적으로 펼쳐지는 정신적[心的] 활동 상태에 관한 기록이다. 세계사는 세계 인류가 그렇게 되어온 상태에 관한 기록이고, 조선사는 조선 민족이 그렇게 되어온 상태에 관한 기록이다. 무엇을 ‘아’라 하고 무엇을 ‘비아’라 하는가? 깊이 파고들 것 없이 쉽게 말하면, 주관적 입장에 선 쪽이 ‘아’이고 그 이외는 ‘비아’다.
--- p.21, 「제1편 총론」중에서
기존 역사서에서는 삼조선 분립 사실을 빠뜨렸을 뿐 아니라 삼조선이란 용어를 단군·기자·위만의 세 왕조로 잘못 해석했다. 삼조선은 신·불·말, 세 한이 분립한 것으로, 신한은 대왕(大王)이고 불한과 말한은 부왕(副王)이었다. (중략) 신한·말한·불한은 이두로 진한·마한·변한이라 표기됐고, 신조선·말조선·불조선은 이두로 진조선·막조선·번조선으로 표기됐다.
--- p.119, 「제3편 삼조선 분립 시대」중에서
고구려 시조인 추모왕은 주몽이라고도 한다. 그는 타고난 용력과 활쏘기 솜씨를 갖고 있었으며, 과부 소서노의 재산을 발판으로 호걸들을 불러 모았다. 왕검 이래의 신화를 교묘히 이용하여 난생 신화를 만들어 고구려를 건국했을 뿐 아니라, 안으로는 열국의 신뢰를 받아 조선을 정신적으로 통일하고 밖으로는 자신의 영웅담을 중국 각지에 전파하여 중국 제왕과 인민들이 자신을 교주로 숭배하도록 만들었다.
--- p.163, 「제4편 열국쟁웅 시대(중국과의 격전 시대)」중에서
고구려가 요동·낙랑 등을 회복한 사실이 〈고구려 본기〉 태조대왕 편이나 《후한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구당서》 〈가탐 열전〉에는 “요동·낙랑은 후한 건안(建安) 시대에 함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략) 고구려는 요동을 차지한 뒤, 지금의 개평현 동북쪽 약 70리에 환도성(丸都城)을 수축하고 서쪽 경영의 거점으로 삼는 한편, 국내성·졸본성과 함께 삼경(三京)으로 삼았다.
--- p.230, 「제5편(一) 고구려의 전성시대」중에서
태왕은 지금의 개평 부근에 있었던 제5도읍인 안시성으로 천도한 뒤, 선비족 모용씨와 10여 년간 전쟁하면서 항상 상대의 허점을 이용해 선비족 군대를 기습적으로 격파했다. 요동 땅에서부터 지금의 영평부인 요서까지 차지하니, 불패의 명장으로 불리던 후연왕 모용수도 패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뒤를 이은 후연왕 성(盛)과 희(熙) 같은 중국 역사상의 대(大) 영웅들도 다들 꺾이고 말았다. 그래서 그들은 수천 리의 영토를 고구려에 내줄 수밖에 없었다.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은 그 존호처럼 광대한 영토를 개척했다.
--- p.298, 「제6편 고구려·백제의 충돌」중에서
신위례성이 무너지고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하자, 놀란 두 가라는 자국의 안보를 지키기에도 급급했다. 신라·백제는 자기들의 힘으로는 고구려를 막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두 가라에게 동맹 가입을 종용했다. 이로써 신라·백제 양국의 대(對)고구려 공수동맹이 신라·백제·임나·아라 4개국의 대고구려 공수동맹으로 바뀌게 되었다.
--- p.312, 「제7편 남방 제국의 대(對)고구려 공수동맹」중에서
수나라 군대가 강의 중간에 도착하기 전에 상류에서 모래주머니를 무너뜨렸다. 그러자 물이 거세게 밀고 내려왔다. 이런 상태에서 을지문덕 부대가 후미를 습격했다. 수나라 군인들은 칼과 활에 맞아 죽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하루 낮과 하룻밤 동안 450리를 달려 압록강에 도착한 후에 강을 건너 달아났다.
--- p.399, 「제9편 고구려의 대(對)수나라 전쟁」중에서
하지만 연개소문은 다르다. 그는 봉건 세습적인 호족 공화제를 타파하고 정권을 한 곳에 집중함으로써 분권적인 국면을 통일적인 상태로 바꾸었다. 또 반대파는 군주든 호족이든 불문하고 죄다 소탕했다. 그는 영류왕을 비롯해서 수백 명의 관료들을 주살했다. 또한 침략한 당태종을 격파했을 뿐 아니라, 이를 추격하여 중국 전역을 진동시켰다. 그는 혁명가의 기백을 가지는 데 그치지 않고, 혁명의 능력과 지략까지 갖추었다고 봐야 한다.
--- p.466, 「제10편 고구려의 대(對)당나라 전쟁」중에서
솝울이 적에게 함락되고 의자왕이 체포되자, 임자·충상 같은 매국 세력과 한패였던 고관·귀족의 대부분은 자신의 성읍을 바치고 적에게 항복했다. 하지만 성충의 일파로 몰려 퇴직했던 옛 관료와 초야의 의사(義士)들은 망국의 재앙을 물리치고자 각지에서 봉기했다. 신라 역사가들은 이 열렬한 다물 운동의 의사들을 잔적(殘賊)으로 몰고 그들의 발자취를 없애고 이름마저 지워버렸다. 이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 p.504, 「제11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