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23년 02월 0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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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336쪽 | 506g | 133*210*25mm |
ISBN13 | 9791192085913 |
ISBN10 | 1192085914 |
발행일 | 2023년 02월 0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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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336쪽 | 506g | 133*210*25mm |
ISBN13 | 9791192085913 |
ISBN10 | 1192085914 |
MD 한마디
좌파가 힘을 잃었다. 대안을 향한 상상도 멈추었다. 불평등, 착취가 사라진 건 아니다. 지금의 모순을 직시할 개념이 필요하다. 낸시 프레이저는 '식인 자본주의'라고 명명한다. 인종, 돌봄, 생태, 민주주의 위기를 분석하고 무너져내린 인간의 존엄성을 복원하려 시도한다. - 손민규 사회정치 PD
감사의 글 서문_‘식인’이라는 은유 1장 걸신들린 짐승: ‘자본주의’의 재인식 -왜 우리의 자본주의관을 확장해야 하는가 다시,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마르크스의 ‘감춰진 장소’ 이면의 또 다른 장소들 하나, 상품 생산에서 사회적 재생산으로 둘, 경제에서 생태로 셋, 경제적인 것에서 정치적인 것으로 넷, 착취에서 수탈로 자본주의는 ‘경제’ 그 이상이다 경계투쟁, 새로운 비판이론을 위하여 제 살 깎아먹기의 위기 2장 수탈 탐식가: 착취와 수탈의 새로운 얽힘 -왜 자본주의는 구조적으로 제국주의적-인종주의적인가 교환, 착취, 수탈 축적으로서 수탈: 경제적 논의 예속으로서 수탈: 정치적 논의 인종화된 축적의 역사적 체제들 자본주의는 여전히 필연적으로 인종주의적인가? 3장 돌봄 폭식가: 생산과 재생산, 젠더화된 위기 -왜 사회적 재생산이 자본주의 위기의 중심 무대인가 생활세계에 무임승차하기 자본주의 돌봄 폭식증의 역사적 발작 식민화와 가정주부화 포드주의와 가족임금 맞벌이 가구, ‘진보적 신자유주의’의 탄생 또 다른 자본주의인가, 새로운 사회주의 페미니즘인가? 4장 꿀꺽 삼켜진 자연: 수탈?돌봄?정치와 얽혀 있는 생태 위기 -왜 생태정치는 환경을 넘어 자본주의에 맞서야 하는가 자본주의의 생태적 모순: 수도꼭지와 하수구로 전락한 자연 서로 얽힌 모순들 ‘자연’을 말하는 세 가지 방식 사회생태적 축적의 역사적 체제들 동물의 근력 석탄왕 자동차 시대 새로운 인클로저, 금융화된 자연, 그리고 ‘녹색자본주의’ 시공간 속에서 자연을 통해 제 살 깎아먹기 서로 얽힌 투쟁들 환경을 넘어서는 반자본주의적 생태정치를 향해 5장 도살당하는 민주주의: 정치와 경제의 분할 -왜 정치 위기는 자본에게 붉은 살코기인가 자본주의 ‘그 자체’의 정치적 모순 국가, 공공재, 공적 권력 자본주의 역사 속의 정치 위기들 글로벌 금융, 부채, 그리고 이중의 고통 정치적 교착 상태, 비상한 역사의 갈림길 6장 진정한 대안의 이름으로: ‘사회주의’의 재발명 -21세기에 사회주의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그래서 다시, 자본주의란 정확히 무엇인가 자본주의에서 도대체 무엇이 잘못됐는가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사회주의 에필로그_팬데믹, 식인 자본주의의 광란의 파티 옮긴이 후기 주 |
저자에 대해 사전에 알고 있는 바가 없으나, 이 책에 대한 소개글들을 보고, 또한 몇몇 SNS 상 지인들의 평을 보고서 관심이 갔고, 그 과정에 우연히 들린 서점에서 무엇보다 표지디자인의 깔끔함에 반해서 구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해, 그것들이 오늘날에 작동하는 방식과 인식구조 상에서의 위치를 정리하고, 이론적 측면에서 기존의 입장들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주장을 차근히 정리하려는 시도가 탄탄해보였다.
어찌보면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고 볼 수도 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오늘날에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글들은 이미 차고도 넘치니까... 착취와 수탈, 생산과 재생산, 인간과 자연, 그리고 정치와 경제의 구분에 대한 문제점을 현상적으로 그리고 이론적으로 지적하는 글들이란 소위 사회과학 문헌들의 대부분이 아니던가. 하지만, 낸시 프레이저는 아주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4개의 구분의 현재와 그 문제점 모두가 '자본주의'의 문제이며, '사회주의'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일 수 있지만, 지난 100여년동안 극복하지 못하고 패퇴하고 있었다고 말이다.
이 역시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라고도 하겠다. 강하게 인상으로 남는 것은, 이러한 주장을 교과서를 쓰는 것 같은 탄탄하고도 그렇기때문에 매우 간결한 가정 위에서 적어내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교과서라는 것은, 독자가 그 입장에 동의하는 가의 여부와 별개로 하나의 정립된 이론체계로 수용하고나서 이후에 비판적 분석으로 나갈 것을 기대하는 성격의 저술이라고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사회주의 이론서들의 역사에서 '교과서'라고 불렸던 저작들은 맑스-엥겔스, 그리고 소비에트의 책들 정도가 아니었나 싶은데, 20세기 후반의 그 많은 신좌파 이론서들이 '교과서'라고 불리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갑자기 '교과서?'라는 느낌이 들게 되는 책을 접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약간 당혹스러웠다.
그렇지만, 뭔가 많이 무리스럽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저자가 제시하는 4개의 도식들에 대해, 나름 30여년의 독서의 과정에서 대체로 익숙하다는 느낌을 가질만 했고, 또 그러한 도식들 중 특히 두번째-생산과 재생산-와 세번째-인간과 자연-의 대당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운동활동 경험에서 쌓인 인식들과 친숙하다 하겠다. 또한 첫번째-착취와 수탈-의 대당은 과거의 식민주의/제국주의에 대한 독서의 경험과 현재 제도권에서 국제협력을 통한 저개발국가에 대한 개발국들의 입장에 대해 정책들을 통해 현실적으로 고민을 하고 있는 문제와도 연결되고, 마지막 정치와 경제의 문제는 금융위기와 트럼프정부의 고립주의 시도 이후에 개별국가 및 국제사회의 고전들을 바라보며 드는 생각들과 연결이 되는 듯하다.
결론적으로, 개인적인 고민과 이해도가 떨어져서 그럴지는 모르지만, 4축의 도식이 자본주의에서 비롯되었다는 문제의식에 매우 동의할 수 있다. 수탈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숨겨진 치부를 세련되게 드러낸다는 생각이 들고, 재생산의 문제는 20세기 후반부터 서구에서 부각되는 복지와 신종 불평등의 문제, 그로 인한 세대갈등의 원인이라고 연결되고, 특히 한국사회의 출산율의 문제를 핵심적으로 관통하는 이론틀이 아닌가 싶다. 정치-경제의 문제는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Pt에 대한 Bg의 계급투쟁'이라는 문제를 재발굴하는 탄탄한 문제의식이라고 받아들여진다. 인간-자연의 도식에서 현실사회주의에서의 실패를 설명할 때, 너무 이론적으로 당시(?) 소비에트국가의 전제에만 착목한 것 같은 한계가 보이긴 하지만, 좀 더 물질적으로 인간 경제활동의 역사적으로 누적된 문제점을 지적하는 시도도 타당해보인다.
문제는 정립되는 체계 - 교과서적인 방법론 제시 - 가 어느정도의 현실 타당성을 가질 것인지가 아닐까 싶다. 특히 현실적인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연합해야 할 주류 진보 저항세력의 지난 문제점에 대한 저자의 지적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가 현실적/이론적으로 민감할 것 같다. ".... 페미니즘, 반인종주의, LGBTQ+ 권리운동, 환경주의 같은 대중적 사회운동의 '자유주의-능력주의'적 흐름이 그 사례였다. 이들은 자유주의의 헤게모니 아래에서 활동하면서 오랫동안 진보적-신자유주의적 블록의 하위 파트너 노릇을 했는데, 이 블록에는 글로벌 자본의 '미래지향적' 부분도 가담하고 있었다. 결국 진보파 역시 간판스타 구실을 했다. 신자유주의의 약탈적 정치경제를 위한 해방의 매혹적 분위기로 화장해주면서 말이다. .......... 그리고 이것이 반동적 우익 포퓰리즘이 이 상황의 주된 수혜자가 된 이유이다. 또한 이것이 혀재 우리가 정치적 교착 상태에 빠진 이유이기도 하다. .." 이런 야박하고 매몰찬 비판을 의연하기 수용하고 연대에 참여할 수 있을 활동가/이론가가 얼마나 있을지에 대한 우려과 기대가 동시에 들었다.
방안에 대한 견적은 전혀없다. 어떤 면에서, 4개의 도식을 아우르는 커다란 틀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나 자신이 기본적으로 회의적인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오히려 4개 도식 사이의 충돌이 있더라도 개별 전선에서의 투쟁과 주장은 좀 더 강해지기를 아나키적으로 기대하는 것이 개인적인 입장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포기는 아니라고 생각해왔지만, 생각지 못한 강건한 입장에서 새롭게 아우르는 전선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이론의 측면에서 주창하는 낸시 프레이저의 글에서부터 약간의 당혹스러움과 반가움을 느꼈다. 내 현재 입장에서 뭘 할 수 있을지 1도 모르겠지만, 어쨌건 기대해보고 싶다.
책을 포함해서 무엇이든 충동구매를 거의 하지 않는 편인데 이 책은 인터넷 서점에서 제목을 보는 순간 '어머! 이건 꼭 사야 해!'라는 반응이 튀어나와 정신 차려보니 집에 도착한 책이다.
국문 제목이 원제보다 더 거창한 느낌인데, 원제는 'Cannibal Capitalism', 즉 '자기 자신을 잡아먹는 자본주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책은 우리가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시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으로 시작한다.
저자가 말하는 자본주의란 단순한 경제체제가 아닌 '사회'의 한 유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라는 측면에 국한해서 자본주의를 이해하면 자본주의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을 제대로 진단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필연적으로 자본의 축적을 최우선으로 움직이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인종과 젠더, 환경, 정치 등 4가지 분야에서 각기 착취와 수탈이 일어난다.
여기에서 발생한 착취와 수탈이 곧 자본의 축적을 가져오는 과정인데 특이하게도 자본은 이 4가지의 재생산, 즉 지속가능함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따라서 이 4가지 분야에서 쌓인 모순들이 다양한 사회운동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데, 저자는 이러한 개별적인 인식이 문제 해결의 근본적인 해답이 아니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통합적인 사회 체제로 보는 시각을 제시하고, 이러한 문제들이 다 자본주의 그 자체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는 논지를 펼치고 있다.
사실 자본주의의 목적이 잉여를 남겨 자본 그 자체를 증식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수탈과 착취는 기본적인 현상이고 여기에 인종과 젠더에 따른 불평등이 관찰된다는 것이 그리 색다른 시각은 아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 부분 외에 자본주의가 노동력의 재생산 과정조차도 갉아먹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실질소득의 감소, 노동시간의 증가는 당연한 말이지만 노동자가 아이를 낳아 키울 생각을 가로막는 요인이 된다.
당장에 매일 출산율 최저를 갱신하는 우리나라의 현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세종시의 출산율이 다른 곳보다 높은 이유는 다름 아닌 안정적인 직장과 급여 덕분인 것이다.
저자가 굳이 '수탈'과 '착취'라는 단어를 구분해서 쓰는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다.
즉 착취는 잉여 이익을 착취 당하는 대신 노동력 등 투입되는 자원의 재생산 비용은 지급받는 계층에서 발생한다면, 수탈은 그마저도 보장되지 않는 계층(아동 노동, 노예 노동, 강제 노역 등)에게서 발생하는 현상, 즉 지속가능성이 담보되지 않는 현상으로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젊은 세대의 급여 수준이 자신의 후속 세대를 키울 정도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젊은 세대를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수탈'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자본가는 절감액을 이윤의 형태로 전유하며,
그 부산물과 함께 살아가야 할(또한 그 때문에 죽어가야 할)
이들에게 환경 비용을 전가한다.
여기에는 미래 인간 세대도 포함된다.
(pg 164)
자연환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는 자본의 축적을 위한 원자료를 공급하는 자연을 마치 무한히 존재하는 것처럼 수탈한다.
그리고 환경에 대한 책임은 나무나 몇 그루 심으면 해결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마저도 하면 다행이다.)
저자의 비유를 그대로 옮기자면 자본에게 자연이란 원료를 공급해 주는 상수도이자 폐기물을 품어주는 하수도이다.
그러면서도 상하수도 비용은 거의 지불하지 않는 셈이기 때문에 이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다음 세대의 인류가 받게 마련인 것이다.
'자기 확장'하도록 조작된, 화폐화된 추상인 자본은 끝없는 축적을 명한다.
그 결과 이윤극대화에 골몰하는 소유주가 '자연의 선물'을 최대한 싸게 징발하는 게
칭찬받을 일이 되고, 그러면서도 사용한 만큼 보충하거나
해를 끼친 만큼 수선할 의무는 모조리 면제받게 된다.
피해는 이윤의 동전 반대 면이다.
(pg 163)
마지막 키워드인 정치 역시 자본의 힘 앞에 무릎 꿇은 지 오래다.
착취와 수탈을 위해서는 안정적인 법률 제도와 장치들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막대하게 커져 국경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자본은 오히려 공적 권력에 불안정성을 가져온다.
대한민국 국민 그 누구도 이재용이 청문회에 끌려 나와 어리바리도 떨고 징역도 살았으니 국가 권력이 자본을 잘 감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업들의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위한 국제기구들(각국 정부가 아닌)이 게임의 규칙을 만들고 있다.
이 체제에서는 전 세계에 걸쳐 사회적 상호작용의 막대한 부분을 다스리는
강압적 규칙의 알짜를 만드는 것이 국가가 아니다.
대신 유럽연합, 세계무역기구, NAFTA, TRIPS 같은
초국적 거버넌스 구조가 이를 대체한다.
누구에게도 책임지지 않으며, 압도적으로 자본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는 이 기구들은
'자유무역'과 '지적재산권' 같은 신자유주의적 관념들을 '헌법으로 제정'하고,
이를 글로벌 체제로 고정시킨다.
이로써 장래에 있을지 모르는 민주적 노동, 환경 입법을 미연에 방지하고 있다.
(pg 243)
이처럼 자본은 자신의 축적에 반드시 필요한 것들을 탐욕적으로 흡수하면서도 그 재생산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를 갉아먹는' 체제라는 것이 책의 핵심이며, 아래의 문장으로 잘 요약해두고 있다.
자본은 이러한 사회-재생산 활동에 크게 의존함에도 여기에 어떠한 (화폐화된)가치도
부여하지 않으며, 무상으로 무한히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취급한다.
게다가 이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은 거의 혹은 전혀 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본을 무한히 축적하려는 끝없는 충동에 따르도록 방치하면,
자본이 의존하는 바로 그 사회적 재생산 과정이 불안정해질 위험에 빠지게 마련이다.
(pg 225)
그래서 결론은 무엇인가?
저자는 당연히 문제의 근원이 자본주의 그 자체에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해체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그 자체로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그 이후의 사회를 상상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저자의 답은 '사회주의'이다.
그것도 자본주의에 대한 인식과 마찬가지로 '확장된 개념의 사회주의'여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이 책의 핵심은 자기 파괴적인 성격을 지닌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이기 때문에 대안 부분은 언급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사회주의자는 이 뒤집힌 것을 바로 돌려놓아야 한다.
즉 사람들의 양육, 자연의 보호, 민주적 자치를 사회의 최우선으로 놓고,
이것들이 효율성과 성장을 압도하게 해야 한다.
요컨대 사회주의는 자본이 책임을 회피하며 배경 취급하는 사항들을
똑바로 전경으로 끄집어내야 한다.
(pg 280)
책은 총 6장으로 1장에서 자본주의의 확장된 시각을 제시한 뒤 2, 3, 4, 5장에서 자본주의가 수탈과 착취의 대상으로 삼는 인종, 젠더, 환경, 정치에 관한 현상들을 설명하고 6장에서 논지를 종합하는 굉장히 논리 정연한 목차로 구성되어 있다.
참고문헌을 제외하면 약 300페이지 초반으로 그리 두꺼운 책은 아니지만 문장이 그리 잘 읽히는 느낌이 아니라서 읽는데 시간은 꽤 오래 걸린 느낌이다.
(문장은 번역의 문제라기보다는 저자가 다소 현학적으로 썼다는 느낌이 강했다.)
임계치에 도달한 대중이 집단행동을 통해 기성 질서를 변혁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결의할 때에만 객관적 곤경은 주체를 통해 발설된다.
그때에야, 오로지 그때에야, 우리는 결단을 요구하는 비상한 역사적 갈림길이라는
좀 더 거대한 의미에서 위기를 말할 수 있게 된다.
(pg 246)
나름 마르크스 자본론도 공부를 좀 했었기 때문에 이를 확장한 저자의 시각이 아주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자본이 사회의 여러 부분에서 수혜를 얻으며 성장하는데 사실상 노동자의 임금과 어떻게든 피하고 줄이려 애를 쓰는 세금 외에는 무임승차를 하고 있다는 시각이 현실을 바라보는 눈을 더 날카롭게 다듬어주는 느낌이 들었다.
현실 자본주의에 뭔가 잘못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한번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은 책이었다.
※ 이 리뷰에는 책의 내용이 일부분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만, 리뷰어의 판단이 개입되어 저
자의 의도에 대한 비의도적 오독이 있을 수 있음을 고려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책은 하나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왜 자본주의는 무수한 내적 모순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하면서도 그 근본적인 모순을 시정하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더구나 세계의 제도적 질서를 이 문제 많은 자본주의에게 헤게모니를 쥐어주기까지 하고 그 어떠한 대응이나 탈취를 위한 기획이나 행동조차 하지 못하는가 하는 물음이다. 즉 궁극적 해결을 위한 접근 경로를 알지 못하거나, 잘못 짚는 이유에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것이다.
이 말은 ‘자본주의’에 대한 정의를 소위 고전적 경제논리에 입각한 이해에 전념하다보니 그 실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까닭에 있다는 것이며, 그것은 다음과 같은 ‘낸시 프레이저’의 확장된 자본주의 정의에서 드러난다. 전통적이고 오늘에까지 일반적이고 통념적으로 이해하는 “사적소유, 시장교환, 임금노동, 그리고 이윤을 위한 생산에 바탕을 둔 경제 시스템”이라는 단일 특성으로 바라보는 한 결코 자본주의를 제대로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다시 정의되어야 하는데, “이윤 주도 경제가 그 작동에 필요한 ‘경제 외적 기둥’들을 포식하도록 북돋는 사회(societal)질서”, 즉 ‘제도화된 사회 질서’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경제’라는 단일 특성이 아니며, 경제에서 분리되어 드러나지 않지만 실질적으로 자본주의 경제 작동의 근간인 ‘비-경제’(경제외적)기둥 - 생태자연, 돌봄 등 재생산, 법을 비롯한 국가 권력, 수탈 영역 - 을 포함하는 은폐된 요소들을 배제하고서는 자본주의의 어떠한 측면에 대해서도 문제해결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경제 시스템’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질서’라는 것이다. 각 요소들이 난마(亂麻)처럼 얽혀 있는 전체를 보지 못하고 하나의 요소에 제아무리 처방전을 내봐야 고쳐지지 않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다.
자본주의는 많은 환상을 실재라고 승인하는 조금은 기이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자유로운 노동 시장’같은 말은 법률차원의 자유와 시공간적 자유라는 노동자의 자유의지를 부각시키며, 자본가에 종속적이고, 시공간적 구속을 받는 임금노동자임을 지워버린다. 또한 자본의 목적인 자기축적, 즉 자기자본의 확장이라는 고유충동을 부정한다. 때문에 발생한 잉여의 사회적 할당이 시장에 맡겨져 노동자 등 사회적 복리와는 무관하게 아주 자의적으로 배분되어 불평등을 내재적으로 보유하는 도착적 특성이 마치 없는 듯 행동한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균형(조화)이라는 시장에 대한 환상, 자유노동이라는 환상...,게다가 자본가가 축적하는 잉여는 노동 생산의 이윤만이 아니라 비경제 요소를 무상 또는 해당가치에 훨씬 모자라는 저가로 사용하여 얻는 거의 수탈에 가까운 공짜 이익까지 더해져 사실 자본가의 축적은 더 큰 규모로 이뤄진다.
바로 이것이다. ‘낸시 프레이저’는 자본이 무임승차하면서 한 푼의 비용도 지불하지 않으면서 자기 축적에 전념함으로써 야기되는 전방위적인 사회적 폐해의 요소들을 규명하고, 그것들이 어떻게 얽혀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의 전경이 아닌 배경으로 밀쳐지고 분리되어 눈앞에서 치워진 것들을 찾아내는 것이며, 이를 통해 새로운 질서를 상상해 내는 것이다. 내적 모순으로 인류를 신음하게 하는 헤게모니를 쥔 자본을 시정할 수 있는 대항 질서(대항 헤게모니 연대)를 사유해 보는 것이다.
■ 비경제 요소란 무엇인가
비경제 요소란 무엇인가? 자본을 경제라는 범주에 특정함으로써 경제 이외의 것들과는 무관한 듯 설명하며 배제한 것, 그러나 자본이 자기 확장을 위해 필수적인 토대로 하여야 하는 것 말이다. 자기 축적을 위한 근본적 요소임에도 아무런 책임이나 부담을 하지 않으려는 요소들. 낸시 프레이저는 이것을 ‘사회적 재생산, 생태 자연, 공적권력과 정치, 그리고 착취와 수탈’, 크게 네 가지로 분류 정리하고 있다.
노동이 생산을 위해 지속적으로 투입되려면 노동은 생산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을 위해 무수한 요인들을 필요로 한다. 정서적 신체적 돌봄, 가사, 육아, 학교, 다음세대를 낳고 사회화하는 일, 공동체 구축, 사회적 협력을 뒷받침하는 가치 지평의 가르침 등등 사회적 유대와 공동인식 유지를 위해 기여하는 일군의 활동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사회적 재생산이라는 비경제 요소의 하나이다.
이들 사회적 재생산을 위한 노동은 자본의 생산 세계에서 분리되어 개별적인 사적 가정의 영역으로 유폐되고, 임금 노동에서 배제되거나 터무니없이 낮은 저임금이라는 중차대한 진실을 가려버린다. 생산노동과 재생산 노동은 분리되어 재생산은 젠더화되고 여성의 차지가 되어왔다, 그런데 금융자본주의 시대인 오늘은 이것들마저 상품화하여 여성을 대거 저임금 서비스 일자리에 충원한다. 이것은 추가적인 문제를 낳고 그것과 다시금 얽히는데, 착취와 수탈의 요소라는 노동의 이중성으로 이어진다. 가난한 여성이 일하는 여성 대신에 저가의 임금으로 돌봄 노동을 수행하며 가난한 여성의 가정은 돌봄의 사각지대화 되어 서발턴을 고착화시킨다. 자본은 사회적 재생산을 공짜로 먹어치우며, 이 비용을 사회에 전가한다. 자본 축적, 즉 잉여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이것에 비용을 치루지 않음으로써 사회적 불균형과 불화라는 자본주의 위기, 내적 모순을 드러낸다.
생태자연이라는 비경제 요소는 자본의 가장 파렴치한 뻔뻔함의 하나일 것이다. 자연은 스스로 무한히 회복할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전제 하에 마치 비용이 제로인 듯 처리된다. 자본주의는 자연의 영역과 경제의 영역을 분할하여 자연은 무상 이용의 원천으로 삼는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위선인데, 경제는 가치 발생의 창조적 인간 행동의 장(場)이지만, 쉽고 무한히 보충할 수 있는 자연은 가치 없는 영역이라 분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기만이자 왜곡인데, 생태 자연은 자본 생산의 필수 토대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자본의 생산, 자본주의는 한 걸음도 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공짜로 이용하고 그 부담은 하지 않으려 한다. 결국 이 또한 사회에 전가되고, 자본의 내적 모순이라 일컫는 오리무중의 모호한 지대로 자취를 감춘다.
공적 권력과 정치라는 비경제 요소는 자본의 이중적 태도를 보여주는, 그 경계를 오르내리는 자가당착(自家撞着)적 특성을 지닌다. 자본은 자기 멋대로 하기 위해 규제를 폐지하고, 조세의 감면과 탈세를 추구한다. 즉 탈정치를 주장하지만, 자기 확장, 자본축적에 장애가 되는 것을 파괴하고 제거하기 위해서 공적권력과 정치를 요구한다. 이를테면 재산권을 보장하고, 계약 내용의 실행과 분쟁을 심판하고, 노동자 저항을 진압하며, 질서를 보장하고, 이견을 관리하는 국가권력은 시장 교환이라는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가장 원초적인 토대이다. 그러나 작은 정부를 요구하며 작금의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자본주의는 자본의 움직임에 대한 방임을 지향한다.
이미 모순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가? 자본주의는 경제와 정치를 분할하여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으로 분리함으로써, 이미 영역간, 그 경계의 자의적 융통성으로 인해 불의와 부패성이라는 위기를 태생적으로 안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본은 이러한 정치적 비용, 공공재의 비용에 대한 어떠한 책임과 부담을 지니려 하지 않는다. 이 역시 공짜이고 무임승차다. 자본주의는 자본축적을 용이하게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시스템으로 진화해왔다. 이것이 사회질서에 엄청난 불평등과 불화의 문제인 것은 그 내적구조의 태생성이 지닌 반(反)민주주의적 속성 때문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 벌어지는 행태, 공공기관 및 그 자산의 민간 매각. 건보료를 비롯한 국민연금 등의 인상이라는 공적 부담의 회피, 대기업 조세감면, 금리의 폭발적인 인상 등은 민주주의 정치의 조건을 파괴한다.
금리 인상이 자본의 파렴치한 무한축적의 동기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건가라고 묻는 이가 있다면 그 어리석음을 무엇에 견줘야 할 것인지 모르겠다. 자본이 사회와 자연의 부를 빨아들이는 일은 부채가 한다. 자본은 즉각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금융자본을 통해 대중을 훈육한다. 금리 인상은 부채상환에 압박을 받는 사적 개인의 몫이다.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경계에 선 많은 이들을 빈곤계층의 나락으로 떨어뜨림으로써 자본은 자기 축적을 확보한다. 여기에 정치권력은 막대한 떡고물을 받기위해 국가권력을 동원하여 자본을 지원한다.
이러한 실태를 여기에 모두 열거하는 것은 지면의 낭비가 될 듯하여 자제토록 한다. 자본은 외형적으로 정치와 분리되어 있지만 내적으로는 긴밀하게 얽혀있다. 분리함으로써 자본은 이 비경제 요소인 국가권력, 공공재의 이용을 위한 아무런 비용도 부담하지 않으며,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 이로부터 민주주의는 파괴되고 사회질서는 그 윤리적 뿌리부터 썩어 들어간다. 이 질서의 혼란이 야기한 복구비용은 오로지 국민이라는 대중의 몫이 된다. 그것은 시간의 고통, 재정적 고통, 삶의 견딤이라는 정서적, 육체적 고통, 민주주의의 정치적 지향성이라 사회 윤리적 비용의 부담이다.
네 번째 요소인 착취와 수탈은 역사적, 지역적 시간에 따라 형태적 형상이 변화되어 온 비경제 요소이다. ‘착취’란 국가가 정해 놓은 법아래 노동으로부터 발생하는 생산 잉여분을 통한 자본 축적을 말하는 것이며, ‘수탈’이란 법이 보호하지 않는 영역의 노동, 즉 가계의 생계가 불가능 할 정도의 임금 또는 무상으로 빼앗는 잉여를 통한 자본축적을 의미한다. 이러한 구분은 역사적으로 그 경계를 변경하며 인종주의와 주변부 지역(예로서 식민지 또는 이에 준하는 포스트 식민국가 등 제3 국가 등)으로부터의 강탈에서부터 현재의 플랫폼노동이나 이 밖의 임시직 노동을 비롯한 새로운 인클로저(물의 상품화를 위한 토지 수용, 식물의 소유권화, 터미네이터 씨앗 등)로 인한 박탈로부터 챙기는 공짜 잉여를 표면에 드러나게 해준다.
이들에게는 사회안정 보험의 수혜도 받지 못하고, 착취 노동자로부터도 경멸받으며, 동료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저 빼앗기며 아무 발언권도 지니지 못한다. 때문에 수탈 대상 계층과 지역민은 제도화된 사회질서의 변경에 그 어떠한 요구도 하지 못한다. 택배노동자, 퀵(음식) 배달 노동자, 경비 노동자 등 긱(geek)노동 에 가해지는 끊임없는 폭행과 불이익의 수용이 지속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비경제 요소들은 결코 그 요소 자체의 문제로 인해 야기되는 불의가 아니다. 이들은 상호 엮여있는데, 이것들에 대한 자체적 요인만으로 문제 해결을 해보았자 미봉책이거나 시늉에 불과한 꼴이 되고 결국 해결되지 않은 채로 지속적으로 곪아가기만 한다. 페미니스트들의 운동을 예로 들어보자. 남성중심 사회를 그 어떤 중심도 아닌 기회 평등과 공정을 외치며 여성의 일자리 진출을 하나의 전형적 모델로 등장시켰다. 소위 ‘맞벌이 가족’이라는 해방 지향 운동으로 보이지만 시장주의자들이 환호하고 나선 것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덮는데 아주 유용한 프로파간다였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시장 자본주의와 공모하며, 사회적 재생산을 둘러싼 투쟁을 후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것은 특권을 지닌 여성이 가난한 여성에게 돌봄을 떠넘기면서 가능하게 된 것이고, 유례없는 ‘돌봄 사슬’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자본은 공짜 재생산 비용의 비난을 회피하고, 마치 존재하는 문제가 아닌 듯 책임에서 멀리 떨어질 수 있게 해주었다. 페미니즘을 비난하자는 것이 아니라, 단일 요소의 문제로 접근하면 다른 파생적 문제를 낳는 비경제 요소의 상호 엮임의 문제를 말하려는 것이다.
결국 페미니즘은 ‘착취와 수탈’의 영역과 협력해야 하며, 정치라는 공적 영역의 경계에 대해, 또한 생태자연의 영역과 연대해야 근본적 문제 해결에 접근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남성과의 연대 문제가 아니라 비경제 요소 상호간의 연대의 문제인 것이다. 문제를 만들어내는 세력과 잠자리를 함께하며 문제를 푼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지금까지 좌파라고 하는 집단의 행동도 또한 신자유주의의 놀음에 동참하며 사회적 안전망을 외치는 불가능한 접근으로 자본주의의 축적을 돕는 결과를 초래했다.
신자유주의의 약탈적 정치경제에 해방이라는 매혹적 분위기로 화장해주는 역할을 해 온 것이 페미니즘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은 사회질서에 커다란 균열이 발생하여 인민대중이 일어날 때 페미니즘과 현재의 좌파, 인종주의는 거부되는 형국을 불러 올 수 있으며, 이는 곧 사회 분열의 다름 아니다. 이렇게 분열된 대중은 결코 반동적 우익 포퓰리즘이 지향하는 추악한 자본 축적의 동기를 저지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며, 비뚤어지고 왜곡된 사회 정의를 바로 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의 그럴듯한 해결은 새로운 왜곡의 시작을 알려 줄 뿐이다. 이의 역사적 실상을 설명하는 것은 그만두겠다. 낸시 프레이저의 목소리(이 책『cannibal capitalism』)를 참조하시라는 조언으로 갈음하여야겠다.
바로 지금 한국사회의 현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극우화된 현재의 권력은 자본의 충실한 충복들이다. 대부분의 언론은 자본축적의 동기로 가득한 대기업의 출자 기업들이다. 이들에게는 자기 확장을 방해하는 요소와 세력은 살해하여야 하는 대상 일뿐이다. 조중동을 비롯한 자본가의 미디어 매체들이 바보같은 이 정권을 기를 쓰고 지원사격하고, 이에 반대하는 세력을 음해로 일관하는 것은 바로 이 자본주의의 당위적 현상이 노골적으로 행사되는 것을 입증하는 것일 뿐이다. 사실 자본주의는 뻔뻔하지 않았던 적이 없으며, 이를 합리화하는 논리와 구조를 만들어 왔을 뿐이다.
이들이 제일 먼저 들고 나온 이슈가 무엇인가? 대기업 조세 감면과 공기업 매각, 공적 부담 장치들의 파괴 아니었던가? 그리고는 주변부의 부를 빨아들이기 위한 금리인상과 각종 공공요금의 무한 증가를 통한 자본 확장의 지원 아니었던가? 그리고는 여성가족부, 국가인권위원회의 해체 등 반민주주의, 반여성주의, 반생태주의, 반노동주의의 기치를 내걸며, 이에 저항하는 인간은 누구라도 때려잡겠다고 을러대고 있지 않는가? 이 모두는 자본주의라는 ‘제도화된 사회 질서’가 지닌 뿌리깊은 내적 모순으로 발생하는 것이며, 그것의 핵심은 비경제 요소를 외면하고 소외시켜 은폐하는 것이다.
■ 맺는 말
책은 18~19세기의 중상주의-자본주의, 19세기~20세기 초의 식민주의-자본주의, 20세기 경제공황과 세계대전 이후의 국가주의-자본주의, 그리고 21세기 오늘날의 글로벌 금융 자본주의의 역사 속에서 이러한 비경제 요소와 경제와의 경계를 어떻게 이전 은폐하며 봉합하여 지속될 수 있었는지를 규명하고 있다. 착취와 계급갈등을 가리기 위해 스위트 홈을 창안하여 남성 중심의 생산 경제와 여성 중심의 가정이라는 비경제로 분리하여 새로운 경계를 만들고, 이에 여성주의가 대두되자 이에 기생하여 맞벌이 가족을 이상화하며 경계를 이동시키고, 급기야 부채를 통한 착취와 수탈의 지대를 만들어 주변부의 부까지 빨아들이는 자본의 민낯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자본주의 내재적 모순은 이처럼 경제와 비경제의 경계를 변경하며 은폐해온 역사라 할 수 있다. 오늘 우리들이 사는 세계는 화폐가 곧 권력의 표상이 된 세상이다. 때문에 돈을 받지 못하거나 적은 돈을 받는다는 것은 중요한 진실을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 가치 없음의 이 상징은 곧 법의 보호에서 배제되며, 제도질서에서 제외되고, 결코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 뿐 아니라 발언권이 없다. 낸시 프레이저는 이러한 모순의 본성을 4D로 설명하고 있다. ‘분할(division)+의존(dependency)+책임회피(disavowal)=불안정화(destabilization)’, 경제와 정치를 분리하고, 자연과 경제를 분리하며, 경제와 수탈을 분할하며, 재생산과 생산을 분리하며 자본은 분리된 것에 등을 돌리고 그에 대한 어떠한 보상도, 책임도 지지 않는다. 이 회피된 것들, 돌봄, 생태계, 수탈대상의 노동, 정의로운 정치에 기생하고 이를 이용하면서도 비용부담도, 그 어떤 책임도 회피하면서 오직 파괴하고 사회와 인간을 고통의 신음으로 몰아넣는다.
책은 이렇게 자본주의 시스템이 은폐한 내적 결함을 감춰둔 장소들에 예리한 빛줄기를 드리워 노출시킴으로써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들을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 보여준다. 자본주의가 단지 경제 시스템이 아니라 ‘제도화된 사회질서’라면, 새로운 질서를 우리들은 어떻게 만들어 내야 할 것인가? 사실 이 모든 것들을 단 번에 치유할 체제란 불가능 할 것이다. 전통적인 사회주의는 계급주의를 청산하고 사회적 잉여에 대한 분배의 공정성을 확보하면 된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자본주의는 경제, 즉 생산과 시장 교환시스템만이 아니라고 했다. 무임승차하고 돈 한 푼 내지 않는 비경제의 토대에 선 질서 체계이다. ‘젠더와 성, 인종적(확대하여 지역화되고 부채화된 노동),민족적 억압, 정치적 지배에 대한 불균형’까지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창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리된 경계를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 비경제 영역의 우선순위는 어떻게 두어야 할 것인지, 효율성과 성장을 내세우는 자본의 요구를 압도하는 사회적 가치를 어떻게 기획해 낼 것인지 등 지금까지 자본의 배경에 머물렀던 것을 전경으로 세우기 위한 제도 설계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이러한 전제 조건들이 지속 가능성이 보장되는 것이어야 하며, 민주적 과정을 통한 결정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저자는 지금까지 경제에 중심을 둔 사회주의와는 다른 새로운 의미의 사회주의를 상상한다. 새로운 제도 질서로서의 사회 창안을. 아마 이 책은 오늘의 한국사회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이 위기를 해결 할 수 있을 것인지를, 보다 민주적이고 보다 생태적이며, 보다 평등한 성과 이질성의 극복을 위해 분투하는 이들에게 위안과 격려와 영감의 메시지가 될 것이다. 21세기 자본주의의 교과서를 읽는다면 나는 단연코 낸시 프레이저의 이 책을 추천할 것이다.
Cannibal Capitalism: 식인(카니발)이라는 표현을 은유라 설명했지만 사실은 의미 자체 그대로 사용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저자는 자본주의를 “‘먹이 떼를 향해 달려드는 포식자 무리’를 제도화 한 것으로서 사회를 바라보게” 한다. 중심메뉴는 바로 ‘우리’ 인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