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라고 하면 조선의 첫 번째 왕이라는 사실만 떠올리기 쉽지만, 사실 그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왜구를 무찌른 고려 최고의 장군이었습니다. 왜구뿐만 아니라 홍건적과 여진족, 원나라 군대를 격퇴하며 영토를 지키고 고려를 구해냈으니 그야말로 고려의 영웅이었죠. 1388년, 그랬던 그가 요동을 정벌하라는 어명을 어기고 위화도에서 말머리를 돌려 군사들을 이끌고 수도 개경으로 향합니다. 수도를 점령한 뒤에는 왕위에 올라 조선을 세우지요. 위기마다 목숨을 바쳐 싸웠던 이성계는 어째서 더 이상 고려를 지키지 않고 새 나라를 세웠을까요? 지금부터 이성계가 고려의 역적이 된 그 내막을 벗겨보겠습니다.
---「1장 벌거벗은 태조 _이성계는 왜 어명을 어기고 말머리를 돌렸나」중에서
최측근인 왕건까지 의심하기에 이른 궁예는 자꾸만 커지는 불안감을 떨쳐내려는 듯 공포정치를 강화했습니다. 날마다 사람들이 죽어나갔지요. 궁예의 폭정을 보다 못한 부인 강씨는 울면서 남편에게 간청했습니다. “옳지 않은 일을 그만하십시오!” 궁예는 불같이 화를 내더니 갑자기 부인에게 죄를 물었습니다. “나는 부인이 다름 남자와 바람 피운 것을 알고 있소.” 관심법으로 부인의 외도를 알아냈다는 것이지요. 강씨는 절대 그런 일이 없다고 말했지만 궁예는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추국장에서 부인을 신문한 궁예는 유죄를 내리고, 결국 강씨는 처형당하고 맙니다. 그리고 부인에 이어 두 아들까지 잔인하게 때려 죽였습니다. 가족까지 죽이는 만행, 이는 궁예를 폭군으로 기억되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2장 벌거벗은 폭군 _궁예는 왜 왕건의 마음은 읽지 못했는가」중에서
의자왕은 재위 20년 중 15년을 정복 군주로 살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의자왕의 이름을 듣고 떠올리는 것은 삼천 궁녀를 거느린 방탕한 군주의 이미지입니다. 나라를 지키지 못한 백제의 마지막 왕이기 때문에 지금껏 사치와 향락을 즐긴 것으로만 기억되며 삼천 궁녀와 같은 과한 오명을 쓰게 되었지요. 의자왕이 초심을 잃지 않았다면 백제뿐만 아니라 삼국의 운명이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처음의 마음가짐을 건강한 방향으로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은 비단 왕에게만 필요한 덕목은 아닐 것입니다. 인물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통해 현재의 우리도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이 또한 역사가 주는 여러 의미 중 하나이니까요.
---「3장 벌거벗은 마지막 왕 _의자왕은 어쩌다 백제의 마지막 왕이 되었나」중에서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은 브레이크가 없는 기관차처럼 폭주를 거듭합니다. 국정은 내팽개친 채 술과 여자에 빠져 세월을 보내지요. 연산군은 각 고을에 모아둔 가무 기생을 ‘운평’이라 이름 붙이고, 그중에서도 가장 예쁘고 춤과 노래 솜씨가 좋은 사람들을 뽑아 ‘흥청’이라고 불렀습니다. 흥청들에게 수시로 재물과 노비를 내리는 것은 물론, 그들의 부모를 한양으로 불러 집과 땅까지 사주었습니다. 왕이 정사를 보던 경복궁과 창덕궁은 연산군과 흥청들이 즐기는 놀이터가 되어버렸습니다. 연못에 배를 띄워 뱃놀이를 즐기기도 했지요. 여기서 비롯된 말이 바로 ‘흥청망청’입니다.
---「5장 벌거벗은 폐왕 _연산군은 왜 미치광이가 되었나」중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에는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합니다. 왕실이라는 배경을 무시하고 영조와 사도세자를 평범한 부자 관계 속에서만 바라본다면, 사도세자의 죽음은 계속해서 미스터리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말입니다. 왕실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돌아가는 곳이니까요. 사도세자도 처음에는 아버지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자란 아들이었습니다. 평범한 부자 관계가 아니라 왕과 세자의 관계을 뿐이죠. 사도세자의 죽음은 정치적 이해관계를 고려해야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사건입니다. 이렇듯 탐구적 시선으로 역사를 바라본다면, 불가해한 인물이나 사건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6장 벌거벗은 왕세자 _사도세자는 왜 뒤주에 갇혀 죽어야 했나」중에서
애민정신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돌보았던 세종이 왜 유독 며느리들에게는 차가운 면모를 보였을까요? 왕위 계승의 정통성이 부족한 셋째로서 왕이 되어 그런지, 세종은 국가와 집안 모두 자신이 생각하는 유교적 이상에 들어맞기를 원했습니다. 세종은 만기친람의 정신으로 정사만 돌본 것이 아닙니다. 가정 또한 자신이 다스려야 하는 영역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아들 부부의 문제 역시 정사를 보듯 개입한 것이지요. 요즘 관점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지만, 세종은 왕인 동시에 가장으로서 유교적으로 완비된 왕실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7장 벌거벗은 성군 _세종대왕은 어쩌다 며느리 넷을 쫓아냈나」중에서
재결합을 하라는 왕명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아내를 버렸고, 친정 부모 또한 딸을 따뜻하게 품어주지 못했습니다. 배필로 삼아도 될 만큼 좋은 남자를 소개해주겠다는 여종의 말은 조선 시대에 상상하기 힘든 파격적인 것이었지만, 홀로 탄식만 하고 있던 어우동에게는 솔깃한 제안이기도 했습니다. 어우동은 결국 여종의 은밀한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공식적으로 이혼한 상태가 아닌지라 재혼이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자신의 신분인 양반가 여성의 삶을 유지하는 대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선택한 것입니다.
---「8장 벌거벗은 스캔들 메이커 _어우동은 정말 죽을죄를 지었나」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