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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하는 수집가의 단짝

: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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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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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3년 12월 22일
쪽수, 무게, 크기 224쪽 | 300g | 125*200*13mm
ISBN13 9791193497029
ISBN10 1193497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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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문구 제품의 90% 이상을 부모님의 공장에서 제조한다. 어린 시절에는 그저 놀이터였던 공간이 지금의 내게는 사뭇 다른 의미가 되었다. 20년 가까이 공장에서 일하고 계시는 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면 서로의 책임을 다하는 곳, 팔레트에 차곡차곡 섬처럼 쌓여 있는 소소문구의 제품을 살펴보고 있자면 모두의 고집을 실천하는 곳, 수많은 박스를 분주하게 옮기는 택배 상차 작업을 볼 때면 각자의 노고를 인정받을 수 있는 곳이 된다. 그렇게 제본소집 딸은 문구 브랜드의 대표가 되었다.
--- p.12

누구나 안다. 휴대폰 메모장이 가진 대체 불가한 편리함을. 그럼에도 사고의 범위를 넓히는 공간으로 노트를 선택한 이유는 종이라는 물성이 가진 매력 때문만이 아니다. 우리의 사고는 불, 물, 공기의 성질과 닮아서 지면 위에서 활활 타오르거나 흐르고, 날아다니거나 흩어져야 비로소 확장되기 때문이다. 노트의 비어 있는 다음 장은 무엇으로 채워질까?
--- p.18

“‘작고 깊다’ 같은 추상적인 말 말고, 더 구체적인 콘셉트가 필요해요.” 당시 소소문구에 제품을 파는 직책은 김청 브랜드 매니저뿐이었다. 그렇기에 제품의 마케팅, 세일즈에 관한 안건은 모두 그 한 명에게서 나왔다. 그는 가격과 품질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완성도 있는 브랜딩’을 가장 강조했다.
--- p.24

‘연필의 소명은 소멸이다’라는 말이 있다. 연필은 다른 필기구와 달리 흔적 없이 소진된다. 연필을 한 사람으로 본다면 이 얼마나 깔끔한 성품인가? 삶의 길이가 세월을 따라 조금씩 짧아지며 소멸되는 과정을 연필은 온몸으로 보여 준다. 어쩌면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소멸일지도 모른다.
--- p.50

모든 가방이 엑스레이 검사대를 완전히 통과할 때쯤 누군가 옆에서 조용히 나를 불렀다. 무엇인가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듯했다. 이어서 심각한 표정을 한 직원 두 명이 와서 배낭 안에 있는 모든 물건을 꺼내 보라고 했다. 나는 순간 멈칫했다. 배낭 안에는 연필이 한가득 있었기 때문이다. 새벽 내내 잠 한숨 못 자고 랩과 에어캡으로 연필을 한 자루 한 자루 포장했다. 어림잡아 500자루가 넘었을 것이다.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이걸 모두 다요?”라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들은 다시 한번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네.”라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 p.55

초등학생 때 리추얼이라는 단어를 알았더라면 나의 리추얼은 연필 깎기라고 소개했을 것이다. 연필을 깎는 일은 잠들기 전 어두운 밤에 경건하게 이루어졌다. 학교에서부터 학원까지 모든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숙제까지 끝내고 나면 10시 정도가 되었다. 샤워를 하고 좋아하는 잠옷을 입으면 조용한 밤이 찾아왔다. 방 안의 불을 끄고 책상에 앉아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스탠드를 켜고 가방에서 필통을 꺼내 열었다. 학교와 학원에서 하루를 바쁘게 보내고 돌아오면 모든 기운이 쭉 빠졌다. 지난밤 뾰족하게 깎아 둔 연필도 모두 뭉뚝해져 어쩐지 지쳐 보였다. 오늘도 각자 저마다의 할 일을 멋지게 해낸 것이다.
--- p.72

하나로도 완전한 문구들 사이에서 지우개는 늘 연필과 함께 다닌다. 혼자 다니면 편할 것을. 나란히 걷는 일에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니까. 그럼에도 함께한다는 건 왠지 보기 좋다. 사물도, 사람도.
--- p.105

지우개의 디테일로 그 사람이 가진 면모를 다 알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사물과 사용자에 대한 창작자의 태도는 짐작해 볼 수 있다. 실제로 문구를 제작하다 보면 우연히 발견되는 문구는 있어도 우연히 만들어지는 문구는 없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선택의 연속으로 만들어지는 문구는 의도를 담은 노력의 산물이다.
--- p.114

도대체 판매용 지우개를 왜 쓰는 걸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마도 여러 이유가 있겠지. 판매용 지우개를 종이도 아닌 집기 위에 사정없이 문지르는 손님도 간혹 보게 되는데 그럴 때면 아, 저분은 지금 그저 아무 생각도 없는 상태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 p.137

모든 스티커에는 붙이고 싶은 이유가 있다. 특히 노트북은 일을 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도구로, 그런 노트북 위에 스티커를 붙일 때는 반대편에 앉아 나의 노트북을 보게 될 상대방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스티커를 붙이는 것으로 취향을 드러낸다.
--- p.151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지 않고 같은 모양의 스티커를 여러 장 살 때 어른이 되었다고 느꼈다.
--- p.169

휴대폰 뒷면에 어설프게 붙은 그 작은 스티커를 끝내 떼지 못하는 사람들. 아이가 막무가내로 붙여 놓았다고 머쓱하게 말하면서도 접착력이 약해진 스티커가 떨어질세라 손으로 다시 한번 꼭꼭 누르며 번지는 희미하지만 단단한 미소를 본다.
--- p.172

우리나라는 보통 1인치 코어(지관의 내경)를 사용하기에 약 26mm(정확히는 2.54cm) 지름의 지관에 마스킹 테이프가 돌돌 말리는 형태로 제작된다. 긴 휴지심처럼 생긴 지관에 마스킹 테이프가 감기고, 그것을 김밥 썰 듯 자르면 우리가 아는 마스킹 테이프의 모양이 되는 것이다.
--- p.187

마스킹 테이프의 폭은 그 안의 디자인만큼이나 다양하다. 나에게 마스킹 테이프의 폭은 붓의 호수와 같다. 물감으로 채색할 때 필요에 따라 아주 얇은 세필 붓이나 널찍한 면적을 빠르게 칠할 수 있는 페인트 붓을 고르는 것처럼 마스킹 테이프의 폭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렇게 고른 것을 쭉 찢어서 붙이는 것만으로 채색이 된다.
--- p.188

마스킹 테이프의 재점착을 경험해 봤다면 붙일 장소를 찾는 데 망설이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시대에 유일하게 아날로그적으로 실행 취소가 가능한 도구였네요.” 팀원의 이 한마디에 ‘실행 취소’라는 의미가 너무 좋다며 동시에 박수를 짝짝 쳤다. 맞다. 떼어 내면 흔적도 없이 되돌아가는 완전한 실행 취소뿐 아니라 몇 번이고 덧붙이고 다듬는 ‘리터칭’ 보정 또한 가능하다. ‘올가미’ 치듯 칼로 오려 내어 붙였다 떼었다 하며 ‘이동’도 할 수 있다. 웬만한 디지털 작업 못지않다.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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