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가 최초로 기억하는 것은 ‘숨이 막혀오는’ 감각이다. 바닷속에서 발버둥 치지만 숨이 쉬어지지 않는 것 같은 이 느낌을 A는 ‘분명 엄마 뱃속인데, 학대당했을 때의 기억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몸이 공중으로 들렸다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질 때의 붕 떠오르는 느낌과 충격, 화장실 바닥을 닦은 걸레로 얼굴이 닦일 때의 역겨움, 언제 주먹이 날아오고 걷어차일지 몰라 이불을 뒤집어쓰고 웅크리고 있을 때의 공포감······.철들기 전의 기억이 여전히 A를 괴롭힌다.
---「들어가며」중에서
오늘날 ACE 연구는 세계적으로 확산하는 추세다. 2022년 10월 기준, 세계 각국의 학술 논문이 등록된 데이터베이스(Web of Science)에 ‘Adverse Childhood Experiences’라고 검색하면 논문이 2,500건 이상 나온다. 질병을 연구하는 역학에서 출발한 ACE 연구는 정신의학, 신경과학, 유전학, 심리학, 간호학, 사회복지 분야로 확산했다. 각 연구 분야에서는 ACE의 영향력과 메커니즘, 임상 현장에서의 대응책 등을 다각적인 측면에서 탐구하고 있다.
---「제1장 ACE 연구와 현대 가족의 문제」중에서
ACE는 ‘성인 아이’ ‘독이 되는 부모’와 밀접한 개념이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가 있다. 바로 ACE는 당사자가 스스로 ‘피해자’라고 인식하는지 여부와 상관없는 객관적인 개념이라는 점이다. 당사자의 판단이 아닌, 그 사람이 겪은 과거의 사실들로 ACE가 있었는지, 그 사람이 ACE 생존자인지 판단한다. ACE는 아이가 극심한 스트레스 환경에서 성장하는 것 자체를 문제로 인식하고, 그런 상황과 장기적인 영향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문제를 ‘아동 학대와 그 트라우마’처럼 ‘행위와 결과’로 받아들여 행위자/피행위자=가해자/피해자로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환경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ACE 연구의 독자성과 가치가 있다.
---「제2장 몸과 마음의 변화」중에서
인간의 신체는 과도한 스트레스에 장기간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환경에 있으면, 후성 유전체의 형질이 바뀌거나 뇌 구조 및 기능이 변화하거나 내분비계·면역계 시스템에 이상이 생기면서 심신에 질환이 생긴다(생물학적 메커니즘). 우리의 신체는 다양한 구조에 따라 제어되고 조화를 이루지만 ACE가 일으키는 유독성 스트레스가 이 정교한 인체 시스템을 혼란에 빠뜨리고 전 생애에 걸쳐 건강을 해칠 수 있다.
---「제2장 몸과 마음의 변화」중에서
ACE 생존자는 수업을 잘 따라가지 못하고 공부를 못하고 이유 없이 몸이 힘들고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는 상태를 경험하기 쉽다. 더구나 ACE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사회적으로 장려되는 목표를 부정적으로 여기거나, 학습과 일에 대한 의욕이 낮아지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되었다. 눈앞의 과제에 도전하는 의욕, 더 좋은 환경을 추구하는 마음은 인생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기반이 되는데, ACE 생존자는 이러한 의욕을 느끼기 힘들다.
---「제3장 사회경제적 지위에 미치는 영향」중에서
‘회복탄력성’이 부각될수록 부정적 경험을 극복하는 일이 마치 ‘자기책임’인 것처럼 여겨진다. 부정적 경험을 극복하려면 당사자의 의지가 필요한 건 맞지만, 그 의지조차 가질 수 없을 만큼 괴로운 상황에 있는 사람이 현실에는 존재한다. 부정적 경험이나 불리함이 누적돼 자신을 변화시킬 힘이나 용기가 없는 사람에게 ‘자기책임’이라며 비난하는 행위는 잔인하기 이를 데 없다.
---「제5장 ACE와 회복탄력성」중에서
쉰여섯이 된 B는 현재 한 소년원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다. 그 소년들 중 8할이 학대받은 경험이 있다고 했다. “저도 학대받은 경험이 있으니까 그 아이들과 조금은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정신의학·심리학에 조예가 깊고 교정 의료에 정통한 상사와, 소탈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동료들 덕분에 현재는 마음 편히 직장에서 일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음주 문제가 있어 술을 끊기 위한 정기 모임에 한 달에 두 번 참석하고 있다. B는 여전히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익사하고 싶다는 마음을 떨쳐내지 못하고 방황하며 살고 있다”고 말한다. “돈을 바친다는 조건 없이 사랑받는다면 어쩌면 저 자신에게 ‘살아있어도 괜찮다’고 말해 줄 수 있겠죠. 그런데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아직까진 상상도 되지 않아요.” B는 오늘도 ‘언젠가는 죽을 수 있다’는 마음을 원동력으로 살아가고 있다.
---「제6장 ACE 생존자의 이야기」중에서
학교에 가지 않는 날에는 집에 혼자 있거나 형제자매와만 지내던 Y. 손을 맞잡고 집에 데려다주는 내게 Y는 “밤이 올 때까지 집에서 함께 놀아줘요. 제발요”라며 계속해서 졸라댔다. 외로움이 묻어나는 모습에 나는 아이를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이 아이가 언제라도 들를 수 있는 장소가 집에서 몇 분 거리에 생겼다는 것, 아동 식당의 어른들, 주민위원, 행정 직원, 학교 교사 등 Y를 보살피는 어른이 아이의 주변에 겹겹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나는 Y와 폭행 사망 사건의 피해자인 여자아이 그리고 가해자가 된 남자아이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었을까? 직접적으로 지원하는 역할을 맡지 않은 나는 눈앞에 쌓여있는 일과 잡무에 시달리느라 내 아이들을 돌보기에도 벅차다······.나의 무력감은 날로 심해진다.
---「나오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