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23년 02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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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66쪽 | 338g | 130*200*17mm |
ISBN13 | 9791192465043 |
ISBN10 | 1192465040 |
발행일 | 2023년 02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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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66쪽 | 338g | 130*200*17mm |
ISBN13 | 9791192465043 |
ISBN10 | 1192465040 |
MD 한마디
『연결된 고통』을 쓴 이기병 내과 의사는 3년간 가리봉동의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에서 근무했다. 그곳에서 다양한 아픈 몸과 만났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이 고통을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었다. 이 책은 여러 외국인 노동자를 진료하며 겪은 희로애락을 글로 남긴 최초의 기록이다. - 손민규 인문 PD
추천의 말 머리말 - 잊히지 않아야 할 크고 작은 세계의 기록 1 갑상선 호르몬의 진실 : 재현의 목적은 본질의 장악에 있다 2 술과 심부전 : 돌아올 수 없는 강은 한 번에 건너는 것이 아니다 3 어느 HIV 청년과 약혼자 : 낙인이 치료에 미치는 영향 4 옴과 헤테로토피아 : 그들에게 쉼터는 장소 바깥에 있는 장소였다 5 요통, 변비 그리고 실신 : 좋은 의료란 무엇인가 6 질병이나 죽음은 형벌일까 :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유일한 진실, 고통에 관하여 7 고통의 이분법 : 몸과 마음 사이의 간극과 관계에 대하여 맺음말 - 누군가는 경계에 서 있어야 한다 참고문헌 |
고통이 우리를 연결하다
<연결된 고통>을 읽고
현대인은 몸이나 마음이 아프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둘 중 하나를 택한다. 병원에 가거나 그렇지 않거나. 현대 의학과 의료에서는 아픈 사람을 환자, 그(의) 고통을 덜거나 없애는 사람을 의사, 두 사람이 대면하여 진료를 주고받는 공간을 병원으로 규정한다. 동요 「병원놀이」 노랫말처럼 ‘배가 아프고 열이 나면’ 우리는 (소아과) 병원으로 가야한다고 어릴 적부터 배웠다. 이 같은 사실을 지금의 아이에게도 그대로 전하고 있다는 점은 변함없지만, 의료가 점차 의료‘화’ 되어가는 현실에 대하여 어렴풋이나마 문제의식을 가져왔다. 우리의 건강을 지키고 생명을 연장하는 데 의료기술의 발달이 기여한 바를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의료 시스템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환자를 대상화하거나 질병과 동일시하는 경향에 대해서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목소리에 깊이 공감한다.
이 같은 생각은 올해 봄에 <연결된 고통>이라는 책을 만난 뒤 더 단단해졌다. 그러다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겠으나, 이미 각자 이 책을 흥미롭게 읽었다는 9월의 북클러버 멤버들과 함께, 다시 책에 담긴 주제와 메시지를 두루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연결된 고통>은 내과 의사인 저자가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이하 외노의원)에서 3년간 공중보건의로 근무하며 외국인노동자들을 진료하는 과정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기록한 책이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폐원하였기에 외노의원을 찾았던 중국,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출신 노동자들의 고통을 헤아려 볼 수 있는 유일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언어, 성별, 연령은 물론 다양한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과의 소통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한계를 모를 리 없는 저자에게 ‘인류학’과의 만남은 환자와 질병(질환) 그리고 둘을 잇는 고통을 재해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외노의원을 방문한 환자들 가운데 다수를 차지하는 조선족은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라는 의사의 물음에 한두 가지가 아니라 여덟아홉 가지의 증상을 털어놓아 저자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그러나 이를 다시 인류학적 관점으로 들여다보면, 중국의 문화혁명이라는 역사적, 문화적 시련이 그들에게 남긴 고통이 한국사회에서 이주 노동자로 살면서 고용불안, 사회적 편견, 차별 등 부정적 요소로 인해 덧나게 되어 여러 개의 증상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다른 나라에서 온 노동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매일이 가져다주는 심신의 고통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 혹은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갑상선암, 심부전, HIV, 옴, 요통과 변비, 폐암, 우울증 등 다양한 질병으로 발현(재현)된다.
현대 의학의 그릇에 다 담기지 않는 아픈 몸의 이야기, 즉 질환 서사 속에는 가난, 노동, 성차별, 구조적 폭력이나 사회적 고통 등의 문제가 거의 언제나 상존한다. 의학이 환자의 질환 서사를 제외한 채 깔끔하게 통제되고 압축된 정보로 재단된 몸만을 다룬다면 그것은 인간의 삶 전체에서 상당한 부분을 스스로 소외시키는 것 아닐까. 그것은 의학의 무능을 스스로 입증하는 셈이라고 생각한다.(43쪽)
여기서 저자는 ‘질병(disease)’과 ‘질환(illness)’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의료인류학자 아서 클라인먼에 따르면, 질병은 코드화된 분류 체계이며, 질환은 환자의 삶에서 '이야기' 형태로 구현될 수 있는 것으로 그 이야기, 즉 “질환 서사(illness narrative)”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 역시 의료적 의사소통에서 의료진에게 ‘듣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아픈 사람의 몸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를 음소거하지 않고, 환자의 얘기에 주의를 기울이면 보다 나은 치료 결과를 얻을 수 있음을 외노의원에서의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HIV 감염 진단을 받았음에도 종교적 이유로 치료를 거부하거나, 경제적 이유로 가족과 떨어져 형벌을 받듯 홀로 생활하다가 끝내 폐암 판정을 받은 환자와 같이 때로 호전이나 쾌유되지 못한 경우에도, 저자는 두 사람으로부터 "자신의 얘기를 들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니 다시금 환자의 ‘질환 서사’와 의사의 ‘듣는 능력’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질병이 복수의 존재론에 기반한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질병 경험을 온전히 이해하고 설명하고 통제할 수 없음을 뜻한다. 따라서 의료는 상호 모순적으로 보이는 몸의 존재론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를 조심스럽게 해소하고 조정하는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183~184쪽)
현대 의학에서 진단과 치료는 증상의 원인을 특정 장기와 질병으로 좁히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하지만 앞서 조선족 환자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하나의 몸에 하나의 증상 혹은 질병만 생기란 법은 없다. 한국의 식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워 변비 증상이 생기고, 무거운 짐을 계속 나르는 중노동 때문에 허리도 아파서 외노의원을 찾은 태국 국적의 중년에게 결국 실신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일견 관계가 없어 보이는 질병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심장 기능과 구조에 문제를 일으킨 것으로 밝혀진다. 좋은 의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저자는 이때의 경험과 ‘복수의 질병들’이라는 개념을 소개하며, 한 사람의 환자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돌봄’이라고 답한다. 태국인 노동자처럼 여러 병원을 오가며 (오진(誤診)이 아닌 각 증상에 맞는) 각기 다른 진단을 받아 병에 다른 병을 얹는 게 아니라, 지속가능한 돌봄 의료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사회적 합의를 거쳐 제도적으로 정착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지역사회에서 가족 단위의 돌봄을 담당하는 ‘마을 주치의 제도’ 운영을 하나의 대안으로 들기도 한다.
지난봄, 책속 외노의원에 들렀을 때 저자 덕분에 이국땅에서 삶과 일을 병행하면서 질병으로 인한 신체적, 심리적 고통을 겪는 외국인노동자들을 알게 되었다면, 다시 들른 그곳에서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도 그들과 크게 다른 삶을 살거나 고통을 느끼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고통에 관한 내용을 다루는 책이지만, ‘연결’에 방점이 찍혀 있음을 염두에 두고 고통 너머의 이야기에 주목하면 좋을 듯하다. 의사로서 늘 이분법적 사고를 경계해왔음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몸과 마음의 고통을 분리하여 진료한 적이 있음을 고백한 저자는 그때를 되돌아보며 말한다. 하나의 경험에서 시작된 몸과 마음의 증상을 구분 짓기보다 그 관계를 눈여겨봐야 한다고. 그러한 시선으로 한 개인의 삶을 재구성하고 그 안에 자리한 고통을 재해석한 책을 거듭 읽고 나니 비단 외국인노동자뿐 아니라 어느 누구든 저자의 맞은편에 앉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연결된 고통>이 저자와 독자들의 연결고리가 되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연결된 존재임을 인식하고, 나아가 아픈 몸과 마음이 내는 소리에 관심을 갖는 사회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태어주길 바란다.
우리 삶과 질병을 재단해온 ‘이분법’이 고통을 줄이는지 아니면 되레 부추기는지는 끈질기게 응시해야 한다. 이 책에서 면면히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의 고통은 겹겹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 삶과 죽음, 자아와 타자, 개인과 사회의 고통이 모두 그러하다.(251쪽)
'고통'이라는 단어 자체를 두려워하는 내가, 고통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책을 읽은 건 색다른 경험이었다.
이 책은 단순 '고통'을 넘어 '삶의 모든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작가가 직접 겪은 에피소드들로 섬세하게 알려준다.
'신분 위장자', '질환의 서사', '이방인', '처벌과 속죄' 등 매 키워드가 내 삶을 곰곰이 생각하게 해주는 기회를 주었다.
가볍게 읽고 넘어가기에 아까운 주제들을 찬찬히 다시 한번 읽어보며, 삶의 태도에 대해 재고해 봐야겠다
[9월 독서리뷰] 연결된 고통(아몬드, 이기병 지음, 2023)
알 수 없는 이유로 몸이 심하게 아파 한동안 쉬었다. 심야시간 호흡이 되지 않아 들어간 응급실에서 예상치도 못한 장기간의 입원으로 이어진 병원 생활이었으나, 나에게 나타났던 증상들을 완벽하게 하나의 질병으로 규정짓지 못하고 치료가 종료되었다. 진단서 상에 적힌 나의 질병은 일부 희귀병으로 ‘추정되는’ 질환으로만 적혀있다. 정확한 진단명을 알 수 없는 질병으로 입원 치료가 종료되었고, 그 이후는 그저 대증요법에 맞춘 치료가 지속되고 있다.
나에게 나타난 증상은 다양했다. 호흡곤란, 발작, 근육 뒤틀림, 어지럼증, 복시 등. 어느 한 과에서 진료할 수 없어 매번 증상을 놓고 병원의 여러 과에서 협진을 봐야 했으며, 시간이 흘러 증상들이 개선되기 시작되면서 병원 생활을 종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특정 질병으로도 정의내릴 수 없이 증상들의 나열만 가득 차던 나의 병원 기록지를 보며, 나조차도 내가 호소하는 이 증상들이 심리적인 요인에 기인하는 것인지, 흔히 이야기하는 ‘꾀병’이 아닐지 스스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나타난 그 모든 증상은 나에게 무엇을 말하려 했던 것일까. 그리고 그 모든 증상을 왜 현대 의학에서는 하나의 질병으로 규정짓지 못했던 것일까.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난 <연결된 고통>은 이런 나의 의문과 궤를 같이하던 책이다. 책 표지에 적힌 문구, ‘현대 의학의 그릇에 담기지 않는 고유하고 다양한 아픈 몸들의 인류학’이라는 말이 내가 이 책을 집어 들게 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다.
이 책은 저자가 지금은 사라졌으나 한때 존재했던, 가리봉동의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에서의 근무 경험을 그간 만나온 환자들의 이야기와 함께 엮어낸 것이다. 저자는 에티오피아에서부터 동남아시아, 중국 조선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국가와 다양한 사회문화적 배경을 담고 있는 환자들을 진료하며, ‘낯선 몸’들을 치료했다. 그 과정에서 제도적, 문화적 한계에 부딪히기도 했으며, 환자를 호전시킨다는 보람과 어찌할 수 없는 진료 연속성의 부재와 같은 좌절을 맞이하기도 했다.
진료실에서 환자와 의사가 처음 마주하는 자리, 의사는 “어디가 불편하시죠?”라는 질문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환자는 으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요” 혹은 “목이 불편합니다”와 같은 주 호소증상부터 이야기할 테다. 그러나 저자가 마주한 조선족 환자의 호소증상은 위와 같은 간결한 내용이 아니다. 소화도 안 되고, 기침도 나고, 열도 나고, 머리도 아프다. 의사가 증상 유무를 물어보는 것 모두가 그의 고통이다. 이런 증상 설명은 환자가 정확히 어떤 질병을 가졌는지 의사가 간파하기 더욱더 어렵게 만든다.
작가 역시 이런 증상호소에 답답함을 표현한다. 하지만 이윽고 그는 이 모든 증상이 결국 환자가 살아온 삶의 고통을 포함하는 내용임을 깨닫는다.
(P.41-43)
환자는 결코 질병 코드로만 압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략) 의료 인류학자 아서 클라인먼은
코드화된 분류 체계로써의 질병(disease)과 환자의 삶에서 이야기 형태로 구현될 수 있는 질
환(illness)를 구분한다. (중략) 그렇게 환자의 아픔을 둘러싼 목소리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질
환서사(illness narrative)”라 부른다. (중략) 완치의 개념이 질병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조
절가능한 질병과 함께 무난히 살아가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질병과 함께 살아야하는 아픈 몸
은 삶에 다양한 서사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문제는 ‘완치불가’라는 한계가 드러났음에도 현대
의학이 효율적인 통제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몸이 아파 병원을 가면 정확한 진단명을 원한다. 정확히 어떤 질병이 나를 아프게 하고 있으며 인식에 따른 정확한 처방, 그에 따른 회복을 희망한다. 그러나 현대 의학체계에서 효율적으로 구별하기 위한 질병코드로는 우리가 왜 이런 아픔을 갖게 되었는지의 목소리를 파악할 수 없다. 질병이 들려주는 환자의 서사는 사라진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왜 대학병원 진료를 다녀올 때마다 불만을 느끼게 되는지 알 수 있다. 환자는 본인의 고통을 의사가 이해해 주기를 바라지만, 그 모든 고통은 질병이란 코드로 대체되기에 질환 서사는 진료실을 둘러싼 여러 가지 환경 - 제한된 진료 시간(의사는 일과 시간 내 그날 내원한 많은 환자를 다 확인해야 한다.), 체계적으로 분류된 질병코드(질병코드로 분류되지 않는 환자들의 증상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 등의 영향으로 의사에게 가 닿는 부분이 갈수록 줄어든다. 환자는 그 때문에 ‘불친절한 의료환경’에 분노하기도 한다.
나 역시도 그러했다. 정확한 질병 진단이 없이 증상에 맞춘 약물치료가 이어졌다. 비정형적인 (추정)질병으로 파악된 나의 질병은, 특정한 진단 코드로 분류가 불가능한, 그래서 우선적으로 주증상부터 완화해 가며 하나씩 가능성을 제거해 나가는 방향으로 치료가 지속되었다. 그 과정은 환자에게도, 의사에게도 지리멸렬하다는 표현이 맞겠다. 안개 속을 걷는 듯한 치료 과정과,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던 하루하루가 흘러가며, 장기간의 입원 치료가 이어졌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의료진과 나는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각자의 직장에 대한 어려움에서부터, 개인적인 이야기들까지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쌓였다. 물론 그 밑바탕에는 의료진들이 나에게 행하는 의술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작가는 다양한 국가의 환자들을 마주하며, 그들이 보여주는 “질환 서사”에 집중했다. 질병의 회복 여부와 상관없이, 그들의 질병 뒤에 숨은 서사를 살펴보는 과정은 그가 좀 더 ‘괜찮은 의사’를 고민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질병과 환자를 더 유심히 살펴볼 수 있도록, 그리하여 더 나은 치료 과정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했다. 그렇기에 그는 이 책 전체의 여러 이야기들을 풀어놓으면서 의술의 본질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그리고 그 의술을 펼치는 데 있어 우리는 좀 더 “질환 서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한다.
위에 언급한 질병과 질환의 구별 이외에도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떠오르는 내용이자 고민이라면 ‘소외’와 ‘돌봄’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개의 장에서 언급되는 다양한 질병과 환자의 네러티브는 결국 저자가 근무한 특수상황, 외노의원의 특성과도 연결된다. 외노의원을 방문하는 환자들은 우리 사회에서 ‘이방인’이 되는 경험을 겪었거나 겪고 있다.
HIV 보균자였으나 적극적인 치료를 포기했던 어느 가나 청년에게서도, 옴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쉼터에서 그대로 머무르길 희망하던 노동자들에게서도, 이유 모를 실신을 자주 해 병원을 찾은 이삿짐센터 인력인 태국 청년에게서도, 이 모든 이들의 삶의 궤적은 우리 사회에서 잊혀진 개개인의 서사가 한데 모여 ‘이방인의 이야기’를 드러내고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를 떠나면 나는 과연 이방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지금 내가 소속된 수많은 사회적 관계망을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 나아가면 나 역시도 ‘이방인’의 삶을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P.146
그들은 이주 노동의 수요에 의해 초대받았으나, 초대받지 않은 손님으로 대우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쉼터는 그들이 그들끼리의 세계를 잠시 소환하여 원래 가지고 있던 사회적 성원권을 복
원하는 공간이지 않았을까.
옴이 들불처럼 번져나가던 쉼터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냐고 질문을 하는 사람들을 일반적인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질병이 확산되고 있고, 그곳을 벗어나지 않으면 본인 역시 감염이 될 것이 자명한데도 떠날 수 없다는 게 여간 어리석어 보이는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떠나기를 주저하고 오히려 머무를 수 있음을 허락해달라 이야기하는 건, 쉼터에 머무르던 사람들이 ‘이방인’으로서의 고달픈 삶을 쉬어가는 공간이자, 그들의 아픔을 서로 꺼내어 놓고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자신이 떠나온 그 세계를 쉼터라는 공간으로 다시 데려와 재현함으로써 자신이 소속되었던 곳을 그리워하였으리라. 그리고 그곳에서의 소속감을 다시 되살렸으리라. 매일매일을 살아가는 일상 속 경험하게 되는 ‘소외감’, ‘이방인으로서의 정체성’은 내가 돌아갈 ‘쉼터’에서 잠시나마 잊혔을 것이다.
나는 ‘이방인’으로서의 삶이 얼마나 고달프고 쓸쓸한 것이었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과연 ‘이방인’이 되어본 경험이 없었던 게 맞을지, 그리고 그런 삶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게 되는지 고민했다. 집단에 소속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며 ‘나’와 ‘너’를 구별 짓는 경계는 어디서부터 발생하게 되는 것일까. 어쩌면 이런 일들에 관심이 없었던 나는 애써 관심을 두지 않음으로써 집단에 소속되어 있음에 안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에 의해 함부로 재단되어 목소리를 잃은 고통이 언젠가는 당신의 것일 수 있다(p. 251-252)’는 작가의 말은 더 많은 울림을 준다. 그 고통이 나의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와 같은 이기적인 형태의 동기라 해도, 숨겨진 목소리들에 의식적으로 귀 기울이고, 연대하며, 서로를 돌보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만, 그 과정이 성급하지 않도록 모두가 함께 고민하며 천천히 나아가야 할 것이다. 과학의 발달에 발맞춘 ‘이분법적 사고’로 성급한 결론을 내렸다 숨겨진 서사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작가가 언급한 우리가 책임지지 못한 “고통받는 누군가의 얼굴”을 만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얼굴은 우리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도 잊지 말아야 한다.
병원을 벗어나 일상으로의 회복 과정을 지나가고 있는 지금, 나는 누구보다도 고통은 개인의 서사와도 연결되어 있으며, 그 개인의 서사는 다수의 서사가 될 수 있음을 통감한다. 그리고 그 ‘연결된 고통’이 우리가 잊지 않고 고민해 나가야 할 문제라는 것을 다시 한번 이야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