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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잔혹극 --- 7
역자 후기_이동윤 --- 299 발문: 문맹과 문해 사이_장정일 --- 303 |
Ruth Rendell, Barbara Vine,바바라 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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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 책의 저자입니다.
2024-06-21
고려원을 아시는지. 파격 홍보로 대한민국 최대 단행본 출간을 자랑했던 곳이다. 출판사를 모르더라도 영웅문이나 우담바라의 TV 광고는 기억하지 않을까 싶다. 그중 유니스의 비밀이라는 소설이 있었다. 학창시절 읽었던 숱한 추리소설 중에서도 단연 넘버 원이었다. 나는 이 작품을 계약하고 고민 끝에 제목을 활자잔혹극으로 바꾸었다.
활자잔혹극은 거의 팔리지 않았다. 이렇게 안 팔릴 수 있나 싶을 만큼 안 팔렸다. 5년 뒤 계약만료로 창고에 쌓인 책들을 폐기할 때는 눈물이 나더라. 한데 ‘물리학자가 추천한 혐오를 이기는 책’으로 김상욱 교수가 소개하며 문의가 쇄도하기 시작한 거다. 젠장(털썩). 하지만 “출판사에도 책이 없습니다, 미안해요”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활자잔혹극은 추리소설로서는 도발적인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범인을 처음부터 밝혀버렸다. 살인의 동기는 황당하다. 글을 읽고 쓸 줄 몰랐기 때문에, 즉 자신이 문맹임을 감추기 위해 한 가족을 살해했다.
이 대목을 김상욱 교수는 “우리나라는 문맹이 없으니 이렇게 가정해 볼까요. 내가 영어를 잘 못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영어로 이야기하는 파티에 갔어요. 내가 영어를 못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밝히고 싶지 않은 상황을 생각해보면 주인공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소설을 읽고 나면 당신은 궤변 같은 첫 문장을 이해하게 될 뿐 아니라 혐오의 시대를 극복하는 지혜도 얻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복간할 결심을 하진 못했다. 이미 한번 망했기 때문에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때 인터넷에 올라온 글 하나. “김상욱 교수님이 추천해서 읽었는데 너무 재밌더라고요! 소장하고 싶습니다! 중고가 3만원에 돌아다녀요ㅠ”
이 말이 내 안에 남아 있던 심지에 불을 붙였다. 그래서 다시 계약했다. “이 사달을 내셨으니 책임지셔야 한다”고 협박하여 엄청 바쁜 김상욱 교수의 추천사도 받았다. 아아 그리하여 10년 만에 다시 펴냅니다. 루스 렌들의 걸작, 북스피어의 복간할 결심 시리즈 제1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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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스 파치먼이 커버데일 일가를 살해한 까닭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이다.
뚜렷한 동기도 치밀한 사전 계획도 존재하지 않았다. 금전적 이득도 안전 보장도 없었다. 심지어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여파로 그녀의 무능력은 한 가족과 몇 안 되는 마을 주민에게는 물론 온 나라에 알려지게 되었다. 스스로에게 재앙을 불러왔을 뿐이다. 그녀의 뒤틀린 마음 한구석에서도, 어떤 이득도 없으리라는 생각은 줄곧 존재했다. 하지만 그녀의 친구이자 공범이었던 이와는 달리, 그녀는 미치지 않았다. 20세기 여성으로 가장한 원시인이라 생각하면, 그녀는 극도로 정상적인 정신 상태였다고 할 수 있으리라. --- p.7 커버데일 가족은 참견꾼들이었다. 그들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려는 선의를 품고 다른 사람 일에 끼어들었다. 타인에 대한 품평을 양해해 준다면, 자일즈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의 말을 인용하여 ‘그들의 의도는 나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기적인 인간이 되지 않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그들은 자일즈가 본능적으로 아는 사실, 이기심이란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자신의 방식대로 살라고 요구하는 것임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 p.75 잡담을 나눈 일은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조앤 스미스야말로 그녀와 가장 잘 지낼 수 있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녀를 교회로 데려가려는 기미가 보이는 건 자신의 인생에 참견하려는 듯해서 싫었지만. 어쨌거나 그녀는 그들의 대화에서 특별히 위안이 되는 점을 발견했다. 활자에 관련된 이야기가 조금도 끼어들지 않았던 것이다. --- p.104 |
나는 문자 중독자다. 나에게 문자는 기쁨이고, 책은 축복이다. 그런데 활자 잔혹극이라니. 이미 문자에 잔뜩 찌든 우리가 문자 없는 삶을 상상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사람들을 죽였다는 책의 첫 문장이 궤변이라 느껴진다. 하지만 문자는 당연하지 않다. 우리가 무엇인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렇지 않은 것은 혐오를 일으킬 수 있다. 나아가 누군가에게는 굴욕과 고통이 될 수도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당신은 궤변 같은 첫 문장을 이해하게 될 뿐 아니라 혐오의 시대를 극복하는 지혜도 얻게 될 것이다. - 김상욱 (물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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