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김호두. 어릴 때부터 워낙 놀림을 많이 받아 왔기 때문에 이젠 아무렇지 않은 이름. 아니, 오히려 좋다. 이름이 호두라, 다른 사람들은 이름이 이상하다는 것에만 주목하니까. 이름은 내 다른 면들에 비하면 평범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니까.
--- p.7
아빠는 내 머리를 마구 헝클곤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었다. 작은 아빠는 계산대 앞 테이블에, 큰 아빠는 창가 쪽 테이블에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아 말없이 아이스크림만 먹었다.
누가 보면 어색해 보일지 모르나 내겐 익숙한 상황이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앉아 아무 말 없이 자기 할 일을 하는 두 아빠. 셋이 있을 땐 늘 이런 분위기여서 그런지 조금의 불편함도 없이 편안하다.
--- p.44
“생각, 아니 호두, 너네 어머니는?”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움찔하자 아빠가 먼저 나섰다.
“호두 엄마는 여기 없어.”
“아, 네.”
“호두 낳고 얼마 안 돼서 하늘나라로 갔거든. 그래서 호두는 엄마에 대한 기억도 없을 거야.”
웅희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표정이고 아빠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다. 물론 여기저기 소문이 나서 좋을 건 없지만, 이 정도는 친구들에게 알려져도 괜찮다. 아빠가 나에겐 아빠가 한 명 더 있다는 이야기만 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호두는 사실 나 말고도…….”
“아빠.”
역시나 아무 생각 없이 전부 이야기할 것 같더라니.
--- p.67~68
아빠가 둘이니 할머니는 세 사람이어야 하지만, 내겐 할머니가 하나뿐이다. 정확히는 외할머니. 두 아빠는 예전부터 내게 할머니는 외할머니 한 사람뿐이라고 했다. 역시 어릴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지만, 나이를 먹고 두 아빠와 할머니가 나누는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알게 됐다. 아빠들은 나와 함께 살기 시작한 후로 가족들과 연락을 하지 않고 있고, 큰 아빠만 큰 아빠의 누나와 가끔씩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는 걸.
--- p.81
“할머니도 다른 사람들하고 많이 다르지 않아. 어디서 아빠 둘이 애 하나를 키운다고 했으면 무슨 사연일까 궁금하고 그랬겠지. 아마 호두 아빠들도 마찬가지일 거야. 호두가 아니었다면 두 사람이 같이 살면서 아이를 키운다는 건 상상도 안 해 봤을 거고, 그럴 생각도 없었을 거야. 어쩌면 이상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우리 호두는 너무 특별하고 소중한 아이니까, 할머니도, 두 아빠도 호두랑 같이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선택한 거야.”
--- p.93~94
“난 엄마가 재혼해서 새아빠까지 두 명이야. 근데 넌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아빠가 두 명이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말을 고르고 있는데 지우가 다시 말했다.
“미안, 그냥 물어본 거야.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괜찮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설명하기가 어려워서.”
지우의 표정을 잠시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난 태어났을 때부터 엄마는 없고 아빠가 둘이었어. 그래서 그게 이상한 건지도 몰랐어. 그게 내겐 당연한 일이어서, 왜 그런지 설명하기가 어려워.”
“그렇구나.”
--- p.109
큰 아빠는 소파에 앉아 TV 쪽은 쳐다보지 않고 휴대전화만 보고 있고, 작은 아빠는 바닥에 앉은 채 소파에 기대어 TV와 휴대전화를 번갈아 가며 보고 있다. 적당히 떨어져 앉아 제 할 일을 하는,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은 밤 시간의 집안 풍경이지만 분위기는 다르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두 아빠의 모습도 조용한 집 안에 가득 퍼지는 TV 소리도 전부 어색하고 낯설게 느껴진다.
단순히 기분 탓이라기엔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이 분위기와 내 마음은 어떡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이게 사춘기라는 건지, 그래서 이런 건지, 아니면 다른 어떤 건지.
--- p.180
“넌 아빠 둘이랑 살아서 불편한 건 없어?”
“불편한 건 많아.”
“많아? 어떤 게 불편한데?”
“어디 가서 엄마 얘기가 나올 때 엄마가 돌아가셨단 얘길 하고 나면 결국 아빠가 둘이란 이야기까지 해야 할 때가 생기니까. 어릴 땐 몰랐는데, 이제는 아빠가 둘이란 게 알려지면 설명을 해야 하고,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 그건 그렇겠다.”
작은 아빠는 내 쪽을 보며 천천히 고갤 끄덕이곤 다시 걸었다.
“그럼 한 사람하고만 사는 건 어때?”
“응?”
“나나, 진욱이나, 한 사람하고만 사는 건?”
--- p.214
아빠와 함께 복도를 걸어 계단을 내려왔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설마 하는 생각이 사실인 걸 확인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조용히 아빠를 따라 학교를 나왔고, 한쪽에 세워진 차에 올랐다.
“호두야.”
“응?”
“이제 병원으로 갈 거야.”
--- p.258
분명 이곳이라면 살아가기에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햇볕도 잘 들고, 흙도 부드럽고 포근하다. 하지만 혼자 남고 싶지 않았다.
“다른 데로 가자.”
“응?”
“우리가 다 같이 지낼 수 있는 곳으로 가자.”
“여기보다 좋은 곳은 없을지도 몰라.”
“이만한 자리가 없을 수도 있어.”
둘의 말에 난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같이 있고 싶어.”
내 말에 고민하던 검은 강아지가 말했다.
“그래, 그럼 같이 살 수 있는 곳으로 가자.”
--- p.2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