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3년 11월 18일 |
---|---|
쪽수, 무게, 크기 | 344쪽 | 470g | 150*210*30mm |
ISBN13 | 9788953119901 |
ISBN10 | 8953119901 |
발행일 | 2013년 11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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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44쪽 | 470g | 150*210*30mm |
ISBN13 | 9788953119901 |
ISBN10 | 8953119901 |
추천의 글 들어가기 전에 리디머교회에서 답을 찾았다 프롤로그 일은 단순히 ‘밥벌이’가 아니라 소명이다 part 1 일, 하나님의 황홀한 설계 일과 쉼의 균형이 필요하다 1 행복하고 싶다면, 주님처럼 일하고 주님처럼 쉬라 일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2 세상에 하찮은 일은 없다 일은 하나님을 닮아 가는 수단이다 3 일터에서 주님의 매뉴얼을 따라 야심차게 일하라 일은 목적이 있는 소명이다 4 자신만을 위하지 말고 하나님과 세상을 위해 땀방울을 흘리라 part 2 일, 끝없이 추락하다 아무리 일해도 열매가 없다 5 밤낮없이 매달려도 입에 풀칠하기조차 버겁다 일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다 6 그저 성공의 쳇바퀴를 따라 무작정 달리기만 한다 탐욕의 수단으로 변질되다 7 고생해서 이만큼 일구었는데 이걸 포기할 수는 없어! 일이 인생의 전부가 되다 8 인생이 통째로 일에 빨려 들어가 망가지다 part 3 일과 영성, 복음의 날개를 달다 복음의 관점으로 일을 이해하다 9 회사 신우회에 참석하는 선에서 만족하지 말라 일에 대한 이원론을 배격하다 10 이건 세상 일이고 저건 하나님 일이라는 이분법을 배격하라 일을 하는 동기가 바뀌다 11 높은 보수나 칭찬을 위해 일하지 말라 새로운 능력으로 일하다 12 구원의 확신을 가슴에 새기고 열정을 품고 일하라 에필로그 리디머교회가 하고 있는 ‘일과 신앙을 하나 되게 만드는 법’ 감사의 글 주 펼처보기 |
언젠가 이런 꿈을 꾼 적 있다. 하나님 앞에 들려 올라갔던 것.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주님 앞에 호출되어 섰다. 어리둥절하고 덜덜 떨리는 내게 흰옷을 입은 예수께서 물으셨다.
"어떻게 살다 왔는지 네 입으로 직접 얘기해 보아라."
뭐라고 해야 하는건지 몰라 입에서 나오는대로 말했다.
"예 저는 학교도 열심히 다녔고 공부도 곧잘 했으며 결혼해서 아이도 셋 낳았고..."
어쩌고 저쩌고 떠벌리는 사이 나는 갑자기 서 있는 모습 그대로 다시 땅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허우적거리며 다시 불러달라고 하자 나는 도로 주님 앞에 서게 되었다.
인자하게 웃으시며 예수께서 다시 물으셨다.
"그래 그거 말고 이제는 내가 네게 준 달란트를 가지고 이웃과 어떻게 나누고 어떻게 사용하며 살다 왔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아라."
그리고는 잠에서 깨었다.
나는 내가 잘나 학교 다니고 아이 낳고 돈 벌며 산다고 무의식 중에라도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살다 왔느냐는 질문에 고작 내가 했던 대답이 그거였으니 ...
나는 최소한 그게 살면서 제일 내세울만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나보다.
그런데 그 꿈을 꾼 후 오래오래 생각하게 되었다.
모든 게 다 주님 주신 은혜와 달란트로 인해 내가 누린 것이었구나.
그리고 나는 그것을 나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닌 이웃과 나누고 사랑하는데에 쓰는 게 하나님 뜻하시는 삶인 모양이구나...
깨달음은 얻었으나 살면서 늘 그것을 염두에 두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쉽지만은 않았다.
특히 집안일을 하고, 그러느라 어떤 날은 밖으로 한발자국도 나가보지 못하며 살아가는데 그게 이웃과 공존하며 나눔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은 죄다 나 자신을 위한 일들이었지 과연 그것이 이웃과 나누는 삶이며 내 달란트를 바르게 쓰고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 자신만의 안위를 위한 일이 그러므로 즐겁지 않았고, 즐거웠다고 해도 내가 잘 살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모두가 목회자가 되어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일하며 그 가운데 소금과 빛의 삶을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직장 생활을 하는 게 아니고 누군가를 위해 뭔가를 할 능력도 안되고 게다가 누군가를 만난들 소금과 빛으로의 삶은 뭐 어마어마하게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아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걸까? 나는 내가 그토록 원치 않는 선데이 크리스찬일 뿐인가?
예배 드리러 가는 그 날만 회개하고 은혜받고 도로 삶의 자리에 돌아와서는 다시 그냥 나로 살아가는 그런 사람일 뿐이란 말인가?
내가 하는 일에서의 최선을 다하는 것은 어려워도 할 수 있지만 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빛과 소금의 삶이며 주님의 제자된 삶이며 이렇게 집에서 청소하고 빨래하고 밥하고 애 키우며 어느 세월에 기쁜 소식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일한단 말인가?
팀 켈러 목사님의 <일과 영성>을 읽어가는 동안 내가 그동안 안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상당한 부분에서 오해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일단 우리의 일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쫓겨난 인간들이 그와 동시에 받게 된 형벌이 아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일은 하나님의 완벽한 창조역사 안에 포함된 것이며 하나님도 일하셨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있다.
또한 굳이 인간이 쟁기질을 하고 씨앗을 뿌리지 않아도 하나님은 쉬 낟알과 과일을 주실 수 있지만 그러고 싶어 하지 않으신다는 루터의 말을 인용하면서 (p.86) 부모도 자식을 위해 무엇이든 해 줄 수 있고 더 잘 할 수 있지만 자녀들이 그 일을 성숙하게 스스로 해 낼 수 있도록 돕는 쪽을 택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나님께서 하실 수 없어 일을 맡기신 것도, 우리의 죄로 인해 그 벌로 일하게 된 것도 아님에 대해 이야기 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노동에 대해 그 중요성이나 신성함을 간과하는 것은 옛 그리스 철학자들의 철학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크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있다. 일의 중요성, 일의 본질, 크리스찬이 일에 관해 바르게 정립할만한 설명들이 나오면서 크리스천이라면 세상에서 자신이 하는 일의 목적에 대해 혁신적인 통찰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p.83)
목회자이자 작가인 필립 젠센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하나님이 세상에 오신다면 어떤 모습일까? 고대 그리스인들은 철학자 - 왕일 거라고 생각했다. 고대 로마인들은 정의롭고 고상한 정치가를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히브리 땅에 임하신 하나님은 어떠셨는가? 목수로 오셨다." (p.61)
이렇게 일에 관하여 하나님이 불러서 과업을 맡기셨다는 사실 자체가 힘을 주므로 자아를 실현하고 권력을 얻을 속셈으로 직업을 선택하거나 일을 대해서는 안되고 도리어 일을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도구로 보아야 하며 그 목적에 따라 직장을 선택하고 업무에 임할 필요가 있다고 하고 있다. 그러면서 "지금 가진 능력과 기회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과 이웃의 요구를 늘 의식하면서 최대한 다른 이들을 섬길 수 있을까? 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p.83)
다시 꿈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는 분명히 그렇게 들었고 깨달았으면서도 명확히 일이라는 것의 본질이나 범주에 대해서도 오해하고 있는 대목이 있었고 (일은 어떤 일도 하찮거나 특별하지 않다고 말로만 했을뿐 내가 하는 일을 귀하다고도 여기지 못했고 그 일을 통해 또한 섬길 수 있는 일로 연결시키는 것에 대해 잘 몰랐던 것 같다. 일마다 나도 모르게 어떤 구별을 하고 있었던 듯) 따라서 지금의 내가 하는 일은 일도 아닌 듯 여기며 죄책감만 많이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팀 켈러 목사님은 세상에 하찮은 일은 없고 일은 목적이 있는 소명으로 그 일을 탁월하게 할 능력을 가지고 잘 해 내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이며 목회자나 성직자들의 일이 하나님 나라의 일이 아님에 대해 말해준다. 직장에서 일하며 또 따로 전도활동을 하거나 따로 섬김의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는 그 일을 탁월하게 해 내는 능력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하는 삶이 귀하다고 말한다. 일에 대해 이원론을 갖는 것을 배격하며.
그러나 어렵다. 우리가 아무리 그렇게 알고 그렇게 순종하여 자신의 일을 탁월하게 해 내더라도 열매가 없고 일이 힘들고 그 가운데 어떤 경우엔 일 자체에 빠져 어떤 다른 우상숭배가 되는 때도 생기는 등 많은 어려움이 있다. 그렇게 의미없이 성공의 쳇바쿠를 따라 무작정 달리기만 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복음의 관점으로 일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많은 이야기들을 덧붙이고 있다.
<일과 영성>은 part 3로 나누어져 구성되어 있다. 일이란 하나님의 황홀한 설계임을 첫번째로 이야기 하고 두번째 장에서는 그러나 그 일이 아무리 해도 열매가 없고 또 탐욕의 수단으로 변질되어 일이 인생의 전부가 되어 버리는 것에 대해 경계하고 있다. 세번째 장을 통해 일과 영성, 복음의 관점으로 이해하고 일에 대한 이원론을 배격하여 이야기 해 준다. 이건 세상 일이고 저건 하나님의 일이라는 이분법을 배격하라는 이야기를 통해 내가 오해했던 것들을 깨달았다. 결국 구원의 확신을 가슴에 새기고 열정을 품고 일하라고 권고해 주는데 크리스천으로써 읽고 나면 뭔가 해결되고 살아가며 일하는 데에 있어 더 큰 기쁨과 하나님의 뜻을 알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은혜가 된다.
하지만 늘 이런 깨달음과 은혜도 잊지 않고 내 삶에 잘 적용할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알긴 알았으되 늘 그렇게 열정을 품고 일하는 것이 수월하고 자연스럽게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삶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일과 삶이 고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위대한 소명임을 깨닫고 일하는 동안 어떻게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면 되는지에 대한 답을 구하는데에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본다.
팀 켈러 목사님의 책들은 신작이 나올 때마다 기다리며 읽곤 하는데
이 책은 특히나 번역이 아쉬운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책 내용에 관한 리뷰는 이미 많은 분들이 올려두셔서 번역이 아쉬웠던 점만 리뷰합니다)
간혹 네 다섯줄씩 너무 길어서 읽는 동안 길을 잃게 만드는 문장들이나 (번역하는 분도 머릿속에서 정리가 덜 된 것 같은..)
영어문장을 한국어로 바꾸는데 급급해 보이는 문장들이 참 많더군요.
물론 그렇게 한다해도 내용 자체가 틀렸다거나 읽기가 불가능한 건 아니니 큰 문제가 아닐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권의 책이 대부분 이런 식으로 번역되어 있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까요?
p98.
장 칼뱅은 "부르심에 순종하도록 주어진 세상의 그 어떤 일도 너무 지저분하고 천해서 빛이 나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지 않으며 하나님의 눈에는 한없이 소중하게 비쳐질 것"이라고 했다.
같은 번역투의 불친절한 문장들..
좀 더 매만졌더라면 훨씬 나아졌을 문장들로 가득합니다.
좋은 번역은 단지 외국어를 우리말로 바꾸는 것에서 만족할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쉽고 빠르게 그리고 문장이 의미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이해하도록 고민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궁전에 속한 요소를 버리고도 새로이 이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있을 것일까?의 오타인가요)
-환경을 지키는 따위의 대의를 실현하려는 대의라든지
-이편의 제안을 인수회사 이사회가 검토하는 동안, 데이비드는 사무실 구석에 틀어박혀 기다리며 생각했다.
(챕터의 첫문장인데 이편이라는 표현보다는 '자신이 속한 회사' 같이 전후맥락을 좀더 풀어줬다면 어땠을지요)
-페리의 설명에 따르면, 그리스인과 로마인 사이에서는 인간이라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타고난 재주나 능력에 두었다.
('무엇을' 사실 자체가 아닌 재주나 능력에 두었는지, 목적어가 빠진 문장이네요.)
-지금 어떤 처지에 있는지 하나님이 정확히 알고 계시며 맡겨 주신 일을 충실히 해내는 게 주님을 섬기는 과정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렇게 주술이 제대로 호응하지 않는, 호응하다가 만, 기초적인 실수를 범한 문장들이 너무 많아요. 예를 들면
"가을운동회가 학생들의 체력을 증진하는 효과가 있으며 참가한 학생들은 기쁨을 얻는다." 식의 앞뒤가 맞지않는 문장들.
중고등학교 시절 국어시간에 비문 고르는 문제에서 보기로 많이 본 그런 문장들 말이죠.)
-> 지금 어떤 처지에 있는지 하나님이 정확히 알고 계시다는 사실과 ~ 해내는 게 섬기는 과정임을 인정하고..
이렇게 정리해주셨다면 어땠을까요?
그 외에도 책 곳곳에서 '그들'을 '그이들'로 번역한 부분이 유독 눈에 띄는데
-그이들의 사례를 보면서 깨달아 알아야 한다.
복음은 그이들뿐만 아니라 크리스천들의 내면에도 죄가 도사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사역자들은 그이들을 '사람'이라고 부르죠. 등등
처음엔 '그이들'이 주는 어감이 특별히 필요한 부분이었나싶어 그런가보다 하고 읽었지만
문맥에 상관없이 한결같이 그들을 '그이들'로 바꿔 쓰시는 걸 보고 번역가분의 고집으로 이해했습니다.
물론 저보다야 번역가분이 이 책을 훨씬 많이 읽고 또 읽으셨겠지요.
또,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는 번역하는 분의 자유영역이기에 저의 리뷰가 지나치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그리고 읽고 난 후 든 생각은 "정말 번역이 이게 최선이었을까?" 였습니다.
어법에 맞지 않는 비문이 많은 것 외에도 원서를 한번 봤음 좋겠다싶은 문단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간혹 이야기가 잘 진전되다가 한번씩 앞 뒤 맥락이 잘 맞지 않는 부분이 나와서
처음부터 팀 켈러 목사님이 이렇게 쓰신건지 번역과정에서 의미가 누락되거나 소홀히 다뤄진 부분이 있는지 궁금했거든요.
번역이 잘 된 책들을 보면 표면적으로 문장들이 사려깊게 번역됐을 뿐만 아니라 (최선을 찾고자했던 시도가 보이는)
그 이면에 저자가 말하고자 했던 서브텍스트까지도 끊김없이 잘 전달되고 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지요.
반대로 번역이 아쉬운 책들은 문장들을 채집해 엮은 것처럼 밀도가 떨어지고
무엇보다 책 전반에 흐르는 서브텍스트의 실종으로 저자가 안 보이는 결과를 보여줍니다.
이 책은 후자인 것 같습니다.
팀 켈러 목사님의 다른 책을 읽을 땐 목사님의 메시지가 잘 전해지는데..
이 책에선 팀 켈러 목사님의 목소리가 전혀 전달되지 않아요.
그냥 기계에서 문장들이 줄지어 나오는 것처럼 누군가가 말하는 일련의 정보만 얻을 수 있을 뿐입니다.
쓰면서 조금 표현이 격해진 이유는 책꽂이를 보다가 이전에 읽었던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 도
같은 분이 번역하셨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그 책의 번역도 만만치 않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데만 급급해서는 정말로 원서가 담고 있는 내용을 온전히 전달할 수 없습니다!!!
번역하는 사람이 먼저 행간에 흐르는 의미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고 어떻게 다른 언어로 그것을 전할 수 있을까요?
두란노를 통해 해외 목사님들의 다양한 서적들이 끊임없이 번역,출판되는 것은 참 기쁜 일입니다만
가끔 너무 속도에만 열을 올리는 건 아닌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오탈자도 심심찮게 발견되곤 하구요.)
좋은 책을 발빠르게 전해주시는 것도 좋지만
한번 나온 책을 다시 만들기는 어려운 만큼 번역과 편집의 질에도 더욱 신경을 써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ps. 추가로 챕터별 주석이 맨 뒤에 있어서 책을 읽는 동안 앞뒤를 오가며 읽어야하는데
페이지 쪽수 밑에 각 챕터제목을 달아주셨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근 ‘일상신학’이 주목을 받고 있다. ‘신학’을 신학자들만 하는, 그들만의 작업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날마다 살아가는 현장을 성경적으로 해석하는 일로 바라보려는 (바람직한) 생각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일’은 우리가 하루 중 깨어있는 시간의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영역이고, 이에 대한 신학적 고찰을 해 보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일 것이다.
그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번 책에서도 팀 켈러는 다루려는 주제를 체계적으로 구성하고 설명한다.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에서, 저자는 일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선함과 유익을 정의하고(1부), 이것이 왜 오늘날처럼 변질되었는지를 분석한 후(2부), 어떻게 하면 일이 가진 본래의 가치를 되살릴 수 있을지를 제안(3분)한다.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전통적인 기독교 세계관의 틀을 따른 알찬 구성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지만, 그 ‘일’이 갖는 신학적 의미를 제대로 알고 하는 경우는 적은 듯하다. 그저 ‘밥벌이’를 위해서, ‘하는 수 없이’ 매일 무표정한 얼굴로 출근을 하는 사람들로 도로와 전철은 날마다 가득 찬다. 앞서도 말했듯, 우리가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의 시간’이 그렇게 우리를 소진시키기만 하는 시간이어도 되는 걸까?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닐까
저자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여하신 특별한 사명으로서의 일을 강조한다. 그건 우리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명령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일을 해야만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일이 “영혼을 고치는 약이 아니라 영양을 공급하는 밥”이라는 지적은 탁월하다. 매일매일 노동을 통해 무슨 특별한 물리적, 정서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더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노동은, 가장 온전한 그 나라에서 우리가 얻게 될 참된 만족과 유익, 즐거움을 제한되게나마 동료 인간들에게 맛볼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기도 하다는 지적도 크게 와 닿는다(이 점은 ‘모든 좋은 열매는 천국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는 C. S. 루이스의 설명과도 일맥상통한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통찰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자동적으로 이런 선한 목적을 위해 봉사하게 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다른 이들을 섬기도록 하나님이 주신 과업으로 일을 새로이 정의하는 과정이 선행되지 않으면 일상적인 일은 소명이 될 수 없다”면서, 일을 대하는 우리의 시각을 바꾸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지적한다. 스스로가 하는 일에 대한 분명한 비전을 갖지 못하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일에 관한 세상적 그림에 따라 노예처럼 매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 일에 관한 성경적 비전을 왜곡시키는 다양한 타락의 양상을 지적하는 2부도 꼼꼼히 살펴볼 만하다. 특히 “직업적인 성공에서 구원(자존감과 자부심)을 찾으려” 하는 모습에 관한 지적은 탁월하다. 흔히 ‘타락’하면 떠오르는 어둡고 음침한 이미지와는 달리, 이쪽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고, 좋은 보수와, 쾌적한 사무실을 얻는 일이다. 하지만 이 역시 일에 관한 타락한 비전이라는 것은 기억하는 건 중요하다.
결국 이런 잘못된 비전은 우리를 일중독으로 몰아가고, 더 높은 생산성을 위해 인간을 부품화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오늘날 노동과 관련된 일 전반에 깔린 인간성 소외현상은 딱히 놀라운 일도 아니다.
일을 통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로 ‘능숙한 사역’을 꼽는 부분도 인상적이다. 일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은 결과는 어찌되었든 의도만 좋으면 다 좋다는 식이 아니다. 직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웃는 얼굴’ 이상을 보여주어야 하고, 일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는 비그리스도인과 동일한 기준으로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만약 그렇지 않다면, 기독교인들이 가진 자원은 금세 바닥나고 말 것이다)
다만 일에 관한 바른 비전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실제적인 방법을 좀 더 담아냈다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은 남는다. 책은 이 주제에 관한 신학적 고찰을 잘 정리했지만, 저자도 언급하듯 무엇인가를 잘 가르친다고 해서 그걸 배운 사람들이 그대로 해 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물론 그 부분을 다루기 위해서는 또 다른 책 한 권이 필요할 것 같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