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자본』은 자본가가 저지른 불법에 대한 고발이 아닙니다. 이 책이 고발하는 것은 합법적 약탈입니다. 나는 이 책의 의의가 착취에 대한 과학적 해명이 아니라 착취에 입각한 과학에 대한 비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자본』은 착취의 토대 위에 세워진 정치경제학이라는 과학을 비판하는 책입니다. 우리는 『자본』에서 과학의 말문이 막히는 지점을 만날 겁니다. 또 과학을 수다스럽게 몰아대던 충동, 그 앎의 의지가 드러나는 곳도 볼 겁니다. 우리는 법 내지 법칙 이전에 힘이 있고 입장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될 겁니다. 마르크스에게 ‘비판’이란 거기까지 나아가는 일입니다. 그곳은 법을 넘어선 곳, 즉 주권의 영역이고 독재의 영역입니다.
--- p. 12
마르크스의 눈이 특별한 것은 그가 평범한 것에 놀랐다는 데 있습니다. 정치경제학자들이 특별한 것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을 때 정작 마르크스는 평범한 것을 보고 신기해했습니다. 휘황찬란한 불빛에 끌리는 물고기가 정작 가장 흔한 물에 대해서는 맹목이듯 정치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에 대해 맹목입니다. 상품을 다루면서도 상품이 얼마나 신기한 것인지를 모릅니다. 그런데 물을 보고 놀란 물고기 같다고 할까요. 마르크스에게는 상품의 존재가 너무나 신기합니다. 서로 다른 두 개의 상품이 일정한 비율로 교환된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여기서 그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사람들이 교환하고 축적하고 약탈하는 ‘부’의 정체, ‘가치’의 비밀을 발견합니다.
--- p. 68
도대체 화폐는 어디서 온 것인가. 마르크스는 놀랍게도 우리가 좀처럼 생각하지 못하는 곳을 지목했습니다. 화폐는 모든 공동체들의 바깥에서 왔다. 그는 말했습니다. 다른 공동체에서 온 것이 아니라 ‘공동체들의 바깥’에서 왔다고 말입니다. 공동체가 끝나는 곳, 공동체의 규칙이 작동하지 못하는 곳. 거기가 어딘가요? 우리는 그곳을 지도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그곳은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 바로 ‘경계’(Grenze)이기 때문이지요. ‘끝’이면서 ‘사이’인 공간입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거기서 상품교역이 이루어졌고 거기서 화폐가 생겨났습니다. 그러고는 마치 반동처럼 공동체 안으로 파고들었습니다.
--- p. 146
마르크스의 자본 개념은 한편으로 생물학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신학적입니다.그는 자본을 ‘잉여가치를 낳는 가치’라고 했습니다. 자식을 낳는 것에 비유한 겁니다. 자본은 생명체처럼 번식하고 성장합니다. “살아 있는 자식을 낳든가 아니면 적어도 황금알을 낳”습니다.[김, 201; 강, 235] 일종의 생식이죠. 자본은 잉여가치를 낳고, 잉여가치는 자신을 낳은 가치를 자본으로 불리게 만듭니다. 마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같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음으로써 비로소 아버지가 됩니다. 그런데 한 순환을 마치고 나면 둘은 하나가 됩니다. 100억은 10억을 낳음으로써, 다시 말해 10억이라는 잉여가치에 의해 자본이 됩니다. 그리고 이제 둘은 출발점에 다시 섭니다. 100억과 10억이 따로 서지 않고 110억으로 함께 섭니다.
--- pp. 257~258
나는 『자본』을 읽으며 “살기 위해 죽어간다” 혹은 “죽지 않기 위해 죽어간다”라는 말 속에 자본주의 정치경제학의 핵심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근대의 ‘가치’ 개념(경제학)과 ‘권력’ 개념(정치학)이 자라난 토양이랄까요. 죽음의 공포를 기반으로 생명을 움켜쥐는 것, 여기에 자본의 원리, 주권의 원리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점에서 『자본』을 ‘생명의 정치경제학’, 좀 더 직접적으로는 ‘죽음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 p. 306
우리의 노동자들은 공장을 다녀오고 나서야 알게 됩니다. 노동력을가졌다는 것, 일할 몸뚱이를 가졌다는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갖지 않았다는 뜻임을. 그는 무언가를 가졌기에 그걸 팔기 위해 나온 게 아니라 아무것도 갖지 못했기에 몸뚱이를 내놓은 겁니다. 그들은 재산의 소유자가 아니라 무산자인 거죠. 그게 아니라면 흡혈귀가 사는 그 끔찍한 공포의 집, 곧 공장으로 다시 들어갈 이유가 없을 겁니다. 자유롭다면 거기를 또 가지는 않겠지요. 한번 붙잡으면 ‘한 방울의 피라도 남아 있는 한’ 결코 자신들을 놓아주지 않는 흡혈귀에게 말입니다. 그런데 노동자들은 이 노동지옥으로 내일도 모레도 올 수밖에 없다는 걸 압니다. 지옥이라는 걸 알면서도 들여보내달라고 간청하며 필사적으로 노력합니다. 심지어 어린 자식들까지 거기로 밀어 넣지요.
--- pp. 466~467
자본가에게 고용될 때 노동자들은 개인입니다. 서로에 대해 타인이지요. 하지만 작업이 시작되면 이들은 하나의 결합된 노동력을 이룹니다. ‘전체노동자’라는 거인으로 변하지요. 개별 노동자들은 이 거인 노동자의 특수한 기관이 됩니다. 거인 노동자의 수백 개 손발 중 하나가 되어 내리치는 일만 하거나 자르는 일만 하거나 나르는 일만 합니다. 한 가지 작업에 특화된 ‘부분노동자’, ‘부분인간’이 되는 겁니다. 이 작업장에서 온전한 인격체는 거인 노동자뿐입니다. 그는 개별 노동자의 힘을 더한 것보다 더 큰 힘을 지녔고 작업속도도 빠릅니다. 당연히 수백 배나 많은 물건들을 만들어내지요. 그러나 임금을 지급받아야 하는 때가 되면 거인 노동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습니다. 자본가 앞에 서 있는 것은 다시 왜소한 개인 노동자뿐입니다. 일은 ‘함께’ 했는데 ‘함께’는 사라지고 개인만 남습니다. 자본가는 개인 노동력의 가치에 대해서만 지불하고 결합된 노동력의 가치에 대해서는 지불하지 않습니다.
--- pp. 480~481
마르크스는 현재의 자본주의를 고발하면서 과거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현재 속에서 ‘현재를 넘어서는 것’이 자라나고 있음을 보는 사람이지요. 물론 그것을 낙관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어떤 점에서 보면 이 끔찍한 현재가, 그가 기대하는 미래로 나아갈 가능성은 매우 낮을 수 있습니다. 시간이 한없이 걸릴 수도 있고요. 마르크스는 그런 것을 점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그는 현재에 들어와 있는 미래의 흔적을 찾고 조짐을 찾을 뿐입니다. 조금 더 이야기한다면, 현재 속에서 커지는 것, 현재의 사회형태, 현재의 생산양식이 발전시킬 수밖에 없는 것에서 현재를 넘어설 요소를 찾는 거죠.
--- p. 668
자본주의는 자본가가 이윤(잉여가치)을 얻기 위해 자본을 투자해 상품을 생산하는 체제입니다. 노동력은 자본가가 생산을 위해 생산수단과 함께 구매한 상품으로서, 생산에 투자된 자본의 일부이지요. 생산에 투자된 자본은 생산수단인 불변자본과 노동력인 가변자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자본가는 시장에서 구매한 노동력을 사용해 잉여가치를 얻습니다. 이 잉여가치의 일부를 지주에게 지대로 지급하죠. 만약 그가 투자한 자본이 대부자본가에게 빌린 것이라면 잉여가치의 일부를 이자로도 지급하겠지요. 이처럼 이윤과 지대와 이자는 모두 잉여가치의 특수한 형태로서, 노동력을 통해 생산된 잉여가치를 분배한 것입니다. 하지만 임금은 다릅니다. 노동력의 가치(가격)로서의 임금은 생산과정에 들어가기 전에, 자본가가 구매하는 시점에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노동력의 가치는 다른 상품들이 그렇듯 노동력을 생산(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노동량입니다. 그리고 자본가가 구매하면서 지불한 이 가치는 생산과정에서 재생산됩니다. 가치의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는 잉여가치와 함께 노동력의 가치 즉 자신의 임금을 생산합니다.
--- p. 742
마르크스는 자본의 확대재생산 즉 자본의 축적을 이야기하면서, 이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하는 식의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노동자의 재생산에도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노동자 아브라함은 노동자 이삭을 낳고, 노동자 이삭은 노동자 야곱을 낳습니다. 오늘 노동자는 어제 노동자입니다. 그가 노동력을 팔기 위해 오늘 시장에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제 그가 공장에서 생산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노동자는 어제 노동자의 자식입니다. 부모 노동자는 자식 노동자의 근육과 뼈와 두뇌, 즉 노동력을 생산했을 뿐 아니라 자식 노동자의 가난, 즉 노동력을 팔아야만 살 수 있는 존재로서 노동자를 생산합니다.
--- pp. 813~814
우리는 노동자계급의 운명을 다루었는데요. 마르크스가 말한 이 운명의 주인공들은 산업예비군, 잉여노동자, 식민지인입니다. 모두가 자본관계의 내부가 아니라 주변에 있는 존재들이지요. 자본관계에 귀속되어 있지만 내부에 존재하지는 않는 사람들입니다. 마르크스가 노동자계급의 운명을 이들에게서 확인하는 것은 조만간 노동자계급 다수의 운명이 이들처럼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들이야말로 자본주의에서 노동자계급의 운명이 어떤지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존재이기 때문일 겁니다. 즉 미래에 대한 예측이라기보다 현재에 대한 규정으로서 이들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 p. 959
자기 땅에서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이 남의 땅에서 남을 위해 일하는 것보다 더 이익이라는 것, 타인의 부림을 받는 것보다 자기 의지대로 일하는 것이 더 즐거운 일임을 알았던 겁니다. 그런 걸 알았다고 말하는 게 이상할 정도로 당연한 일이지요. 이 당연한 일이 당연하지 않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폭력이 행사되었던가. 마르크스가 시초축적의 역사를 통해 보여주려 했던 것이 그것입니다. 땅을 빼앗기고 공동체를 파괴당한 사람들이 겪었던 피와 불의 역사에서 자본주의라는 이상한 사회형태가 생겨난 겁니다. 노동하는 자들이 자기 노동으로 먹고살 수 없도록 생산수단을 빼앗고, 노동하는 자들이 서로 기대며 살아갈 수 없도록 공동체를 빼앗은 후에야 자본주의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다수의 생산자들을 궁핍과 빈곤으로 내몬 후에야 자본축적이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자본의 창세기, 첫 문장은 이것입니다. 태초에 수탈이 있었다!
--- pp. 1044~1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