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과 여백으로 이어진 문장 사이에서 생에 대한 실감들이 떠오른다. 숨찬 대목이 없는데도 멈춰 서서 망연해진다. 과거도 추억도 없이, 심지어 미래도 없이 남녀가 사랑을 나눈다. 이런 사랑이 가능한가? 불모지에 발가벗은 남녀를 풀어놓고 작가마저 망연히 그 여로를 쫓는 것은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이다. 현재형의 직선 문장들이 벼랑이 되었다가 평지가 되는 문체의 힘은 오랫동안 우리 문학의 자산이 될 것이다. 그리고 독자들은 이 둔중한 감동의 끝에 각자의 마음 속 중앙역에 이런 문장 하나를 갖게 될 것이다. “사랑은 현재형으로만 기억한다.”
이순원, 김별아, 전성태, 윤성희, 김태용, 강유정, 송종원(제5회 중앙장편문학상 심사위원)
김혜진은 동년배의 젊은 소설가들처럼 가상의 시공간으로 망명하거나 개연성 있는 에피소드 안에 숨지 않는다. 이곳을 떠나 희망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 희유한, 거의 절멸한 가치인 사람 가운데서 사랑을 찾는다. 힘껏 상상해야 가닿을 수 있는 관념적 개연성의 시공간이 아니라 바로 여기, 이곳에서 말이다. 상상의 힘을 덜어 김혜진은 여기, 이곳을 들여다보라고 말을 건다. 악취와 소음과 지저분한 외양 때문에 보려 하지 않았던 그 세계에 마치 응달에 기꺼이 자라난 생명과 같은 사람이 있음을 발견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사람과 사람이 부대껴,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그 오래된 토양을 다시 발견할 수 있다고 말이다. 이는 김혜진의 소설 《중앙역》의 사랑 이야기가 감동을 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이 추상적이면 추상적일수록, 더러워지면 더러워질수록, 바닥없이 비루해질수록 그 사랑이야기만큼은 간사한 감각의 세계를 벗어나 우리의 눈길을 끈다.
강유정(문학평론가)