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딛고 서 있는 땅이 흔들리고 있는데, 땅의 성가신 일들이 창공의 고요함과 무탈함에 침범하는 것을 어떻게든 막겠다는 결의가 넘치는 세상이다. 이를테면 “내 집 대문 앞에 장애인 특수학교가 웬 말이냐”와 같은 현수막이 당당하게 붙어 있는 것처럼. 혐오가 표현의 자유처럼 포장된 곳에선 이동권을 보장하라며 지하철에서 시위하는 장애인에게 “출근 시간을 방해 말라!”면서 화를 내는 이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희망이 없는 여기를 보자는데, 절망을 외면하는 저기만 보기 때문이다.
---「프롤로그」중에서
사람들은 선수가 금메달을 거머쥘 때마다 환호했다. 언론은 수십 개의 특집 기사를 작성했고, 뉴스에는 선수의 초등학교 담임선생님까지 등장하여 훈훈한 이야기를 하기 바쁘다. 금메달리스트는 여러 곳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기업의 광고 모델이 되곤 한다. 한순간에 인생 역전의 주인공이 된 운동선수의 모습은 다른 선수들에겐 ‘지금의 부당함’을 참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어 버린다. 방황할 때 ‘때려 주는’ 스승이 참스승이라고 억지로 생각하면서 버티게 한다. 반복되다 보면 정말로 그런 줄 착각하고 더한 일에도 개의치 않는다. 금메달만 따면 ‘한 방에’ 인생이 달라질 테니까.
---「세 번째 민낯, 맞아도 별수 없다」중에서
사람이 기계 속으로 말려 들어가 몸이 분리되어 사망한다. 사람 몸이 레고 블록이 아니니, 실제 현장은 ‘분리’라는 단어로 온화하게 표현할 수준이 아닐 거다. 그런 일이, 조선 시대도 아니고 2018년도에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자 와이파이가 안 터지는 곳이 없다는 국가에서 버젓이 발생했다. 지문으로 입출금을 하는 디지털 세상에, 기계가 사람의 위험을 감지하고 자동으로 멈추는 시스템 따위는 없었다. 끔찍한 건 이런 사고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고, 이 사고는 좀 더 끔찍했기에 사회적 관심으로 이어졌을 뿐이다. 여기서 사회를 보는 두 갈래가 선명하게 구분된다. 누구는 이 상황을 그대로 내버려 둘 것인가 묻지만, 누구는 어쩔 수 없다면서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이 두 갈래는 그저 다양한 시선이라고 할 수 없다. 전자가 옳고, 후자는 틀렸다. 전자가 불가능한 사회, 후자를 유도하는 사회 모두 나쁜 사회다.
---「네 번째 민낯, 떨어져도, 끼여도, 깔려도 별수 없다」중에서
죽는 마당에 공과금이라니, 삶을 포기하는 순간까지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이웃으로서의 도리를 포기하지 않았던 셈이다. 세 모녀의 메모는 복지를,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인생 밑바닥까지 추락한 사람이라고 인정받는 사람들에게 밥 굶지 말라고 용돈 주는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나 다름없었다. 서류만으로, 종이 위에 찍힌 몇 가지 숫자만으로 복지가 완성된다는 건 착각이라는 거다. 어떤 가난은 서류 몇 장으로, 단순한 숫자만으로 증명하기 힘들다. 송파구 세 모녀는 눈앞의 평범한 사람들이 실제로는 위태로운 상황일 수도 있음을, 시스템이 이들의 위기를 포착하지 못할 수도 있음을 깨닫게 했다.
---「다섯 번째 민낯, 일가족이 죽어도 별수 없다」중에서
언론에서는 “초유의”, “전례 없이” 등의 표현으로 묘사하면서 n번방 사건을 우주에서 온 악인들의 소행처럼 다루었지만, 우리는 독버섯이 땅에서 자랐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이 특별히 악하게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만, 보통의 세계에서는 마주할 수 없는 악마가 아니라 출석부에 흔히 등장하는 평범한 아무개라는 걸 받아들여야만 지금껏 우리 사회가 디지털 성범죄에 소극적으로 대응했다는 걸 인정할 수 있다. 한쪽을 변태라 취급하면, 역설적으로 다른 한쪽의 문제에는 둔감해진다. n번방을 만들고 운영한 이들은 물론이고 문을 열고 들어온 이들까지, 모두가 한국의 문화 속에서 성장했다. 특별한 DNA 구조를 지니지 않았다.
---「여덟 번째 민낯, 우리는 또 둔감해질 것이다」중에서
‘폭식투쟁’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여러모로 비판을 많이 받았다. 그들을 악마, 패륜 등으로 묘사한 글들이 쏟아졌다. 저들을 대한민국과 어울리지 않는 일부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과연 그럴까? 내가 느낀 먹먹함은 단지 그들의 기행을 목격한 불편함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추모한다는 것의 한계와 슬픔에 공감한다는 것의 미흡함을 다시 마주했기에 느껴지는 몸서리였다. 그들 위로 ‘우리’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추모의 감정을 학습하지 못한 설익은 모습들 말이다. ‘지하철 투신으로 출근길 혼란’이라는 표현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우리들 말이다. 학교에서 친구 누가 자살을 한들 ‘동요하지 말고 공부나 하라’는 소리를 들으며, 그냥 덮고 넘어가기에 급급했던 우리들 말이다. 죽은 사람 이야기가 몇 번 반복되면 ‘산 사람은 살아야되지 않냐’면서 추모를 지겨움의 프레임에 가두는 ‘구조적인’ 감정 상태로부터 누가 자유로운가. 폭식투쟁은 그 토양 위에서 자란 괴상한 나무였을 뿐이다.
---「열 번째 민낯, 우리는 끝없이 먹먹할 것이다」중에서
우리는 일곱 번 넘어져서 결국 다시 일어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껐다. 우리의 ‘정의’ 관념은 이런 적자생존의 법칙 위에서 빚어졌다. 사람들은 ‘정의’를 모두가 동등하게 실질적으로 평등한 권리를 누린다는 측면이 아니라, 노력의 크기에 따라 각자 도달하는 지점이 불가피하게 달라지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결과가 불평등해도 노력한 만큼이니 공정하다 여겼다. 자본주의의 성장과 함께 형태를 갖춘 근대 공교육은 ‘공정한 불평등’ 논리를 부단히 가르쳤다. 계급과 상관없이 누구나 학교를 다니니 기회는 평등해졌다고 포장했다. 그러니 시험 결과에 승복하라고 주술을 건다. “결과로 증명하라!”라는 말이 부유하는 세상에선, 결과를 의심하는 건 공정하지 않다고 여겨졌다. 조국 사태는 이 판이 깨진 게 아니다. 이 판의 정밀함, 견고함, 그리고 무서운 폭력성이 고스란히 드러난 일이었다. 불평등은 자본주의사회의 부작용 정도가 아니라, 매우 정교한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매일 속고 있다.
---「열두 번째 민낯, 우리는 역시나 순진하게 믿는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