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커다란 체크리스트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해야 할 것을 아무리 지우고 지워도 끝나지 않는 무한대의 체크리스트. 평생 무언가를 ‘해야 하며’ 살아야 했던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사실 ‘하지 않기’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와이파이나 체크리스트가 없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던 하루가 와이파이와 체크리스트 안에서만 머물고 있는 건 아닐지 되짚어 볼 시점이다. 노 와이파이No wifi일 때 무궁무진한 대화의 장이 펼쳐질 수 있는 것처럼, 노 체크리스트No checklist일 때 우리의 오늘은 어떤 것으로도 채워질 수 있다. 하지 않기로 말미암아 필요나 의무가 아닌 온전한 나로 살 수 있는 것이다.
---「프롤로그: 오늘의 목표는 _______ 하지 않기」중에서
음식을 흘렸을 때 물티슈를 쓱 뽑아 사용할 수 있었지만 행주를 빠는 수고로움을 감내한 나, 외출하기 전 자연스럽게 가방 속에 텀블러를 챙기는 나, 필요한 물건만 사고 무료로 주는 샘플이나 굿즈는 거절하는 나의 멋짐에 취해보는 일.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런 일이 아닐까? 부족한 점을 찾기보다 현재의 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실천하고 크게 기뻐해 보자. 이런 경험은 차곡차곡 내 안에 쌓여 가끔은 흔들려도 다시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하는 든든한 무게추가 되어줄 것이다.
---「내가 대견하다는 기분」중에서
여기에 덧붙여 나는 ‘혼자 있을 때’ 행복한 사람에게 눈길이 간다. 내가 뭘 할 때 기분이 좋은지 알고 있는 사람의 시간은 권태가 아닌 여유로 채워진다. 혼자 있는 상태를 외롭거나 쓸쓸하게 여기지 않고, 고요 속에서 자기만의 속도로 루틴을 지키며 물 흐르듯 하루를 보낸다. 혼자 있을 때도 행복한 사람은 가치 판단의 기준이 자기 자신에게 있을 거라고, 적어도 그러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일 거라 믿는다.
---「일상에 시적 허용하기」중에서
물건이 바로 앞에 있을 때는 초점을 맞추기 어렵듯, 나 자신을 더 정확히 보기 위해서는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이것을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명상이다. 나는 명상을 하기 위해 애플리케이션에서 재생 버튼을 누르지만, 일상에서는 정지 버튼이 눌린다. 숨 가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잠시 멈춤을 선택하고 숨을 고른다. 끊임없이 내가 놓친 것과 붙잡아야 할 것에 대해 생각하던 머리를 비운다. 그 안에서 배운다. 멈춘다는 건 뒤처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땀을 식히며 다시 뛸 기운을 모으는 일이다.
---「영혼 탈출이 필요한 시간」중에서
자신에 대해 오래 고민해 본 사람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나는 이제 해마다 유행이 바뀌어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취향을 묻는 질문에 망설이는 일이 없다. 내게 비움은 단순히 물건을 없애는 일이 아니다. 무엇을 비우고 무엇을 남길지 고민하는 일은 나를 돌보는 일과 같다.
---「추억은 물건이 아니다」중에서
루틴이 아무리 중요하다지만 매일 매 순간 지킬 수는 없다. 모든 것이 헛되게만 느껴지는 날이, 뒤틀린 마음이 나를 갉아먹는 날이, 어긋나고 싶은 치기가 내 안을 표류하는 날이 있으니까. 충동의 손을 들어주는 건 일상에 빈틈을 만드는 일이다. 그 사이로 알 수 없던 세계가, 기대하지 못한 즐거움이, 이따금 꺼내볼 수 있는 달콤한 추억이 흘러들어온다. 조개의 상처가 만들어낸 진주처럼 일상의 틈이 주는 귀한 선물이다.
---「탄탄한 일상을 직조하는 법」중에서
“너무 편한 건 별로야”라는 말을 자주 한다. 너무 편한 것은 정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단순한 이유에서다. 멀지 않은 거리는 웬만하면 걷고, 춥다고 히터를 틀거나 전기장판으로 몸을 빨리 데우는 걸 꺼린다. 즉석밥보다는 솥밥이 좋고, 사용하는 전자기기나 애플리케이션에 새로운 기능이 추가돼도 잘 사용하지 않는다(애초에 업데이트도 잘 안 한다). 비슷한 예로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요약본을 찾거나 2배속, 10초 뒤 같은 기능을 쓰지 않는다. A부터 Z까지 가기 위해 최대한 빠른 지름길을 찾기보다는 B, C, D, E, F를 차근차근 밟아가는 게 좋다.
---「비효율성 인간」중에서
누군가는 핸드폰으로 셀 수 없이 많은 곡을 들을 수 있는데 LP 몇 장을 반복해서 듣는 게 왜 좋냐고 물었다. 나는 mp3에 스무 곡 남짓의 노래를 겨우 넣고 매일 반복해서 듣던 그때를 기억하냐고 되물었다. 나는 그 수고로움이 좋다. 새로운 곡을 넣고 싶어지면 울며 겨자 먹기로 뺄 곡을 고심하던 그때의 아날로그적 감성과 사고를 놓치고 싶지 않다. 내 손에 쥔 것을 더 소중히 아끼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종이책과 LP는 내게 ‘쓸데 없는 물건’이 아니다. 속도가 생명이라 가르치는 세상에서 이따금 나를 효율의 반대편에 존재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내가 원하는 쓸모이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서 가장 쓸데 있는 물건」중에서
소비에는 ‘사라지는 소비’와 ‘지속되는 소비’가 있다. 사라지는 소비는 행복은 쉽게 휘발되는 반면 높은 확률로 후회라는 잔재를 남기는 소비를 말한다. 배달 애플리케이션에서 맛집을 둘러보고 음식을 기다리는 과정은 설레지만, 배달 음식을 먹고 나면 씁쓸한 후회가 남는 것과 같다. 반면 지속되는 소비는 구매하는 순간보다 구매한 이후 만족감이 더 커진다. 대표적으로 식물을 구입할 땐 차를 끌고 화원에 가는 과정보다 집으로 데려와 정성껏 분을 갈고 물을 주며 햇빛에 반짝이는 잎을 지켜보는 일이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든다.
---「사라지는 소비와 지속되는 소비」중에서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갈대보다도 자주 흔들리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내 모든 결정과 행동의 목표는 단 한 가지다. 바로 나를 잃지 않는 것. 다수에게 옳다고 해서 내게 맞는 것은 아니며 삶의 문제가 언제나 한 가지 결론으로 도달하는 건 아니기에 나는 이랬다저랬다 간을 보며 최적의 나를 찾는다. 때론 빠르고 때론 느리게, 때론 뜨겁고 때론 차갑게. 인생은 모순투성이니까, 인생을 사는 나도 그래도 된다.
---「에필로그: 필요와 의무가 아닌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하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