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각노크펜, 엽서 증정(각 포인트 차감)
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등단 40주년 맞은 도종환 시인의 역작
『접시꽃 당신』 등의 작품으로 한국 서정시의 거장이라 불리는 도종환 시인의 신작. 가장 밝고 환한 시간 정오에서 멀어진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위로와 힘이 되는 시들을 골라 실었다. 우리 안의 가장 어두운 모습을 들여다보게 하는 묵직한 울림을 지닌 시.
2024.05.21.
소설/시 PD 김유리
|
|
제1부
깊은 밤 쉬는 날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흐린 날 바깥 쌍무지개 노을 낙조(落照) 1 낙조 2 동행 별 고요 사의재(四宜齋) 소금 사흘 뒤 그의 시 풀잎의 기도 초저녁별 제2부 예감 구월 태풍 공소(公所) 늦게 핀 꽃도 아름답다 가을 산길 가을 강 가을 나무 고마운 일 2 숲을 떠나온 지 오래되었다 결실 매화나무 촛불 네개 대림(待臨) 법고 백색 감옥 이단 가난한 절 밤바람 사랑 제3부 새해 콩떡 로잔 속유(俗儒) 심고(心告) 오후 폭설 입동 겨울나무 철쭉꽃 이른 봄 초봄 편지 고마운 일 1 어떤 꽃나무 꽃나무 라일락 좋은 나무 제4부 사림(士林) 출항 도시 장미 칼 충돌 무너진 신전 그때 연꽃 뜨거운 고독 칠월 성탄의 밤 겨울 산 새집 차를 기다리는 시간 처서 전세 적요 전야 해설|진은영 시인의 말 |
도종환,都鍾煥
도종환의 다른 상품
|
지금은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사방이 바닷속 같은 어둠입니다 우리 안의 깊은 곳도 환한 시간이 불빛처럼 내려올 때 있고 해 뜨는 쪽과 멀어져 그늘질 때 있고 캄캄해져 사물을 분별하지 못할 때 있습니다 그 모두가 내 안의 늪으로 흘러와 고입니다 서로를 부족한 그대로 인정하게 하소서 타인이 지옥이지 않게 하소서 곳곳이 전쟁터이오니 당신 손으로 이 내전을 종식하여주소서 사람들이 고요한 밤의 깊은 흑요석 같은 시간을 만나게 하여주소서 내 안의 어두운 나를 차분히 응시하게 하여주소서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중에서 날이 흐리다 날이 흐려도 녹색 잎들은 흐린 허공을 향해 몸을 세운다 모멸을 모멸로 갚지 말자 치욕을 치욕으로 갚지 말자 지난해 늦가을 마디마디를 절단당한 가로수 잘린 팔뚝마다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을 가진 연둣빛 잎들이 솟아나고 있다 고통을 고통으로 되돌려주려 하지 말자 극단을 극단으로 되돌려주려 하지 말자 여전히 푸르게 다시 살아가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복수다 ---「흐린 날」중에서 도시 하늘에 별이 지워지고 있는 걸 내가 눈여겨보지 않으면 먼지 속에서 내 영혼이 지워지고 있는 걸 별들도 눈여겨보지 않으리라 ---「별」중에서 썩어가는 것들과 맞서면서 여전히 하얗게 반짝일 수는 없다 부패하는 살들 속에서 부패를 끌어안고 버티는 동안 날카로운 흰빛은 퇴색하고 비린내는 내 몸을 덮었다 그걸 보고 사람들은 저게 무슨 소금이야 한다 내가 해야 할 일을 경전은 거룩하게 기록했으나 이승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비린내 나는 세상을 끌어안고 버티는 일 버티다 녹아 없어지는 일 오늘도 몸은 녹아내려 옛 모습 지워지는데 그걸 보고 사람들은 저게 무슨 소금이야 한다 ---「소금」중에서 결실이라는 말을 나는 함부로 쓰지 않는다 충만이라는 말의 무게와 그것이 만들어내는 빛깔과 향기에 감사해하지만 그건 내가 만든 게 아니다 사람들은 내 몸의 터질 듯한 과육에 주목하지만 여기까지 함께 온 나뭇잎들을 나는 더 애틋하게 바라본다 내 몸 안쪽에도 내상의 흔적이 많지만 태풍에 찢긴 잎은 상처가 더 깊어졌고 나 대신 벌레에게 살을 내준 잎은 몸 한쪽이 허물어졌다 내게 물방울을 몰아주고 난 뒤 바싹 마른 잎과 깊은 멍이 든 잎 들이 여기까지 함께 왔다 그들 없이 나 혼자 왔다면 팔월의 칼끝 같은 시간을 넘지 못했으리라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내 몸을 붙잡아준 꼭지의 헌신이 없었다면 나는 노랗게 익어가는 시간까지 오지 못했으리라 이들과 함께 왔다 나는 나무의 일부이지 전부가 아니다 ---「결실」중에서 성취 앞에서 저렇게 절제할 수 있을까 시련 앞에서 저렇게 겸허할 수 있을까 나무 가득 꽃 피워놓고 교만하지 않는 백매화처럼 단 한잎도 붙잡지 못하고 날려 보내면서 비통해하지 않는 산벚나무처럼 ---「꽃나무」중에서 라일락은 왜 거기 있을까 사월이 간절하게 불러서 거기 있다 너는 왜 거기 있는가 ---「라일락」중에서 진정으로 아름다운 산은 겨울에 더 아름답다 아름다운 사람은 자기 생의 겨울에도 아름답다 ---「겨울 산」중에서 |
|
정세의 소용돌이 속에서 되새기는 역사의 가르침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번 시집에도 시인과 정치인이라는 두가지 정체성과, 거기서 비롯되는 경험이 오롯이 담겨 있다. “시 쓰다 말고 정치는 왜 했노?”라는 물음에 시인은 “세상을 바꾸고 싶었”(「심고(心告)」)다고 순정한 마음을 고백한다. 또한 역사를 통찰하는 격조 높은 비유로 우리가 곱씹어볼 고민거리들을 던진다. 조선시대 사림(士林)의 정계 진출을 돌이켜보자. 큰 뜻을 품은 성리학자들이 선조 치하에서 정권을 잡았지만 이내 붕당 간의 소모적인 반목이 심화되고, 외세의 침략까지 맞이한 조선은 심대한 위기에 처한다. 급기야 처절한 징비(懲毖)의 기록을 후세에 남겨야 했던 사림의 실패를 시인은 작금의 현실에 대입한다. “꿈꾸던 세상이 오리라던 믿음”은 무너지고 “수백년 적폐를 단 몇해에 바로잡는 게/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뼈저리게 깨닫는다. 어째서 “나라가 그 지경이 되었는지”(「사림」)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묻는다. 이때 “오해의 화살”에 맞고 “비난의 칼날에 베여 비통해”(「새해」)할지언정 “적개심으로 무장한 유령들”(「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을 탓하지 않는 시적 화자의 모습은 눈길을 끈다. 그는 깊이 절망하면서도 “성정이 남루해지는 건 오히려 제가 아닌가”(「속유(俗儒)」) 자문하며 반성한다.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내 안의 어두운 나를 차분히 응시”(「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하는 장면에는 존재의 본질을 꿰뚫는 신령한 기운마저 서려 있다. 이 가없는 참회의 어둠 속에서 길 잃은 ‘나’를 이끌어주는 것은 이치를 탐구하고 백성의 안위를 염려하며 ‘기본’에 충실했던 옛 성현의 가르침이다. ‘나’는 다산 정약용, 퇴계 이황 등 위대한 스승들을 떠올리며 격물치지(格物致知), 이용후생(利用厚生), 경세치용(經世致用)과 같은 유학의 정신을 읊조리고 흔들리는 마음의 중심을 잡는다. 번뇌와 좌절을 딛고 역사의 교훈과 초심을 치열하게 좇음으로써 간곡하고 간절하게, 정오의 도래를 주문하는 것이다. 혼탁한 세상을 정화하고 어지러운 마음을 추스르는 시 이번 시집 곳곳에 담긴 아름다운 자연물은 감상의 대상보다 반성의 매개체이자 삶의 지향에 가깝다. 시인은 온갖 모욕과 증오가 난무하는 도시에서 부대끼느라 피폐해진 심신을 자연에 의탁하여 “죽음과 영원한 삶의 이치 밝게 꿰뚫어보는/깊은 지혜”(「이단」)를 얻는다. 예컨대 “나무 가득 꽃 피워놓고/교만하지 않는 백매화”(「꽃나무」)를 보며 절제와 겸허의 미덕을 배우고, “자신에게 오는 모든 순간순간을/받아들일 줄”(「가을 나무」) 아는 나무의 미덕에서 자연의 섭리에 따르는 삶의 경건함을 깨닫는다. 시적 화자가 자연으로부터 느끼는 감정은 숭고함에 가깝다. 그에 비한다면 인간의 마음은 한없이 초라하지만, 그 초라함마저 숨기지 않고 털어놓음으로써 시인은 독자들에게 공감의 자리를 내어놓는다. “혼탁한 물”과 “퀴퀴한 냄새에 휩싸인” 가로수를 바라보며 자신 또한 “도시로 불려 나와 산 지 오래되었”(「도시 장미」)다고 말하는 담담한 문장이 씁쓸하게 읽히는 까닭이다. 그러나 흙먼지 덮어쓴 가로수라 한들 나무가 아닐 수는 없다. 시인도 마찬가지다. 세속의 때가 자욱한 곳에 거한들 가슴에 자연을 품은 이상 시인은 시인이 아닐 수가 없다. 그렇기에 이 무겁고 “사나운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사의재(四宜齋)」) 다짐한다. 거센 태풍과 노도에 맞서는 이 인생이라는 항해가 “치열하고 절박한 생의 시간으로 축적”(「출항」)되리라 믿고 몇번이고 다시 출항을 결심한다. 역경 앞에서 삶의 의지를 더욱 굳건히 하는 묵묵한 자세에서 우리는 도종환 시의 심원한 내력을 확인할 수 있다. 불의의 시대를 함께 건너는 따스한 동행 전쟁 같은 삶을 살면서도 시인은 “세속의 길과/구도의 길이 크게 다르지 않다”(「풀잎의 기도」)는 믿음을 간직하며 온유함을 잃지 않는다. ‘부드러운 직선’처럼 섬세한 감성과 올곧은 선비정신을 동시에 가꾼다. “제비꽃 애기똥풀 같은 꽃만 보아도 마음이 순해지고”,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게 더 많고/세상에는 나보다 훌륭한 사람이 많다는 걸” 명심하며, 늘 몸을 숙여 세상의 낮은 곳에 온기를 나눈다. 고달프고 외로운 이들에게 “하루를 잘 살아내는 일이/가장 큰 복수”(「숲을 떠나온 지 오래되었다」)라고 진정어린 위로를 건네기도 한다. 이번 시집을 통해 시인이 그늘진 인생의 골목길에 밝힌 “사랑과 연민의 초”(「대림(待臨)」) 옆에 나란히 서보자. 사계절이 무상하듯 자정의 암흑도 언젠가 걷히기 마련이다. 가녀린 촛불 하나도 언젠가 “칠흑 같은 세상”(「전야」)을 밝힐 무수한 촛불이 되고 끝끝내 정오의 햇살로 세상을 비출 것이다. 시인의 말 “너는 왜 거기 있는가?” 사월의 꽃들이 묻습니다. 대답을 준비하는 동안 모여든 생각들이 꽃잎처럼 흩날리며 떨어져 쌓입니다. 지금 우리는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에 와 있습니다. 정오는 밝고 환한 시간입니다. 생명을 가진 것들이 가장 왕성하게 살아 움직이는 시간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세상, 사람과 자연이 푸르고 따뜻하게 공생하는 시간입니다. 알베르 까뮈는 정오를 균형 잡힌 시간이라 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내면은 균형이 깨진 채 극단으로 가 있습니다. 세상도 극단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우리의 내면이 외화된 게 세상이라고 한다면 어둡고, 거칠고, 사나운 세상은 우리가 만든 것입니다. 성찰 없는 용기, 절제 없는 언어, 영혼 없는 정치는 전쟁 같은 일상을 살아가게 합니다. “가을 물같이 차고 맑은 문장은 흙먼지에 물들지 않는다(秋水文章不染塵)”라는 말이 있습니다. 흙먼지 몰아치는 하루하루를 살면서 티끌과 먼지에 물들지 않고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은 오탁악세(五濁惡世)나 다름없고 내면은 갈수록 황폐해지는데 시의 정신, 시대정신을 견지하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나마 시와 만나는 시간은 영성을 회복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간절해지는 시간, 고요와 균형을 회복하는 시간, 거진이진(居塵離塵)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시의 위의(威儀)를 지키며 품격을 잃지 않는 시, 가슴에 따뜻하게 다가가는 시, 가을 물같이 차고 맑아 정갈하게 마음을 씻어주는 문장,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작은 힘이 되어주는 언어가 되고 싶었습니다. “너는 왜 거기 있는가?” 오월의 나무들도 묻습니다.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쌓인 고뇌의 흔적들을 우선 시로 먼저 내어놓습니다. 부족하고 부족한 데가 많은 저를 데리고 이 순간까지 함께 와주신 분, 여기까지 동행해주신 고마운 분들께 머리 숙여 깊이 절합니다. 고맙습니다. 2024년 4월 도종환 |
|
잘게 연을 나누어 이미지의 밑밥을 툭툭 던져놓는 시가 있는가 하면 아예 연을 나누지 않고 기어이, 끝까지 연을 통째로 끌고 가는 시가 있다. 도종환은 후자의 고집스러운 기법을 택함으로써 이 고전적인 형식이 진정성에 다다르는 통로라는 걸 보여준다. 첫 행부터 마지막 행까지 단 한번도 생각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듯, 처음부터 믿어온 사람과 자연에 대한 신뢰가 죽고 나서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듯 그 형식은 매우 단호하다. 형식으로 내용을 다잡아 메시지를 끓어넘치게 하지 않는 이 방식은 근래 십수년 “도시로 불려 나와 산” 시인의 내적인 삶의 원리이기도 하다. 시인은 ‘속유(俗儒)’에 서 벗어나고자 ‘심고(心告)’의 태도를 견지하는 게 “무너진 신전”을 내면 안에 복원하는 길이라 확신하는 듯하다. 그래서 이 시집의 문장들이 간절한 기도의 양식을 띠게 된 것은 운명적인 결과라고 봐야 한다. 교만하지 않아야 하고, 겉넘지 않아야 하고, 건조한 날도 소중하게 여겨야 하며, 무엇보다 ‘천명(天命)’을 알아야 한다니! 점점 더 성스러운 곳을 향해 가는 발소리를 들으며 나 같은 세속의 독자는 주저앉아서 프란츠 카프카의 묘비명을 중얼거린다. “내면을 사랑한 이 사람에게 고뇌는 일상이었고, 글쓰기는 구원을 향한 간절한 기도의 한 형식이었다.” 순결한 정신주의자의 고뇌가 마음의 쓴 약이 되고 또 마음의 회초리가 되겠다. - 안도현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