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것은 촌스럽다. 불공평한 대우를 받는 사람만이 그렇게 느낀다. 그래서 나는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안 하기로 했다. 나는 아직 극적인 비극을 당면하지도 않았다. 나는 멀쩡하다. --- p.35
배가 들어오면 사람들은 검고 기다란 장화를 신고 팔꿈치까지 오는 장갑을 끼고 여럿이서 그물을 걷었다. 기계라고 할 것까지도 없는 쇠막대기 연결한 그물받이 위에 그물을 끌어 올려 감아 나갔다. 팔을 요란하게 빨리 움직이는 아저씨들 근처에는 아주머니들이 커다랗고 빨간 고무대야를 들고 뛰어다녔다. 고기가 많이 잡힌 날은 더 바빠져서 어부와 어부의 아내들은 춤을 추듯 팔을 휘젓고 뛰어다녔다. 나는 가겟방 문을 빼꼼히 열고 그 가운데 가장 키가 크고 가장 잘 생기고 가장 젊은 내 아버지를 보는 것이 좋았다. 참 좋았다. --- p.60
아, 그런데 집 가장 가까운 나무의 위쪽에 뭐가 걸린 게 보였다. 나무의 높은 줄기 쪽에 줄기 사이 작은 주머니가 보였다. 바닥에 흩어진 기다란 나뭇가지를 하나 주어 그 주머니를 끄집어내었다. 주머니는 정성스레 뜨개질로 이어 만든 것이었다. 살짝 열어보니 스카치캔디가 가득 들어 있었다. 누가 잃어버리고 갔다면 저렇게 높은 자리에 걸려있을 리 없을 텐데. 홍수에 밀려온 것인가. 사탕은 물에 젖은 흔적도 없었다. 한 알 까서 먹어도 될지 말지 잠깐 고민했다. --- p.87
아니면, ‘나는 너를 오 년 동안이나 지켜보고 있었다.’라고 말해도 될까. 네가 어떨 때 웃는지, 어떨 때 외로워 보이는지, 청계천 길을 따라 걷는 너의 모습을 오래오래 지켜보고, 그 뒤를 나도 따라 걸었었다고 말해도 될까. 나는 소년과 어른, 그 사이쯤에서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다. --- p.90
“내가 딸 하나 키우면서 그 딸 앞에서 어떻게 술을 마시겠냐. 어린 네가 잠들면 부엌에 혼자 쪼그리고 잠이 안 와서 한잔, 무서워서 한잔, 힘내자고 한잔. 그렇게 세 잔쯤 마시고 잤지.” --- p.107
기회가 날 찾지 않으니 내가 기회를 찾아 나설 시간을 가져도 될 것이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제작사가, 잡지사가, 출판사가 줄 기회를 무릎을 끌어안고 밤을 지새우며 꼬박꼬박 기다리지 않겠다.
“연락드릴게요.”라거나, “내부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라는 의례적인 말에 목을 빼고 달력을 보지 않을 것이다. 내가 기회를 찾아서 내가 연락할 것이다. 기회, 너는 나를 놓치면 다시는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다. --- p.116
스카치캔디 할머니는 흔들의자에 앉아서 사열한다. 열병식을 하는 천오백의 병정들은 무릎을 높이 높이 들어 올리며 행진을 하고, 스카치캔디 군악대들은 백파이프를 연주한다. 그 소리는 하늘 멀리 울려 퍼지고, 모든 보병과 기병은 할머니 앞을 지날 때 일제히 경례를 올린다. --- p.158
휴학을 선언한 것인데,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것도 아닌데, 의사가 되지 않겠다는 것도 아닌데 아버지는 노여움을 어쩌지 못했고 엄마는 밥을 몇 끼 굶기도 했고 주방 구석에 앉아 커다란 면기에 밥을 여러 반찬과 비벼서 끝없이 먹기도 했다. 고작 한 학기 정도 휴학을 하는 것은 요즘은 보편화 되었을 정도인데 우리집은 그런 계획적이지 않은 계획이 용납되지 않는, 아니 상상조차 안 되는 분위기였다. 아마 모기 방역 트럭을 따라가서 길을 잃었던 그 어린 날 이후로 아버지는 예측 불가의 일은 꿈도 꾸지 않는 것 같았다. --- p.165
한글로 단야역이라고 쓰인 역이름판에는 작은 글씨로 單椰라고 적혀있었다. ‘오직 단, 야자나무 야’라는 한자다. 대학 캠퍼스에서 야자나무가 줄지어 서있는 길을 걷고 있을 지수를 생각했다.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며칠 내내 시달렸던 두통이 없어지고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유독 작아 보이는 한 칸짜리 매표소와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천정이 없는 역 건물과 두 줄로 나란히 줄 서 있는 역로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다시 이곳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려왔지만, 누군가에게 또다시 단야를 향하는 길은 열려있음을 생각하며 낡고 작은 역의 풍경에 따뜻한 이별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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