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국 남자에게는 죄의식만이, 여자에게는 뺨의 상처만이 남는다.
〈달은…해가 꾸는 꿈〉에서 송승환이 이승철과 나현희가 나눈 사랑에 대해 회고하며
이동진_ 저는 감독님 영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핵심 키워드 중 하나가 죄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인공들 대부분이 죄의식으로 괴로워하는 인물들이죠.
박찬욱_ 저도 그 점을 의식하면서 영화를 만들고 있기에 인정할 수밖에 없네요. 살면서 저지르게 되는 실수와 악행에 대해서 잊거나 묻어버리고 넘어가지 않는 게 진짜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사람이 고귀한 것이고, 좀더 괴로워할수록 좀더 숭고해지는 것이죠. 어떤 사람이 숭고한가 묻는다면, 저는 죄의식을 가지고 괴로워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 저는 영화를 통해서 그 사람의 직업이나 학력 혹은 지성과 상관없이 숭고한 인물을 묘사하고 싶습니다. ---pp.43-44, 「자유로운 예술가와 성실한 직업인 : 박찬욱」
이동진_ 감독님 영화에서 물의 이미지는 사뭇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바다는 희망이나 본향의 느낌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은데, 〈박쥐〉의 바다는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죽음의 상징과도 같죠. 등장인물이 물에서 죽음을 맞게 되는 경우도 참 많습니다. 〈복수는 나의 것〉이나 〈박쥐〉에서 강이나 호수는 살인의 공간이 됩니다. 〈복수는 나의 것〉이나〈올드보이〉에서 어린 소녀들이 사고나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곳도 강물이구요. 사방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의 이미지로 공포를 형상화하는〈박쥐〉에서는 물이 피보다 진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박찬욱_ 원형적인 것은 언제나 양가적이라고 생각해요. 물 역시 일종의 원형으로서 희망과 생명 혹은 탄생의 이미지로 쓰일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소멸과 죽음과 불길한 느낌을 대변할 수도 있을 거예요. 〈박쥐〉는 바로 그 물의 축축하고 불쾌한 느낌을 강조했다고 할까요. 이렇게 물의 이미지에는 양면이 다 있지만, 대개의 영화들이 밝은 한쪽 면만 부각시켜왔기에 제가 유독 반대쪽으로 더 활용하고 있는 듯해요. ---p.172, 「자유로운 예술가와 성실한 직업인 : 박찬욱」
이동진_ 〈범죄의 재구성〉은 플래시백이 생명인 영화입니다. 제목 자체가 그렇죠. 〈저수지의 개들〉과 비슷한 구성의 복잡한 구조를 지닌 작품이잖아요. 그런데 〈범죄의 재구성〉뿐만 아니라 〈타짜〉 역시 구조가 일반 극영화와 다릅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하지 않고 계속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이야기를 하잖습니까. 플래시백을 사용하더라도 영화에서 묘사되는 플래시백들끼리는 시간적 순서대로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초기작인 이 두 작품은 플래시백들의 시간적 순서마저도 계속 뒤섞입니다. 순서대로 늘어놓는 것은 재미가 없다고 느끼시는 편인가요? 많은 이야기를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이야기의 경제성 때문에 그런 면도 있는 것 같은데요.
최동훈_ 감정을 쌓아가기에는 시간적 흐름을 따르는 게 훨씬 더 편하죠. 하지만 그렇게 하면 두 시간 안에 다 못 담아요. 순서를 바꿔놓으면 관객이 혼자서 마음속으로 이야기를 쌓아가게 됩니다. 그런 기본적인 필요에 의해서도 작품 구조가 그렇고요, 또 한편으로는 관객이 사고하면서 영화를 보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쪼개지고 점프되는 걸 보면서 관객은 그 빈 간극들을 맞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게 쓰면 제 자신도 즐겁고요. 전 그런 복잡한 구조가 있더라도 관객들이 다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pp. 297-298, 「이야기에 대한 욕망과 재능 : 최동훈」
- 사기라는 게, 털어먹을 놈이 테이블에 앉아 있다, 그럼 끝난 거예요. 문제는 테이블에 앉히기 위해서 우리가 얼매나 공을 들이느냐.
〈범죄의 재구성〉에서 이문식이 사기의 기술에 대해 설명하며
이동진_ 대중영화에서는 최적의 배우를 캐스팅하면 이미 절반가량은 끝난 거라는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습니다. 감독님은 배우에 대한 감이 유달리 뛰어나신 것 같은데 어떻게 캐스팅하십니까.
최동훈_ 캐스팅이 정말 영화의 절반일 거예요. 감독이 원한다고 해서 캐스팅이 맘대로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 마음에 두었던 배우들과 함께하게 되면 정말 운이 좋은 거죠. 저는 캐스팅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그 배우에 대한 판타지를 속으로 키워갑니다. 그 사람이 제가 쓴 대사를 말하면 어떻게 될까 상상하는 거죠. 예를 들어서 김혜수 씨의 경우, 캐스팅하기 전에 어떤 식당의 옆 자리에서 말하는 걸 계속 듣게 됐어요. 그때 속으로 그런 상상을 했죠. 저는 제 상상력을 자극하는 배우가 좋습니다. ---p.418, 「이야기에 대한 욕망과 재능 : 최동훈」
- 우리가 찍을 영화 첫 장면 말이야, 주인공이 가스 자살을 하려고 하려다가 의자에 넘어져서 실패하는 그 장면 말이야. 그게 바로 인생이야. 우리 인생은 언제나 결정적인 순간에 실패를 맞이하게 되는 거야. 아마 그 장면 보던 관객들은 복도에서 아주 데굴데굴 구르면서 난리를 칠 거야. 모르긴 몰라도 그 장면 때문에 백만 명은 더 올걸?
〈개그맨〉에서 감독이 되고 싶어 하는 안성기가 함께 강도짓을 하게 된 황신혜에게 말을 건 네면서
이동진_ 감독님 영화의 바탕에는 페이소스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희극적인 상황이 계속 이어지는데, 그 바탕에는 슬픔이 도사리고 있는 경우라고 할까요. ‘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라는 카피를 썼던 〈남자는 괴로워〉와 남을 웃기는 게 직업인 남자의 못다 이룬 꿈과 슬픔을 다룬 〈개그맨〉이 대표적이겠지만, 여타 작품들에서도 비슷한 정조가 지속적으로 발견됩니다.
이명세_ 그건 내가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이겠지. 나는 가장 중요한 예술가의 자세가 연민이라고 생각해. 그건 예술가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덕목일 거야. 그런데 영화적으로 연민을 드러내는 방법론은 늘 엉켜 있어요. 찰리 채플린도 말했지만, 사실 희극은 롱쇼트(멀리 찍기)에서 비롯해. 반면에 비극은 클로즈업에 담겨 있는 거지. ---pp.540-541, 「단 하나의 영화 문장을 향하여 : 이명세」
이동진_ 감독님 영화 속의 어떤 장면들을 볼 때면 최대한 대사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연출한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대사에 의지하지 않고서 시각적인 언어로만 표현하는 걸 즐기신다고 할까요.
이명세_ 그게 영화니까. 물론 대사에도 중요성이 있지만 배우의 몸을 통 해 같은 걸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게 더 좋은 거지. 내게는 무성영화 시절 의 감독들이 그랬던 것처럼 대사 없이 영화를 찍고 싶은 욕망이 있어. 대사를 하나도 넣지 않고 찍고 싶다고. 음악과 사운드와 배우의 동작만 으로 충분한 영화를 만들어서 영화의 선배들과 승부를 벌이고 싶어.
---p.565, 「단 하나의 영화 문장을 향하여 : 이명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