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큼 가까이
새로 쓴 작가의 말 / 수상소감 |
鄭世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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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서
그거 그렇게 익숙해지면 안 되는 일이야, 너 거기서 최대한 빨리 도망쳐야 해,라고 말할 만큼 나는 단단하지 못했다. 안온하고 좁은 세계에서 성장은 유예되고 만다. “가족이라고 해서 무조건 사랑할 필요는 없어. 하나도 안 사랑해도 돼.” 수미한테 그렇게 말한 건 민웅이였다. 마치 “그 가수 앨범의 모든 트랙을 들을 필요는 없어, 좋아하는 노래만 들어” 정도의 말을 하듯 가볍게 말했다. 민웅이가 아니면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못했을 거다. 그런 말을, 사람을 구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민웅이였다. (30~31면) 어느날은 운동화 끈으로 땋아 만든 팔찌를 내밀었다. “이거 뭐야?” “여분 끈 안 쓸 거 같아서 만들었어.” 내가 학교에 가고 없는 시간, 하주가 혼자 운동화 끈을 꼬고 있었을 걸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굳이 묻지는 않았지만 여분 끈은 두개니까 하나 더 만들었을 텐데 그럼 커플 팔찌네, 나는 귀가 뜨거워졌다. 귀가 뜨거워진 날은 후드를 쓰고 잤다.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머릿속의 따뜻한 공기가 그대로 머물도록. (97면) 좋은 어른은 좀처럼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나쁜 어른은 내세울 권위가 없다. 그러니 원활히 작동하는 권위란 건 좀처럼 목격하기 어렵고 그런 의심으로 나는 어른을, 감독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104면) “추악한 것에서 눈을 피하지 않는 그런 느낌이 있어. 자기가 해놓은 걸 보면 말이야. 누구한테 배웠어?” 당신으로부터. 세계로부터. (105면) “내 생각에, 인간은 잘못 설계된 것 같아.” 주연이가 말했을 때 아무도 ‘왜 또?’ 하고 반문하지 않았다. “소중한 걸 끊임없이 잃을 수밖에 없는데, 사랑했던 사람들이 계속 죽어나갈 수밖에 없는데, 그걸 이겨내도록 설계되지 않았어.” (225면) “내 생각에, 별로 좋은 나이라는 건 없는 것 같아. 어릴 때는 언제 어디에 있고 싶어도 결정권이 없고, 나이가 들면 지금이 언제인지 어디에 있는지 파악을 못하니까.” (284면) 아무도 깨어 있지 않은 시간에 나만 깨어서 영상들을 돌려 보면, 영상 속의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 언젠가 이 순간을 그리워하게 될 거야’ 하고 일찍 예감한 것 같은 표정들을 지었다. 현재를 살면서 채 오지 않은 그리움을 먼저 아는 종자들이 특이하게 느껴졌지만, 내 주변엔 그런 이들이 많았다. 있는 듯 없는 듯 살다 간 사람, 있다가 없어진 사람, 있어도 없어도 좋을 사람, 없어도 있는 것 같은 사람, 있다가 없다가 하는 사람, 있어줬으면 하는 사람, 없어져버렸으면 하는 사람, 없느니만도 못한 사람, 있을 땐 있는 사람, 없는 줄 알았는데 있었던 사람, 모든 곳에 있었던 사람, 아무 데도 없었던 사람, 있는 동시에 없는 사람, 오로지 있는 사람, 도무지 없는 사람, 있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사람, 없다는 걸 확인시켜주지 않는 사람, 있어야 할 데 없는 사람, 없어야 할 데 있는 사람…… 우리는 언제고 그중 하나, 혹은 둘에 해당되었다. (301~02면) 새로 쓴 작가의 말 이 이야기를 고치면서,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오래도록 빠져나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한번도 존재한 적 없는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라니, 어긋날 대로 어긋난 셈이지만 익숙한 팔 안에 안긴 듯했습니다. 지금껏 쓴 다른 소설 속 인물들보다 『이만큼 가까이』의 인물들과 한층 자주 대화를 나누곤 합니다. 어떤 해에 가까이 여겼던 이가 다음 해에는 멀어지기도 하고, 이해하지 못했던 인물이 어느날에는 훌쩍 다가오기도 합니다. 저의 이 부족한 친구들이 읽어주시는 분들 곁에도 잠시 앉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얼마 전에 한 독자분이 학생 때 이 책을 읽었지만 사회인이 된 지금까지도 저를 원망하고 있다고 리뷰를 쓰신 것을 보았습니다. 아픈 이야기를 써서 죄송합니다. 변명하자면 많은 작가들이 가상의 유년을 공들여 조형한 다음 완전히 파괴하면서 작가가 되지 않나 합니다. 다시 한번 태어나는 과정이기에 딱 한번만 쓸 수 있는 소설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덜 아픈 이야기들로 보상해드리고 싶습니다. 세상이 불가해하게 난폭하다고 여기기에 상실 이후에 대해, 이어지는 삶에 대해 끝까지 쓰고자 합니다. 더딜지라도 확실한 회복 속에 함께 있고 싶습니다. 2021년 여름 정세랑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