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모퉁이를 돌았다. 그곳에 심연이 있었다. 노인은 지팡이를 내리고 무어라 중얼거렸다. 노인이 가는 방향으로 열다섯 발짝쯤 떨어진 곳에도 심연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이 사라져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저마다 금속의 온기와 처벌에 대한 수긍, 순간적인 역정과 튼튼한 지팡이에 의지해 심연을 통과했다. --- p.8-9
경비원은 조그만 휴대폰 화면을 열심히 들여다보며 잠복 28일째를 맞이한 카메라맨의 마음을 공유했다. 화면 속 풍경은 여름과 겨울을 번갈아 지나고 있었다. 푸르거나 희거나. 무성한 녹색 이파리들 사이로 해가 비쳤다. 경비원은 맑고 청명한 시베리아의 여름에 몸을 숨긴 카메라맨과 그의 긴팔 셔츠를 보았다. 온통 눈이 내린 흰 풍경 속에서는 무엇도 그림자 지지 않았다. 사방이 더 흴 수 없을 정도로 흴 때, 카메라맨은 어디에 자신의 속된 신체를 숨기는가? 카메라맨이 화면에 등장할 때, 그를 찍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 p.10
노란색으로 칠해진 벽에 장식 접시들이 걸려 있었다. 농부들과 소들. 그는 파란색 하나로 그려진 접시 그림들을 바라보며 면을 끊고 고기를 씹고 국물을 마셨다. 그러고는 애매한 얼굴로 미소 짓는 서버에게 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오며 한 여자를 스친 뒤 휴대폰으로 다시 한번 고수에 해당하는 베트남어를 검색했고, 다시 한번 rau mui라는 단어들을 발견했으며, 자신이 통사를 미처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그가 식당 맞은편 골목으로 통사 없이 사라지면, 우리는 그와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와 대부분의 행인들 사이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일이지만, 우리는 아마도 슬픔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는 라우 므이, 라우 므이…라고 중얼거리며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고, 그의 존재는 잃어버린 장갑 한 짝들의 세계와 이웃한 심연 속으로 영원히 사라졌다. --- p.17-18
노인은 경비원이 자리를 비울 때마다 초조하고 불안했다. 큰딸과 작은딸이 번갈아 이틀에 한 번꼴로 전화를 걸어 왔고, 그러면 노인은 자신의 초조함과 불안을 숨기지 않고 표현했다. 딸들은 저마다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쉬었고, 초조해하고 불안해했다. 그러니 노인과 두 딸들을 조금이라도 안심하게 해 주자. 이 건물에는 아직까지 도둑이 들었던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현재 시제의 세계로 넘어가겠지만, 여기서 미리 노인과 두 딸들이 현재를 살게 해 주자. 노인은 수화기를 든 채 하늘을 바라보다 문득 차분해지고, 딸들은 안도한다. --- p.23
여자는 앞으로도 한두 번쯤 사소한 범죄를 저지를 것이고, 20여 년 후, 집을 사는 데 사용한 대출금을 운 좋게 모두 상환한 뒤에도 살아 있기를. 큐빅이 하나씩 붙은 은제 귀걸이는 잃어버린 귀걸이 한 짝들의 세계로 사라지겠지만, 그렇더라도 여자는 심연 속으로 사라지지 않기를. 페이지 밖에서 이 여자에게도 이름이 주어지기를. --- p.36
우리가 그의 모습을 보는 건 대략 30여 분 동안이다. 그는 합정동에서 망원동까지 1.5킬로미터가량을 뒤로 걸으면서 다행히도 전봇대에 뒤통수를 박거나 소화전에 허벅지를 부딪거나 기타 위협적인 장애물들에 발을 채여 넘어지지 않았다. 우리가 지켜보고 있으므로. 간혹 간판이나 그림자, 혹은 추위, 혹은 다른 행인들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를 지켜보고 있다. 그가 넘어지지 않도록, 다치지 않도록, 사라지지 않도록.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 어째서 뒤로 걷고 있는지 결코 모를 것이다. 그래도 되는 경우들이 있다. --- p.37
3층의 그는 불투명을 되찾은 손으로 고양이의 등을 쓸어내린다. 지킬 수 있다면 지켜야 해, 지킬 수 없더라도 지켜야 한다. 어쩌면 기만이고 위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페이지 안에서라면,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누구도 놀라지 않을 수 있는 허구 속이라면, 트럭에 받혀 가드레일을 정면으로 들이받은 승용차 안에서 한 사람쯤은 즉사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겠는가? 생의 저편으로 건너가려던 두 사람이, 물리적이고 의학적인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 사력을 다해, 말 그대로 사력을 다해 한 사람쯤 살려도 괜찮지 않겠는가?
--- p.7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