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적으로 제가 출판을 결심한 이유는 오직 하나. 이 책을 보신 분들이 이야기의 매력을 다시금 확인하고 이야기의 역할을 새롭게 인식해서, ‘책을 읽는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지!’ 하고 생각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른 별에서 온 생물이, 책을 읽고 있는 지구인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하고 상상하곤 합니다. 조그만 상자 모양 종이 다발을 손에 들고 꼼짝 않고 앉아 있을 뿐, 또는 드러누워 있을 뿐, 간혹 종이 한 장이 넘겨지는 것 외에는 아무 변화도 없이, 그저 시간이 고요하게 흐르는 광경. 인내심을 갖고 끈질기게 기다려봐야, 새로운 제품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대체 무슨 이득이 있어 인간들은 이렇듯 소소한 행위를 하는 것일까? 그런 의문에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까 싶군요.
책을 읽을 때 극적으로 요동치는 인간의 마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 효과를 숫자로 나타낼 수도 없죠. 이 책에서 저는, 그렇기에 책이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으며,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 중요한 증명이기도 하다고 거푸 얘기합니다.
--- pp.6-7, 「들어가는 말」 중에서
예를 들어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황당한 현실에 부딪쳤을 때, 사람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현실을 자기 마음의 형태에 맞도록 이리저리 바꿔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이 무의식적인 행위가 바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죠.
또 현실을 기억할 때도 있는 그대로 기억하는 일은 절대 없어요. 기쁜 일은 크게 확대하고 슬픈 일은 조그맣게 축소하는 등, 자기 마음의 형태에 맞게 변형해서 기억합니다. 현실을 이야기로서 자기 안에 쌓아가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사람은 살아 있는 한 누구나 이야기를 필요로 하며, 이야기의 도움으로 현실과 그럭저럭 균형을 잡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따라서 작가는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게 아니라, 누구든 나날의 일상생활 속에서 만들어내는 이야기를 언어를 통해 의식적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 자신의 역할도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 p.26, 「1부_이야기의 역할」 중에서
‘이쪽으로 가자, 이렇게 세계를 넓혀가자.’
그렇게 이야기 자체가 지니고 있는 힘이 이끌어주지 않고는 소설을 쓸 수 없습니다. 한 작가가 머릿속에서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은 한계가 뻔하니까, 작가가 앞서서 등장인물을 휙휙 끌어당기면서 쓰는 소설은, 저는 오히려 재미없다고 생각해요. 작가의 생각을 넘어서는, 예상할 수 없는 뭔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소설은 쓰지 못해요.
그래서 저는 때로, 소설을 쓰면서도 지금 쓰고 있는 내가 가장 뒤를 쫓아가고 있다고 느낍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서도, 제 앞에 박사와 가사 도우미와 루트가 있어요. 완전수와 우애수도 제 앞에 있고요. 이미 있는 것을 뒤에서 열심히 쫓아가다가 뒤돌아보았을 때, 저의 발자취가 소설이 되어 있는 것을 느낍니다.
--- p.60, 「1부_이야기의 역할」 중에서
정말 슬플 때는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프다고 하죠. 그러니 소설 안에 ‘슬프다’ 하고 쓰고 나면, 진정한 슬픔을 다 그릴 수 없어요. 언어가 벽처럼 앞을 가로막아, 마음이 그 너머로 날아가지 못하니까요. 그건 사실은 슬프지 않은 거예요. 슬프다고 느낄 때의 사람 마음속이 어떤지는, 사실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야기라는 그릇을 사용해서 언어로 표현하려고 지속적으로 도전하는 것이 소설이지요.
‘이 소설의 주제는 무엇인가요? 20자 이내로 대답해보세요.’
그런 질문이 있고, 스무 글자의 대답이 떠오른다면, 그 소설은 소설로 쓰일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니 ‘주제만 확실하면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다’ 하는 생각은 환상이에요. 주제는 소설을 읽는 사람 각자가 느끼거나, 평론가들이 논하는 것이지, 쓰는 사람 본인이 플래카드에 써서 드높이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pp.81-82, 「2부_이야기가 태어나는 현장」 중에서
무슨 사건이 생긴다. 그걸 표현한다. 종이에 재현한다. 이것이 언어의 역할입니다. 처음에 언어가 있고, 거기에 맞춰 사건이 움직이는 일은 절대 없어요. 따라서 저는 과거를 보는 것이 소설을 쓰는 원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을 쓸 때, 저는 때로 인류, 인간의 저 끄트머리에서 걷고 있다는 느낌이 들곤 합니다. 인간이 산을 오르고 있다 치면, 선두에 서서 이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작가라는 역할을 하는 인간은 제일 끝에서 걷고 있다는 말이에요. 앞에서 걸어가는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흘린 것, 잃어버린 것, 그런 것들을 주워 모아, 잃어버린 사람조차 자기가 그런 걸 갖고 있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린 것들을 하나하나 주워 모아, 그것이 이 세상에 확실하게 존재했다는 표시를 소설이라는 형태로 남기는 것이죠. 그런 것 같아요.
--- pp.93-94, 「2부_이야기가 태어나는 현장」 중에서
저는 《키다리 아저씨》의 주디나 《신데렐라》의 주인공이 특별하다는 점에 의문을 품은 상태에서 이 책을 만났는데, 인간이 특별한 진짜 의미를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로 배웠다고 봐요.
부자로 태어나거나 왕자에게 선택받아서 특별한 게 아니죠. 자기만의 비밀 정원을 가질 수 있고, 자기가 자기이도록 지탱해주는 장소를 만들 수 있고, 그 장소를 가슴에 간직할 수 있다는 것, 그런 것들이야말로 그 사람에게는 특별함이 아닐까요.
그리고 저는 나도 그럴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이 책은 나도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을 찾을 수 있고, 그걸 열 수도 있다고 느끼게 해주었어요. 쉽게 말해서, 이 책과의 만남은 제가 자아를 의식하게 된 큰 체험이었는지도 모르겠군요.
--- p.129, 「3부_이야기와 나」 중에서
저는 이 두 권의 책을 읽고서 정반대되는 생각을 했습니다. 《파브르 곤충기》에서는, 제가 거대하고 위대한 전체의 작은 일부라는 생각. 한편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에서는 나는 다른 누가 아니며 특별한 한 사람이라는 생각. 이 둘은 언뜻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에게 필요하고 또 공존해야 하는 생각이라는 것을 저는 책을 통해 배웠습니다.
자기를 존중하면서, 자기가 모든 것이 아니라 몸을 맡기기에 충분한 전체의 일부라고 느낌으로써 안심할 수 있었고, 타인을 용서하고, 불운을 받아들이고, 우연에서 의미를 찾아낼 수 있게 된 것이죠. 저는 독서를 통해 한 관문을 행복하게 통과했습니다.
--- p.135, 「3부_이야기와 나」 중에서
읽는 이를 곧장 그곳으로 데려가는 장소의 설정에서 시작해 비로소 이야기가 확대되는 오가와 요코의 작품을 읽으면서 괴테가 말한 ‘자유로운 경지’가 어쩌면 ‘텅 빔’이지 않을까 하고 새로운 뜻으로 읽힌 것은, 이 강연집 《첫 문장이 찾아오는 순간》에서 누누이 강조되듯, 다소곳이 두 손을 허공으로 내밀고 이미 있는 이야기가 자신에게 찾아와주기를 겸허히 기다리는 그녀 모습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인간이 까마득히 먼 옛날에 이미 거기에 새겨놓은 이야기가 그녀의 두 손으로 내려오는 순간, 그녀는 한없이 ‘텅 빈’ 자유로운 상태가 아닐까.
--- p.156, 「옮긴이의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