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터줏대감’은 서가의 책 가운데서 한 권을 빼내더니 내 무릎에 던졌다. 『핵폐기물에 미래는 있는가?』라는 제목의 책이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핵폐기물 처리 문제를 논하기 전에 자기 책 뒤처리나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안 드니?” “그래? 콜록, 콜록…….” 나는 기침을 하면서 책을 돌려주었다. ‘터줏대감’은 그것을 받아들자 안의 한 페이지를 쫙 찢었다. 나는 눈을 의심했다. ‘터줏대감’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종이를 뭉쳐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콜록콜록! 뭐 하는 거니, 지금?” 그러자 ‘터줏대감’은 보란 듯이 계속 책을 찢기 시작했다. --- p.34
아키바는 깊이 후회하고 있었다. 참아야 했다. 자신이 참지 않으면 이내 깨져버릴 관계라는 것을 아키바가 가장 잘 알고 있다. “히로코?” “응?” “오타루에 가보지 않을래?” “…….” “오타루에 가서 이 사람을 만나보지 않을래?” “…….” “이왕 이렇게 된 바에 본인을 만나보지?” “……” “그 녀석과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잖아. 만나보자.” --- p.69
# 후지이 이츠키 님. 그는 언제나 먼 곳을 응시하는 듯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눈동자는 언제나 투명해서 지금까지 만난 누구보다 아름다웠답니다.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였을까요. 그러나 그를 좋아하게 된 것은 분명 그것이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등산과 그림을 좋아해서 그림을 그리고 있든지 산에 오르고 있든지 언제나 둘 중 하나였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의 산에 오르고 있거나 그림을 그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당신의 편지에서 여러 가지를 추리합니다. 예를 들면 당신의 편지에 “도서실에 와도 방해만 할 뿐”이라고 씌어 있으면, 그였다면 어떤 식으로 방해했을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라면 아마도 이상한 짓을 했겠지, 책에 이상한 낙서를 하진 않았을까, 하고 맘대로 상상해 보기도 합니다. 무엇이든 좋으니 가르쳐주세요. 저는 추리를 하는 즐거움이 있으니까요. 부디 부탁드립니다. 와타나베 히로코 --- p.140
“그때는 사십 분이었어.” “더 걸렸어요.” “아냐. 정확하게 말해줄까? 집을 나가 병원 현관에 도착할 때까지 삼십팔 분 걸렸다.” “…….” “그래도 늦었다. 어쨌든 이미 늦었던 거야.” “…….” “지금 나가면 구급차가 여기 도착하기 전에 병원에 도착할 수 있어.” “하지만 이런 눈 속을 걸어가는 건 무리예요.” “걷지 않아.” “예?” “뛸 거야.” “그런…….” “난 눈 속에서 자랐다. 이런 눈 따위 문제도 아니다.” 엄마는 혼란스러워 잘 판단할 수 없었다. “어떡할래?” “…….” “이츠키는 네 딸이다. 네가 정해라.” “……담요 갖고 올게요.” --- p.192
그 말을 듣고 히로코는 뭔가 소리치려고 했지만 아키바가 옆에서 보고 있는 것이 쑥스러워서 설원 중턱까지 뛰어갔다. 그리고 누구도 거리낄 것 없이 큰소리로 외쳤다. “잘 · 지 · 내 · 고 · 있 · 나 · 요? · 나 · 는 · 잘 · 지 · 내 · 고 · 있 · 어 · 요! · 잘 · 지 · 내 · 고 · 있 · 나 · 요? · 나 · 는 · 잘 · 지 · 내 · 고 · 있 · 어 · 요! · 잘 · 지 · 내 · 고 · 있 · 나 · 요? · 나 · 는 · 잘 · 지 · 내 · 고 · 있 · 어 · 요!” 그러다 눈물에 목이 메어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