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광은 역사책을 쓰는 자기 입장을 이렇게 밝혔다. “신은 국가의 흥망성쇠와 백성들의 애환, 경계해야 하거나 의미 있는 사건들을 골라내 편년체로 정리하고자 했으나, 각각의 사건에서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에 대한 판단은 역량이 부족해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이 말의 취지는 명료하다. 독자가 자기 책임 아래, 자기 필요에 따라, 자기 눈으로 책을 읽어보라는 뜻이다
--- p.53
역사는 불친절한 스승일 뿐이다. 역사가 거울이라면, 그것은 고대 사회의 청동거울처럼 흐릿한 거울일 테다. 역사에 관해 배울 수는 있지만, 그것을 통해 유일무이한 역사의 교훈을 얻어내기는 어렵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과거를 읽는 독자로서 역사로부터 각자에게 필요한 교훈들lessons from history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 p.59
모든 역사서술이 진실이 되지는 못한다. 사실관계의 조합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고, 확인된 사실들 사이에도 빈틈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가는 이 공백지대를 경험에 의거한 추측, 상상, 해석으로 메워가면서 역사를 서술한다. 그러므로 최고의 역사가가 최선을 다해 쓴 역사도 실체적 진실이 아닌 부분적 진실만을 드러낼 수 있다
--- p.100
역사가는 당연히 증언에서 나타나는 착오와 혼란에 유념하고, 기억의 변형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곧바로 기억의 신빙성을 부정하는 이유로 삼는 것은 매우 폭력적이다. 90세가 넘은 일본군‘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의 증언에 대해 일본 정부와 우익 인사들이 보여준 태도가 그랬다
--- p.111
춘천전투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확증되지 않은 육탄 호국용사의 자기희생 자세를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는 요청이 아니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춘천전투의 교훈은 매뉴얼에 따라 훈련된 군대가 이긴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영웅적 희생의 서사를 강조했던 일본군의 최후를 우리는 이미 반면교사로서 잘 알고 있다
--- p.121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에서는 수많은 별이 경연을 벌였다. 그 찬란한 문예 스타들 가운데 한 사람이 로렌초 발라(1407~1457)다. 그는 …… 문헌학자로서 …… 강직한 성품과 꼼꼼한 고증으로 교황청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던 〈콘스탄티누스 황제 기진장Constitutum Constantini〉이 허위임을 밝혀냈다
--- p.128
서양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랑케가 아마추어 역사가와 전문 역사가를 구별하는 첫 번째 기준을 사료비판에서 찾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사료 없이 역사 없다”는 프랑스 역사가 랑글루아와 세뇨보의 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문서만이 사료는 아니다. 인간 삶의 흔적을 담고 있는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사료다
--- p.130
프랑스 아날학파의 거두로 불리는 브로델(1902~1985)일 것이다. 브로델에 따르면, “역사는 세 종류의 운동, 즉 빠르게 움직이는 것, 느리게 움직이는 것, 그리고 움직임이 아예 없어 보이는 것으로 나뉠 수 있다.” 랑케 이후 정치사가들은 빠르게 움직이는 것에 관심을 집중했다. 마치 연극배우의 말이나 발레리노의 발걸음에 집중하는 아마추어 평론가처럼 말이다
--- p.212
브로델은 …… 장구한 지구의 시간이나 인간 역사의 긴 시간을 외면하고 하루살이처럼 덧없는 것에 집착하는 역사학의 관행에 비판적이었다. 종래의 역사서술은 지배 엘리트의 사사로운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집중한 대가로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시야에서 놓쳤다는 것이다
--- p.213
역사의 시간 가운데 두 번째는 사회경제적 시간이다. 경제는 주기를 타고 움직인다. 이 주기에 해당하는 프랑스어가 콩종튀르conjoncture다. 흔히 ‘국면’으로 번역하는 콩종튀르는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한두 세기 간격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리듬이다. 유럽에서 인도로 가는 직항로 발견과 더불어 후추값이 폭락하고, 여기에 더해 아메리카에서 대량의 은이 유입되면서 유럽사의 무게중심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했던 변화가 여기에 해당한다
--- p.214
역사적 시간의 마지막 층위는 ‘사건들의 역사’로 통칭되는 정치적 시간이다. …… 프랑스대혁명이 대표적이다. 1789년 5월 삼부회 소집으로 시작된 파리의 혁명은 10년 후인 1799년 11월 나폴레옹이 일으킨 브뤼메르Brumaire 18일의 쿠데타로 막을 내렸다. 어떤 역사가들은 나폴레옹이 프랑스대혁명을 교살했다고까지 표현한다. …… 역사 무대에서 펼쳐지는 이 연극에서 중시된 것은 정치적 투쟁과 군사적 승패와 명사들의 지략이었다
--- p.214
별다른 특징 없는 민중의 일상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오랫동안 규정해온 저변의 힘들을 읽어낼 수 있는 사료의 암석층이라고 할 수 있다. 퇴적층의 단면에서 누적된 지각운동을 발견하는 지질학자와 비슷하게, 역사가는 그루터기처럼 이 땅에 깊이 뿌리내린 채 지속되어온 민중의 삶 속에서 빠르지 않게 진행되어온 변화의 단서들을 찾기 위해 애쓴다. 이것이 바로 ‘밑으로부터의 역사’다
--- p.218
막스 베버는 한때 역사의 진보에 대한 선배들의 낙관적 신념을 계승했다. 그리하여 그는 인류의 역사가 주술적 단계에서 합리적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 증거를 자본주의 발전과 관료제의 출현에서 찾았다. 베버와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국민경제학의 역사학파에 속한 거장들도 서구 역사를 고대 가내경제에서 중세 도시경제를 거쳐 근대 국민경제로 진보해온 과정으로 파악하면서, 이 추세가 이어져 가까운 미래에 세계경제가 도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 p.231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동아시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양육강식, 자연에 의한 도태, 적자생존으로 요약되는 진화의 세 법칙은 같은 시기에 근대화를 강박적으로 도모한 일본, 중국, 한국 지식인들의 생각을 지배했다. ……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에서는 한동안 문명사 연구가 크게 유행했다. 일본의 조선 침략은 세계사적인 문명의 발전을 아시아에서 일본이 완성하겠다는 후발주자 특유의 과대망상의 결과였다. 이 점에서 보면, 진보에 대한 맹신과 자기 능력에 대한 과대평가가 인류의 진보에 가장 큰 장애물이었는지도 모른다
--- p.237
청년 마르크스가 유물론적 역사관에 도달하기까지는 네 개의 강을 건너야 했다. 헤겔의 역사변증법, 포이어바흐의 유물론, 생시몽과 푸리에로 대표되는 초기 사회주의 사상, 리카도와 스미스가 제시한 고전경제학의 노동가치설이 바로 그것이다
--- p.283
청년 마르크스는 이제 파리의 지붕 밑에서 또 하나의 깨달음에 도달했다. 자본은 돈이 아니라 과거 노동의 집적물이라는 것이다. 파리에 머물던 시절, 마르크스는 아직 온전한 공산주의자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시기의 마르크스를 ‘인간학적 유물론자’라고 평한다
--- p.287
마르크스는 인류의 역사가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천명했다. 계급투쟁은 착취-피착취 관계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역사를 이해할 때 중요한 점은 이러한 착취-피착취 관계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 p.291
칼 베커(1873~1945)는 1931년 미국 역사학회 회장 취임 강연에서 객관성에 대한 동료 역사가들의 자신감 상실을 이렇게 밝혔다. “모든 사람이 각자의 역사가다!” …… 베커가 말하는 모든 사람은 많은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은 평범한 시민이다
--- p.331
제1차 세계대전은 국민들 간의 전쟁이었을 뿐 아니라 역사가들 간의 이전투구였다. 미국과 영국 그리고 독일의 많은 역사가가 총 대신 펜을 들고 조국을 위해 치열한 선전전에 참가했다. 그 결과 전쟁이 끝났을 때, 역사가들이 합의할 수 있는 객관적 역사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독일의 황제를 현대판 ‘아틸라Attila’로 폄하한 영미권 역사가들과, 영국의 공리주의를 ‘장사치의 철학’이라고 비난한 독일 역사가들 사이에 신뢰의 가교는 사라지고 말았다
--- p.335
베커를 위시한 20세기 역사가들은 무질서한 사실들의 더미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 역사가 역사가를 통해 스스로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가 역사를 통해 자기 말을 하는 것일 뿐이라는 점을 사람들이 명확하게 알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 p.336
헤겔은 두 가지 종류의 역사에 관해 말했다. 첫 번째인 ‘res gestae’가 ‘과거에 발생한 사건’을 뜻한다면, 두 번째인 ‘historiarerum gestarum’은 ‘과거에 발생한 사건들에 대한 기록’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앞의 것을 객관적 역사, 뒤의 것을 주관적 역사라고 바꿔 부르기도 한다
--- p.358
직업적 역사가는 관점의 지배만 받지 않는다. 역사가의 작업 결과는 입장을 달리하는 학자들의 공동체 속에서 평가받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사료를 적절하게 인용했는지, 사료와 주장 사이에 너무 큰 간격은 없는지, 확인된 사실과 해석 사이에 불일치는 없는지를 검토해야 한다. 이 작업을 담당하는 것이 동료 평가peer review다
--- p.362
과거의 어느 한 시대, 어떤 인물이나 당파에 대한 평가는 세상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와 사회 구조, 그리고 그 변동이 초래하는 정치의 변화다. 예를 들면, 19세기 후반 대중mass의 등장과 더불어 …… 지배 대상으로 간주되었던 이들이 어렵게 쟁취한 보통선거권에 힘입어 정치에 참여하면서, 과거의 사료 속에서는 통치 받는 사람에 불과했던 사람들이 역사의 주요 행위자로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 p.363
역사학도 재조명과 재해석과 다시 쓰기를 거듭하면서 발전해왔다. 이러한 과정은 양피지 위에 적었던 글씨들을 지우고 그 위에 다시 쓰는 것과 흡사하다
--- p.3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