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가 이렇게 위험한 기로에 서 있는 이유가 과거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추세의 결과임을 깨달았다.
---「서론」중에서
이 책의 목표는 세 가지다.
첫째, 지구촌 역사의 토대를 이룸에도 불구하고 자주 간과되는 주제인 기후를 과거의 이야기에 다시 끼워 넣고 어디서, 언제, 어떻게 날씨, 장기적인 기후 패턴, 기후 변화가 세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둘째, 수천 년에 걸친 인간의 자연계와의 상호작용 이야기를 제시하고, 우리가 환경을 어떻게 자기 뜻대로 활용하고 틀 짓고 변형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말이다.
셋째, 역사를 보는 지평을 넓히는 것이다.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부유한 나라들이 아닌 다른 대륙과 다른 종교의 역사는 흔히 부차적이라고 밀쳐지거나 완전히 무시됐다. 이처럼 과거와 우리 주변 세계를 보는 왜곡된 방식을 바꾸고자 한다.
---「서론」중에서
도시가 어디서 나타났는지에 주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디서 나타나지 않았는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역시 가치가 있다. 특히 서유럽, 아마존강 유역, 북아메리카 동부 같은 곳 말이다. 커다란 광역 도시권이 시작된 곳은 토양 유형, 배수, 강우량, 기온, 심지어 고도도 모두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 초기 도시들은 ‘국한된 곳’에서 생겨났다. 다시 말해서 그곳들 자체는 풍성한 지역이지만 적대적인 지세(사막, 산, 바다 같은)에 둘러싸인 곳이었다.
따라서 도시(그리고 따라서 ‘문명’)의 탄생을 추동하는 발동기는 주민들을 환경적으로 쾌적하고 생산적인 땅이라는 좁은 대역으로 밀어넣는 압력에 의해 동력을 얻어야 한다. 그곳은 생태 발자국을 확대하는 능력이 제한돼 있다. 다시 말해서 초기 도시들은 필요의 산물로서 생존이 가능하려면 협력이 필수적인 곳에서 생겨났다.
---「4장 초기 도시와 교역망」중에서
도시 붕괴와 주민의 이주가 얼핏 불운의 지표로 보일 수 있겠지만, 그것들은 공급 부족과 수요 과잉이라는 문제에 대한, 그리고 도로의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한 중앙집권적 정부의 실패에 대한 논리적이고 효과적인 해법이라고 볼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서기전 2200년 무렵의 상당한 기후 변화가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가 아니라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어떤 조치가 취해졌느냐다. 다시 말해서 중요한 것은 통치자, 지배층, 사제, 관료, 노동자가 적응(특히 커지는 환경 압박에 대해)을 할 수 있었느냐, 그리고 그 선택과 조치가 적절하고 효과적이었느냐다.
기후가 아카드 제국을 무너뜨렸다기보다는 아카드 제국이 스스로 무너져 새로운 도시국가 무리 속으로 쪼개져 들어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러 면에서 사르곤 왕의 통합 이전 시대로의 회귀였다. 그것은 사르곤의 자손과 그 측근들에게는 나쁜 소식이었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좋은 소식이었다. 지역 권력이 지역민들에게 되돌려진 것이다.
---「5장 분수에 넘치는 삶의 위험성」중에서
모든 재난에서 고통스러운 짐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편파적으로 지워진다.
현대의 연구는 사회경제적 압박과 기근에 대한 취약성의 결정적 요인은 구체적으로 자산을 가지지 못한 사람의 비율임을 입증하고 있다. 요컨대 가난한 사람의 비율이 높을수록 식량난, 기근, 국가 붕괴의 위험이 커진다. 그렇다면 균형이 깨지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 결과는 단지 극적이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떤 경우에 그것은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
---「9장 로마의 온난기」중에서
칭기스칸이 인류 역사상 최대의 육상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로 설명된다. … 그러나 성공의 연료는 1211년에서 1225년 사이의 이례적으로 많은 비가 내린 시기가 제공했던 듯하다. 몽골에서 이 시기는 무려 1110년 이상 만에 가장 비가 많이 내린 시기였다. 이런 기후 조건은 환경의 수용력을 크게 증가시켜 풀이 더 많이 자라게 하고 가용 초지를 극적으로 확장했다. 이것이 가축 떼의 규모를 크게 늘리는 기반을 제공했다. 특히 중요한 것이 말이었다. 칭기즈칸과 그 추종자 및 계승자들은 전술적으로 뛰어났겠지만, 몽골은 행운을 만난 덕분에 방대한 자원을 이용해 적들을 물리치고 제국을 확장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아주 제때에 할 수 있었다.
---「13장 질병과 신세계의 형성」중에서
아메리카를 ‘발견’한 이야기는 한 가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유럽인들은 왜 애초에 본향 근처가 아니라 대서양 건너로 확장하고자 했을까? 즉 그들은 왜 서아프리카에서 같은 일을 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까? 그곳의 여러 조건이 대서양 건너편보다 훨씬 좋았는데 말이다.
서아프리카는 아메리카와 비슷하거나 더 나은 기후 조건을 누리는 지역이었다. 이후의 노예무역에서 드러나듯, 노동력도 풍부했다. 게다가 유럽에 더 가까웠다. 따라서 운송 과정이 대서양을 건너는 것보다 더 빠르고 덜 위험했으며, 이에 따라 운송비를 줄일 수 있어 상품 가격을 낮출 수 있었다.
…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서아프리카 국가들의 정치 조직이 매우 발달해 식민화를 고려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는 사실이다. 19세기까지 유럽인들은 해안에서 쏘는 대포 너머로 뚫고 들어가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콩고, 베닌, 오요 등의 왕국들은 외지인의 습격을 완벽하게 물리칠 수 있었다. 유럽인들은 금광을 장악하는 것은 고사하고 접근하는 데도 완전히 실패했다. 그들이 원했던 농장 개발도 할 수 없었다.
아프리카인들이 저항한 결과로 유럽인들은 차선책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아프리카의 농장과 광산에서 노예로 일을 시키는 대신에 노예를 배에 싣고 다른 곳으로 간 것이다.
유럽이 아메리카와 접촉하던 시기의 현실은 분명하고도 뚜렷했다. 노예무역은 아프리카의 약함이 드러난 것이 아니라 강함이 드러난 것이었다.
---「14장 생태 지평의 확대」중에서
기후는 악화 요인일 뿐, 문제 자체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역사가는, 분수령이 되는 순간을 찾아내고 전환점으로 묘사될 만한 시간을 콕 집어내고 싶은 억누를 수 없는 유혹에서 멀리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17장 소빙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